경기도 남양주 외곽의 조용한 주택가, 정현숙 작가의 작업실을 찾은 날은 화창한 초여름 오후였다. 작업실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넓은 작업실을 감싸고 있는 주변 풍광이 아닌 빼곡하게 쌓인 작품이었다. 수십 년 동안 다듬어진 물성과 빛, 그리고 매만진 손끝의 시간이, 그 빛나는 조각들 사이에 고요하게 스며 있었다. 작업실 곳곳엔 아직도 미완의 스케치와 실험 중인 캔버스들이 놓여 있었다.
“똑같은 걸 반복하는 게 체질에 안 맞아요. 늘 뭔가 조금씩 다르게, 새로운 걸 시도하는 스타일입니다.”
실제 작가의 작품 세계는 20년간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오는 5월 27일부터 열릴 개인전 《20yrs》는, 그 오랜 시간의 결을 다시 꺼내어 세상 앞에 내놓는 자리다.
정현숙은 서울에서 회화를 공부한 뒤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대학교(UPenn)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처음 마주한 현실은 불편한 진실이었다.
“같은 물감으로 그려도 다르더라고요. 서양 친구들은 몸에 밴 듯, 마치 숨 쉬듯이 그리는데, 저는 흉내만 내는 기분이었어요.”
그 좌절의 언저리에서 찾았던 지도교수 히토시 나가자토는 그녀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너는 김창열이나 이우환처럼 너만의 언어를 만들어야 해. 서양 친구들과 같은 무기만 가지고는 이길 수 없어.”
나가자토는 일본인으로서 서양 미술계에서 동양적인 미학을 고민하고 차이를 고심해온 인물이었기에, 그 조언은 더욱 절실하게 와닿았다. 하지만 ‘동양적인 것’을 찾는 여정은 막막했다. 귀국 후에도 그는 몇 년간 서양식 추상화 작업을 이어갔다.
“물감이란 물성을 두고 이것저것 시도했어요. 고려불화에서 본 금빛 같은 걸 아크릴로 재현해보기도 했죠.” 하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순간, 이건 또 다른 서양화의 틀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환점은 1998년, 어머니의 장례 후 유품을 정리하던 어느 날 찾아왔다. 까만 옻칠 위에 자개 무늬가 박힌 장롱 앞에서 그는 멈춰 섰다.
“장롱 문짝이 마치 캔버스 같았어요. 그 빛과 무늬가 갑자기 말이 되는 것 같았죠. 그때 스친 생각이 ‘이걸 해봐야겠다’였어요.”
자개는 조개류의 내부층을 얇게 갈아 만든 전통 장식재다. 오랜 시간 가구나 공예품에 사용됐지만, 미술 작품의 주재료로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때만 해도 자개를 쓰는 작가는 정말 몇 명 없었어요. 자개가 어른들 물건, 시대 지난 취향쯤으로 치부됐거든요.”
그는 통영 자개 공방에서 원판을 직접 사들였고, 실험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다.
“처음엔 자개를 깨서 가루로 만들기도 하고, 흩뿌려 보기도 하고… 그냥 무작정 부딪혔어요. 결국 자개라는 건 나한테 붓과 물감을 대신하는 언어였던 거죠.”
라인, 그리드, 사각형— 자개로 만든 최소 단위의 구성 요소들은 그의 회화 작업에서 점점 견고한 구조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드로 촘촘히 짠 화면 위에 올라선 자개는 마치 시간의 층을 연상시켰다.
작가는 자개를 붙이는 과정을 ‘몰입과 강박 사이’라고 표현했다. 그 섬세하고 반복적인 작업은 공예가의 손길과 흡사하지만, 의도는 회화의 미학 안에 있다.
“어떤 날은 내가 작가인지 장인인지 헷갈릴 때도 있어요. 하지만 현대 미술이란 건 결국 다 섞이고, 다 포용하잖아요. 재료가 무엇이든 의미가 담기면 그게 미술이죠.”
자개 특유의 반사광은 자연스럽게 시각적 착시를 유도했고, 그는 이를 이용해 옵아트(Optical Art)적 작업으로 나아간다.
“평면인데도 부조처럼 튀어나와 보이는 작업을 많이 했어요. 자개가 빛을 머금고 있어서,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죠. 그게 정말 매력적인 거예요.”
그 시기의 작품들은 나비, 달항아리, 그리고 때로는 조선 초충도에서 따온 벌레 이미지 같은 전통적 상징과 결합하였다.
“나비는 생명과 죽음, 윤회의 상징이기도 해요. 초충도에 나오는 나비들을 자개로 표현하면서, 생명력이 계속 이어지는 걸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작가는 강아지를 조각해 자개로 입히는 작업도 이어간다.
“강아지를 워낙 좋아해요. 예전에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을 때 너무 힘들었죠. 그 감정을 작업으로 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어요. 강아지를 소품으로 표현하면서, 심적 고통을 조금씩 잊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정현숙은 오랫동안 자개라는 재료 하나로 변화를 거듭해왔다. 과거에는 옵티컬한 효과를 실험했고, 최근에는 색감을 더 밝히며 추상적인 구성에 집중하고 있다. “대중은 구체적인 도상—달항아리나 나비 같은 걸 좋아하죠. 추상은 어렵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추상 쪽이 더 마음이 가요. 조금씩 더 정제되고 덜 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자개를 사용하는 작가들이 최근 급격히 늘어난 데 대한 소회도 솔직하다. “예전엔 희소성이 있었죠. 지금은 100명도 넘는 것 같아요. 처음엔 좀 서운했어요. ‘이제 이건 나만의 것이 아니구나’ 싶어서요. 그런데 어느 갤러리 대표가 그러시더라고요. ‘장르가 되면, 시장이 커진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자개를 붙이는 행위는 그에게 단지 조형의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기억, 감정과 존재를 붙이는 일이다. 그는 오늘도 작업실에서 다음 그림을 준비하고 있다.
“아이디어는 가만히 앉아 있을 땐 안 나와요. 손을 움직이다 보면, ‘이건 아니네?’ 하면서 다음 게 떠올라요. 아주 작은 계단을 밟듯이, 그렇게 다음으로 가는 거죠.”
정현숙 작가의 개인전 《20yrs》는 5월 27일부터 6월 21일까지 서울 삼청동 오매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자개를 회화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2000년대 초반 이후 20년간의 궤적을 시대순으로 구성한 회고전이다. 자개와 크리스탈을 주요 재료로 사용한 대표작은 물론, 달항아리, 나비, 원형 추상, 비구상 실험 등 다양한 시도가 집약된 신작들이 함께 소개된다.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된 자개의 물성,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시간의 결을 조용히 응시할 수 있는 귀한 기회다.
[박지훈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