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의 성장 한계가 뚜렷해지면서 글로벌 IT 산업의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
애플·삼성·메타·구글 등 빅테크는 이제 손 안의 화면이 아닌 ‘눈앞의 화면’, 즉 스마트글라스와 XR(확장현실)을 차세대 전장으로 삼고 있다.
인공지능(AI)과 결합한 이 기기들은 단순한 웨어러블을 넘어 새로운 ‘AI 시대의 새로운 상호작용 플랫폼’으로 진화 중이다.
‘포스트 스마트폰’ 시대의 주도권을 향한 경쟁이 본격적으로 불붙고 있는 셈이다.
교체 수요 둔화와 기술 포화로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이 정체 국면에 들어서자, 주요 IT 기업은 차세대 성장 축으로 확장현실(XR)과 증강현실(AR) 기기를 내세우고 있다.
10여 년간 모바일 생태계를 지배해온 스마트폰은 이제 교체 주기가 길어지고 성능 격차도 줄면서 성장 동력을 잃었다는 분석이다.
이에 애플·삼성전자·구글·메타 등 주요 기업들은 XR과 AR을 차세대 플랫폼으로 주목하고 있다.
XR은 현실과 가상을 결합한 기술로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을 모두 포함한다.
XR 시장은 초기에는 몰입형 체험용 헤드셋이 주류였으나 최근엔 AI와 결합한 ‘지능형 인터페이스’로 진화하며 ‘포스트 스마트폰’ 시대의 핵심 축으로 부상했다.
특히 시선·음성·손동작을 인식해 정보를 탐색하거나 메시지를 주고받는 ‘멀티모달 인터페이스’가 구현되면서 사용자는 더 이상 손에 기기를 쥘 필요가 없게 됐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VR 헤드셋 출하량은 전년 대비 14% 줄었지만 AR 스마트 안경은 50% 증가, 전체 스마트 안경 출하량은 110% 급증했다.
그중 AI 기능 탑재 모델 비중은 약 80%에 달하며 2027년까지 연평균 약 70% 성장이 예상된다. 이 보고서는 “AR과 AI의 결합이 시장 성장의 핵심”이라고 짚었다.
기기 진화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메타는 레이밴 스마트글라스에 고해상도 디스플레이와 AI 음성 비서를 추가했고, 애플은 ‘비전 프로’로 공간형 컴퓨팅(spatial computing) 개념을 제시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퀄컴 연례행사에서 ‘프로젝트 무한’을 일부 공개하며 XR 시장에 공식 진입했다.
삼성전자는 구글과 협업해 만든 ‘프로젝트 해안(HAEAN)’도 준비 중이다.
업계는 이 같은 빅테크들의 움직임을 ‘스마트폰 이후 인터페이스 전쟁의 서막’으로 보고 있다.
XR·AR 기기가 손 대신 시야와 감각을 활용하는 3차원 인터랙션 플랫폼으로 기능을 확장하면서, AI 결합을 통한 새로운 사용 경험이 본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 전환은 산업 구조에도 변화를 예고한다.
XR 기기에는 초소형 디스플레이, 광학 모듈, 저전력 배터리 등 고난도 소재·부품·장비 기술이 요구된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패키징·첨단 센서 등 한국 기업의 강점 분야에서 새로운 공급 기회가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 관계자는 “스마트폰이 인간의 손을 점령했다면, XR과 스마트글라스는 이제 인간의 시야와 감각을 한 차원 확장할 기술이 될 것”이라며 “AI와 결합된 차세대 기기 경쟁은 단순한 제품 출시가 아닌, 미래의 플랫폼 주도권을 건 글로벌 패권 경쟁으로 번질 수 있다”고 말했다.
XR 시장의 새로운 변수는 단연 ‘삼성전자’다. 그동안 스마트폰, TV, 반도체 등 전통 하드웨어 분야에서 압도적 존재감을 보여온 삼성이 최근 XR 헤드셋 ‘프로젝트 무한(Moohan)’을 공식 공개하며 확장현실시장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삼성의 등장은 애플과 메타가 양분해온 XR 구도에 균열을 내는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삼성의 이번 신제품은 삼성전자·구글·퀄컴의 3자 협업으로 완성됐다. 삼성은 하드웨어를, 퀄컴은 스냅드래곤 XR2+ 2세대 칩셋, 구글은 운영체제(OS) ‘안드로이드 XR’을 담당했다.
삼성이 주도하는 이 연합은 애플의 폐쇄형 비전 프로 생태계에 대응하는 ‘개방형 XR 진영’의 출범으로 해석된다. ‘무한’은 4K 해상도의 마이크로 OLED 디스플레이를 양안에 탑재해 총 2900만 화소, 4032PPI의 초고해상도를 구현했다. 이는 애플 비전 프로(2300만 화소)를 상회하는 수치다.
기기 전면과 하단에는 6개의 카메라와 센서, 내부에는 4개의 적외선(IR) 카메라가 장착돼 시선·손동작·음성 명령을 인식하는 복합 제어가 가능하다. AI 기반 눈동자 추적과 제스처 인식 기능은 기존 XR 기기의 한계를 크게 개선한 핵심 요소로 꼽힌다.
