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반도체 시장은 인공지능(AI)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이에 따른 고성능 컴퓨팅 수요 증가로 고부가가치 제품을 중심으로 성장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최근 AI 기술의 발전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이를 지원하기 위한 고성능 반도체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는 것이다.
특히 엔비디아와 같은 글로벌 AI 가속기 기업들은 고대역폭 메모리(HBM) 반도체를 적극 활용해 제품 경쟁력을 대폭 강화하며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HBM은 단순한 메모리를 넘어 AI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컴퓨팅 시장의 핵심 부품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고 분석해야 하는 AI와 클라우드 서비스의 특성상 고속 데이터 전송과 낮은 전력 소비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기술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술적 강점을 바탕으로 HBM은 AI, 빅데이터, 머신러닝 등 차세대 기술을 뒷받침하며 반도체 시장의 수요를 견인하는 주요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HBM의 기술적 난이도와 생산 비용이 높아 이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업의 중요성도 점차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메모리 시장의 주도권 경쟁도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HBM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변화는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 전환을 예고하며, 관련 기업들 사이에서 기술 혁신과 생산 역량 강화를 위한 투자 확대 움직임도 더 빨라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세계반도체무역통계기구(WSTS)에 따르면, 2025년 반도체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11.2% 성장한 6970억달러(약 1025조 7000억 원)에 이를 전망이다. 이 중 로직 반도체 시장은 16.8% 성장한 2438억 달러를,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13.4% 증가한 1894억 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로직 반도체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역할을 하는 반도체를 말한다.
특히 AI 기술의 도입이 가속화됨에 따라 HBM과 같은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전무)은 “AI 서버 시장과 데이터센터 업그레이드가 맞물리며 고부가가치 메모리 반도체의 수요가 지속해서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올해 HBM 등 고부가 반도체 중심으로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주요 업계는 중국 반도체의 빠른 성장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중국 반도체의 약진으로 범용(레거시) 반도체는 성장이 더뎌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상황이다.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저가 전략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에 영향력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중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의 D램 시장 점유율은 2024년 3분기 6.0%에서 2025년 10.1%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중국 기업들의 생산 능력과 가격 경쟁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저가 공세는 스마트폰과 PC 같은 범용 IT 기기에 사용되는 반도체 시장에서 기존 주요 기업들에 큰 압박을 가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경기 둔화와 IT 기기 수요 감소가 겹치며 범용 반도체 시장은 정체기에 접어들었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는 분석이다.
중국발 ‘반값 메모리’ 공습은 삼성전자의 실적에도 즉각 타격을 입혔다. 삼성전자가 올해 1월 초 발표한 2024년 4분기 잠정 실적은 영업이익이 6조원대로 시장 기대치를 크게 밑돌았다. 삼성전자의 핵심 수익원인 반도체 사업이 부진한 데 따른 결과다. 삼성전자 반도세 사업이 주력으로 삼는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급락하면서 수익성이 크게 악화됐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D램 가격은 전 분기 대비 20% 이상 하락했으며, 레거시 제품군에서는 중국 업체들의 물량 공세로 가격 경쟁이 한층 심화됐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 기업들이 저가 전략으로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며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고 생산 효율성을 개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고부가 시장에서도 중국 반도체의 반격이 예사롭지 않다. 중국은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를 극복하기 위해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지난해 DDR5 양산에 성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DDR5는 최대 유효 속도가 6400MHz에 달해 DDR4의 기본 사양보다 두 배 가까이 빠른 성능을 구현한다. 업계에선 이번 성과를 토대로 중국이 DDR5 기술에서 한국과의 격차를 약 3년 정도로 좁히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HBM 분야에서도 중국 반도체 업계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대만 IT 전문 매체인 디지타임스에 따르면, 지난해 창신메모리(CXMT)는 2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2) 생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전했다.
창신메모리의 HBM 수율과 생산량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초 예상보다 2년가량 개발이 앞당겨졌다는 사실에 업계는 크게 긴장하고 있다. 이 같은 속도는 중국이 고성능 반도체 기술에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신호라는 점이다.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중화권 반도체 기업들의 빠른 성장이 두드러진다. 중국에는 한국보다 수배 이상의 시스템 반도체 팹리스 기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정부가 막대한 R&D 지원금을 퍼붓고 있다.
중국의 공격적인 시장 공략에 대응하기 위해 삼성전자는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리며 기술 초격차 전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의 고부가가치화를 통해 수익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AI와 같은 신성장 산업에 필요한 고성능 제품 생산으로 경쟁력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범용 반도체 시장에서의 경쟁력 약화는 여전히 고민거리다. IT기기 수요 둔화로 범용 제품 소비가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중국 기업들의 저가 공세는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기존 주요 기업들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에서는 “중국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치킨 게임이 본격화되며 글로벌 시장에서 양극화가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며 “기술력과 효율성을 모두 강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전자는 생성형 인공지능(AI) 시장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 규모를 현재보다 2배 이상 늘릴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이 같은 내용을 언급한 바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AI 시장의 핵심 고객인 엔비디아에 5세대 HBM3E 12단 제품을 빠른 시일 내에 공급하기위해 생산과 품질 관리를 대폭 강화하고 있다. HBM3E는 기존 HBM3 대비 성능이 크게 향상된 제품으로, 데이터 처리 속도를 극대화하면서도 에너지 효율성을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고부가가치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기업용 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eSSD) 제품군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해 업계 최초로 1Tb 용량의 9세대 QLC 낸드 양산에 성공한 회사는 이를 기반으로 AI와 데이터센터 시장 수요를 적극 공략할 전망이다.
파운드리사업부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사업부장 교체를 단행하며 심기일전 중이다. 2나노 공정 수율의 획기적인 개선과 ‘성숙 공정 사업 확대’에 집중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삼성전자는 이를 통해 고객 맞춤형 서비스와 차세대 공정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 TSMC와의 격차를 줄이고 시장 점유율 확대를 노린다는 전략이다. 시스템 LSI 사업부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 유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HBM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중심으로 올해에도 성장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된다. HBM3와 HBM3E 등 차세대 메모리 제품은 AI와 데이터센터 시장의 수요 증가에 힘입어 SK하이닉스의 주요 성장 동력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지난해 HBM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330% 이상 증가하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데 이어, 올해도 지속적인 생산 확대와 기술 고도화를 통해 시장 점유율을 강화할 방침이다.
업계 관계자는 “고부가가치 제품에 대한 수요가 앞으로도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그러나 이러한 수요를 안정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글로벌 공급망의 안정성을 강화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반도체 업계는 2025년을 기술 혁신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보고있다. AI 기술의 비약적 발전이 반도체 산업 전반에 걸쳐 영향을 확대하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게 단순한 기술 우위를 넘어서는 전략적 시장 접근이 필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판도가 빠르게 재편되는 가운데, 한국 기업들이 이러한 변화 속에서 어떤 해법으로 새로운 기회를 모색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박소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