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명동 인근 한국 전통 예술품이 빼곡히 차 있는 사무실. 이곳은 겉보기엔 낡고 평범하지만, 한국 공예계를 반세기 넘게 이끌어 온 중심이기도 하다. 바로 이칠용 한국공예예술가협회장의 사무실이다. 올해로 80세를 맞은 그는 여전히 하루 수십 통의 전화를 받으며 전국 장인들과 소통하고, 정책 제안을 위한 회의 자료를 작성한다.
“사람들은 공예를 유물처럼 생각해요. 박물관에나 있는 거라고. 하지만 공예는 살아 있는 삶의 기술입니다. 숨쉬는 예술이죠.”
이칠용 회장의 삶은 곧 한국 공예의 흥망과 맥을 같이 한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일푼으로 상경했다. 신문배달과 빵공장에서 일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던 그는 스물셋에 자개장을 만드는 공장을 세워 8명의 직원을 두고 전국으로 물건을 공급했다.
그 시절, 나전칠기 장롱은 단순한 가구가 아니었다.
“당시 장롱 한 세트는 대기업 직원 월급 몇배가 넘었어요. 지금 돈으로 수천만원이죠. 여자 혼수로 자개장이 있으면 동네에서 ‘잘 간다’는 소리를 들었던 시기였죠.”
그는 단순한 사업가로 머무르지 않았다. 수익의 일부를 지역 장인 교육과 공예인 조직에 써 가며, “잘 되는 사람이 주변을 일으켜야 한다”는 철학으로 공예 생태계를 스스로 만들었다. 결국 그는 협회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공예가들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왔다.
“지금의 공예 정책은 공예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무원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 회장의 말은 직설적이다. 그는 현재의 무형문화재 제도와 문화재 행정이 장인을 배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기술과 역량으로 평가해야 할 장인을, 서류와 인맥으로 줄 세워요. 지정된 사람만이 혜택을 누리고, 그 외엔 하청으로 전락해요. 이게 장인의 삶일 수는 없잖아요.”
실제로 나전칠기 장인 수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수천 명에 달했다. 하지만 지금 전국에 남은 장인은 10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연탄가게보다 나전칠기 공장이 많던 시대가 있었어요. 지금은요? 한 지역에 장인이 한 명도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는 방짜유기 같은 단체 작업 종목이 ‘개인 종목’으로 지정되는 문제도 언급했다.
“유기는 혼자서 못 만들어요. 최소 7~8명이 한 팀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제도는 ‘개인이 최고 기능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니, 작업을 숨겨야 해요. 결국 서로를 견제하게 되고, 기술은 공유되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전통공예를 보존하기 위한 공간도 문제다.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공예 판매점이나 전시장, 해외 전시회 등은 장인의 손에서 멀어져 있다.
“지금 인사동이나 공항 면세점에 있는 공예 매장들, 겉보기에 그럴듯하지만 실제 판매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있음직한’ 전시장이죠. 실질적인 매출은 커녕, 작가에게 돌아가는 이익도 거의 없어요.”
그는 ‘장인 없는 박람회’ ‘작가 빠진 전시회’가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셀 수 없다고 했다.
“전시 제목은 화려해요. ‘전통의 미래’ ‘대한민국 명장전’ 같은. 그런데 막상 가보면 정작 그 작품을 만든 장인은 초청도 안 받고, 전시관 벽에 ‘기획자’ 이름이 더 크게 써 있죠.”
그는 공예가 박물관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말한다.
“공예는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야 해요. 만지고 써보고, 깨져보고 다시 만들고. 그런 현장이 없는 박물관은 단지 장례식장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칠용 회장은 결코 비관론자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공예의 현대화 가능성을 믿는다.
“공예는 원래 산업이었어요. 돈을 버는 일이었죠. 다시 그렇게 만들면 됩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전통공예의 현대화를 주장해왔다. 옻칠을 응용한 가구, 나전칠기를 접목한 인테리어와 자동차 마감재, 고급 호텔의 조명과 액세서리까지 그는 끊임없이 ‘기술의 확장성’을 제시해왔다.
“옻칠은 항균·방충 기능이 뛰어나요. 고급차 내부에 쓰면 쾌적하고 피로도 덜해요. 독일 차 브랜드에서 이미 관심을 갖고 도입 중입니다. 우리가 그 기술을 갖고 있는데 왜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아야 합니까?”
이 회장은 직접 세계로 나갔다.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 독일, 일본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장인들과 함께 해외 전통공예 탐방을 기획했다.
“단 한 번만 해외를 경험해도, 장인들의 시야가 바뀝니다. 보는 눈이 바뀌면 만드는 손이 달라지고, 그러면 작품이 바뀌어요.”
그는 명확히 말한다. “공예계는 지원보다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일회성 전시나 포상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 유통, 교육, 브랜드, 연구가 함께 가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는 장인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 설립과 장기적인 예산 지원, 공예박물관의 신설을 제안하고 있다.
“박물관은 단지 전시가 아니라, 연구와 체험을 넘어 판매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옻칠을 직접해보고, 자개를 붙여보는 공간이 있어야 하죠. 공예가 삶과 닿아있다는 걸 느껴야 합니다.”
또한 유통 구조도 재정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장인이 만든 물건은 백화점에서 팔 수 있어야 해요. 전통이라고 ‘아름다운 가게’에만 둘 게 아니라. 명품으로 승부할 수 있어야죠.”
이칠용 회장은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장을 뛴다. “매일 나와 전화하고, 기획안 만들고, 사람 만나고. 지치지 않냐고요? 아니요. 내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해요.”
그는 ‘공예가 죽어간다’는 말을 듣는 것이 가장 괴롭다고 했다. 오늘도 그는 작업실이 사라진 지방 장인의 전화를 받고, 곤란한 사정에 처한 공예인에게 필요한 서류를 대신 준비해준다. 그의 책상 위에는 여전히 초안을 기다리는 정책 제안서와 전시 기획안이 쌓여 있다.
마지막 질문. 왜 이 일을 멈추지 않으시나요? 이칠용 회장은 잠시 생각한 뒤 이렇게 말했다.
“다 사라지기 전에, 누군가는 기록해야 하니까요. 누군가는 기억하게 해야 하니까요. 나라도 해야죠. 이게 내 몫이니까.”
[박지훈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