하단부에는 4개의 마이크가 배치돼 사용자의 음성과 주변 소음을 구분하며, 음성 명령은 구글 생성형 AI ‘제미나이(Gemini)’와 연동된다. 기기 측면 버튼을 길게 누르면 제미나이가 즉시 호출돼 정보 탐색이나 콘텐츠 추천이 가능하다.
삼성전자는 신제품 공개 행사 주제를 ‘멀티모달 AI의 새로운 시대, 더 넓은 세상이 열린다’로 정했다. 신제품의 초기 생산량은 약 10만 대 수준으로 본격 양산보다는 시장 반응을 타진하는 전략적 출시로 풀이된다.
업계는 이번 제품을 “즉각적인 수익보다 XR 생태계 조성에 방점을 둔 포석”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내년 공개를 목표로 경량형 스마트글라스 ‘프로젝트 해안(HAEAN)’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무한’이 기술력과 사용자 반응을 검증하는 역할이라면, ‘해안’은 일상 속 착용을 염두에 둔 상용화 전환 모델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게 업계 전문가들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은 메타의 대중성과 애플의 프리미엄 이미지를 모두 의식한 하이브리드 전략을 취하고 있다”며 “하드웨어 경쟁을 넘어 OS·AI·콘텐츠를 아우르는 새로운 플랫폼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고 말했다.
XR과 스마트글라스 시장이 급격히 팽창하는 가운데, 글로벌 빅테크들은 ‘눈앞의 화면’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메타는 선두 사업자로서 생태계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메타는 최근 ‘메타 레이밴 디스플레이’를 공개하며 AR 안경 시장의 주도권을 굳혔다.
기존 카메라·스피커 중심 제품에 투명 디스플레이를 탑재해 메시지 확인·번역·내비게이션 기능을 현실 시야 위에 바로 띄우는 방식이다.
여기에 손목에 착용하는 ‘뉴럴 밴드(Neural Band)’를 통해 손가락 움직임만으로 음악 재생이나 볼륨 조절을 수행할 수 있다. 클래식한 레이밴식 ‘웨이페어러(Wayfarer)’ 프레임 디자인을 그대로 유지해서 기술 기기라기보다 일반 안경에 가까운 일상 착용감을 구현했다는 평가다.
누적 판매량은 200만 대, 가격은 799달러 수준으로 프리미엄과 대중성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잡았다는 평가도 있다. 메타는 VR에서 확보한 기술과 콘텐츠 생태계를 AR로 확장해 ‘하드웨어+콘텐츠+AI’ 삼각 구도를 완성하고 있다.
애플은 비전 프로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2세대 모델인 ‘비전 프로2’를 준비 중이다.
애플은 2027년경 ‘애플 글라스’를 약 300만~500만 대규모로 출하할 계획이며, 아이폰·비전 프로·앱스토어 등 자사 생태계와의 연동을 핵심 강점으로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구글은 삼성전자와의 협력을 통해 ‘안드로이드 XR’이라는 개방형 운영체계를 내세우고 있다. 이 플랫폼은 헤드셋뿐 아니라 안경형 기기·자동차 HUD 등 다양한 폼팩터를 지원하도록 설계됐다.
구글은 또한 자사 AI 비서 ‘제미나이’를 XR 환경에 통합해, 음성·시선·손동작을 인식하는 AI 네이티브 인터페이스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의 추격도 거세다. 엑스리얼(Xreal)과 레이네오(RayNeo)의 점유율 확대 추세가 특히 주목된다. 샤오미·알리바바는 초경량 AR 안경과 AI 비서 연동 모델을 잇달아 출시했다.
글로벌 스마트글라스 시장은 메타가 선두를 지키고, 애플과 삼성·구글이 후발주자로 가세하며, 중국이 양적 공세로 시장을 넓히는 형국이다.
전문가들은 “XR·AR 경쟁의 본질은 이제 하드웨어가
아니라 생태계의 깊이와 연결성”이라며 “콘텐츠·앱·AI 비서가 통합된 플랫폼을 누가 먼저 완성하느냐에 따라 스마트폰 이후 시대의 주도권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스마트글래스의 확산은 단순한 기술 트렌드를 넘어 산업 지형을 바꾸는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XR·AR 기기에는 마이크로 OLED, 초정밀 광학, 저전력 배터리, 고성능 센서 등 첨단 부품이 집약된다. 스마트폰보다 부품 단가가 높고 기술 장벽도 높아, 새로운 공급망과 투자 기회를 동시에 만들어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AR 기기는 부품 기술력이 곧 제품 경쟁력으로 직결된다”며 “국내 디스플레이·광학·배터리 기업이 글로벌 밸류체인에 다시 편입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폰이 ‘손안의 세상’을 열었다면, 스마트글라스는 ‘시야 속의 새 세상’을 여는 기기가 되고 있다.
‘작지만 똑똑한 안경 한 쌍’이 산업의 무게 중심을 바꾸며, 포스트 스마트폰 시대의 새로운 성장 축을 만들지 이목이 쏠린다.
[박소라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2호 (2025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