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여사 `아내의 역할`에 대한 해석 [노원명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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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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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6.19 09:57:51
수정 : 2022.06.19 09:58:16
김건희 여사는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12월26일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허위 이력 의혹에 대해 대국민 사과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했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는 경우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습니다." 지금 일부 국민들은 왜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며 성을 내고 있다.
아내의 역할은 무엇인가. 아내는 법적 지위이지만 이 나라 어느 법도 그 역할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2022년을 살아가는 남편 중에 아내의 역할을 '밥하고 살림하고 애나 개 키우고···'로 정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줄로 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김건희 여사가 말한 '아내의 역할'을 그렇게 이해했던 모양이다. 상식이 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김건희 여사가 대통령 취임식에서 대통령 옆에 앉는것,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만나 인사하는 것은 아내의 역할인가 아닌가. 이순자 권양숙 김윤옥 등 전직 영부인들을 만나는 것은 어떤가. 여당 중진의원 부인들과 오찬을 하는 것은?
외교행사 등 공식 의전에서 대통령 옆 자리를 지키는 것을 나무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홀아비 대통령을 뽑은 것이 아니다. 전직 영부인을 찾아간 것을 놓고는 말이 나왔다. 봉하마을에 개인 측근을 대동한 것이 표면상 문제가 됐지만 '어라, 이제 막 나가네'하고 쌍심지를 돋운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에 중진의원 부인 오찬에서 '언니, 사모님'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는 기사가 나오자 '그럼 그렇지. 부통령이네, 부통령'하는 야유가 터져나왔다.
그게 가능하다면 김건희 여사는 공식 행사, 그것도 필수적인 행사만 최소로 소화해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는게 가장 좋을 것같다. 외국 사례를 보면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 다니엘 미테랑은 대통령 관저 엘리제궁에 머무르지 않고 귀빈 접견 등 영부인으로서 최소한의 역할만 수행했다. 다만 2차대전때 레지스탕스로 싸운 그녀는 남편보다 열성적인 '사회 운동가'였다. 조용한 내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본업을 위해 엘리제궁에 머무르지 않았던 것이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인 질 바이든도 본업인 교수직을 병행하느라 평균적 미국 퍼스트 레이디보다 활동 반경이 좁다.
김건희 여사에게 이들처럼 하라고 하면 그다지 현실적인 조언이 못된다. 김 여사는 본업이 사업가다. 남편을 대통령으로 둔 사람이 무슨 사업을 한다고 치자. 그게 무슨 사업이 됐든 '본업 수행'으로 이해해줄 국민들이 얼마나 되겠나. 그 사업에 연관된 모든 단체와 개인이 매일같이 언론에 소환될 것이다. 어느 기업이 후원을 했고 그 기업은 무슨 민원이 있고, 대통령과 어떻게 연결이 되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조용히 아내의 역할을 수행해 달라." 다시 말하지만 어떻게 해야 아내의 역할인가. 조만간 옮겨갈 한남동 관저에서 대통령 식사 챙기고 강아지 돌보고 그렇게 말인가. 그런데 궁금하다. 댁의 아내들은 그렇게 사는가.
이 문제에 있어 한국인들은 좀 더 현실적이 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그 아내에게까지 대통령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내에게 요구하지 못하는 것을 대통령이라고 해서 요구할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바라는 온갖 비현실적인 기대와 마찬가지로 되면 좋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누구도 자신이 아닌 주변 사람의 직위로 인해 자기 인생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을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원칙은 그렇다. 그런데 대통령의 아내는 방해를 받는다. 그게 싫었던 다니엘 미테랑과 질 바이든은 다른 코스를 택했지만 대부분은 그럴 여건이 안됐다. 대신 그들은 영부인이라는 역할 수행을 통해 보람과 보상을 얻는다.
지금까지 한국 대통령 역사에서 영부인 역할에 대해 큰 논란이 없었던 것은 원래 가정주부였던 사람이 대통령실 안주인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영부인이 된다 해서 그들의 커리어가 단절될 일이 없었고 자기 성격과 능력에 맞는 역할을 찾아 수행하면서 보람을 찾았다. 그들이 전직 영부인들을 만난다고 해서, 중진 의원 부인들을 초대한다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성을 배려하는건 남성보다 여성이 더 잘하는 일이고 일반 가정의 아내들도 그런 일들을 한다.
과거 영부인들이라면 통상적 내조로 취급됐을 활동이 김건희 여사에 이르러선 '아내의 역할'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언론은 기를 쓰고 김여사 관련 기사를 찾아내려 하고 사람들은 '봐라봐라, 내가 나댈거라고 그러지 않았냐'고 무릎을 친다. 이제 오십문턱에 들어선 여성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고 5년 인생을 공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잔인한 일이다. 대통령 부부의 갈등을 유발하는 일이다. 대통령의 퇴근후가 피곤하면 국정에 영향을 미친다.
김건희 여사가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가급적이면 더 잘할수 있도록 공식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동선을 공개하는 편이 '막후 실세'처럼 거론되는 것을 막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대신 김여사는 대통령 부인으로서의 분수와 품위를 지켜야 한다. 팬클럽같은 것을 두어서도 안되고, 비공식 측근을 두어서도 안된다. 그것이 김 여사가 지난해 한 '아내의 역할' 약속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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