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네 야콥센, 한스 베그네르, 핀 율, 포울 헤닝센, 베르너 팬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가구에 정통한 이들에겐 이미 친숙한 워너비 브랜드이기도 한데, 모두 덴마크 출신의 유명 가구 디자이너들이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거닐다 보면 이들의 작품을 쉽게 마주치게 된다. 일례로 래디슨블루로열호텔 로비엔 아르네 야콥센이 만든 에그 체어가, 디자인 뮤지엄엔 한스 베그네르와 포울 키에르홀름의 오리지널 조명으로 꾸민 카페가 자리했다. 그런데 과연 코펜하겐에서 마주할 수 있는 디자인 작품이 가구뿐일까. 덴마크를 대표하는 디자인 수제품 중 가장 유명한 브랜드는 248년 전 설립된 덴마크 왕실 도자기 ‘로얄코펜하겐’이다.
로얄코펜하겐의 역사는 1775년 줄리안 마리 여왕의 후원으로 설립된 ‘덴마크 왕립 자기 공장’에서 시작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왕실의 가문이 바뀌던 여타 유럽 국가들과 달리 덴마크 왕가는 1000년 넘게 혈통이 이어지고 있다. 로얄코펜하겐이 248년의 세월을 견디며 세계 최고의 도자기 브랜드로 명맥을 잇게 된 건 이러한 왕실의 든든한 후원이 큰 축이 됐다. 브랜드의 로고에도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 로고 속 왕관이 왕실과의 관계를 나타낸다면 왕관 아래 3줄의 물결무늬는 덴마크를 둘러싸고 있는 3개의 해협(외레순, 대벨트, 소벨트)을 상징한다. 물결 아래 ‘PURVEYOR TO HER MAJESTY THE QUEEN OF DENMARK’란 문구는 덴마크 여왕 폐하를 위한 납품업체란 뜻이다.
로얄코펜하겐은 18세기에 초벌과 재벌 과정의 고온을 견디는 코발트블루 안료를 개발한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청아한 푸른색을 ‘로열블루’라고 이름 붙였다. 이 색상은 1775년에 완성된 첫 디너웨어 컬렉션 ‘블루 플레인’에 적용되며 브랜드를 상징하게 된다. 이후 백색의 자기에 푸른색 그림이 그려진 한 점의 도자기는 덴마크를 상징하는 디자인이자 문화유산이 됐다.
로얄코펜하겐의 모든 제품은 지금도 직접 손으로 만들고 붓질한다. 몰딩부터 페인팅, 굽기, 유약 처리 등 모든 과정에 30여 명의 장인이 솜씨를 더하고 마지막으로 단 1명이 핸드페인팅 전 과정을 책임진다.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제작 방식이다. 특히 핸드페인팅은 명품의 가치를 더하는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예를 들어 블루 플레인 접시를 완성하기 위해 762번의 붓질이 필요하고, 블루 하프 레이스 접시는 1197번 붓질해야만 제품 뒷면에 로고를 남길 수 있다.
믹스앤드매치 방식도 중요한 디자인 가치 중 하나다. 수십 년 혹은 100년 이상의 시차를 두고 출시된 제품이 함께 식탁에 올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런 이유로 할머니에서 엄마, 엄마에서 딸로 대를 이어 가보로 전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제품 중 가장 최고급 라인은 ‘플로라 다니카’다. 덴마크 왕실의 보물이라 불리는 자기 컬렉션이다. ‘덴마크의 꽃’이란 뜻으로 크리스티안 7세가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보낼 선물로 주문하며 탄생했다. 지금도 덴마크 왕실에서 사용 중이다.
로얄코펜하겐은 매년 덴마크의 문화와 역사를 담은 ‘컬렉터블’ 시리즈에 새로운 색을 입혀 신제품을 선보인다. 올해는 코랄과 블랙 색상을 새롭게 공개했다. 코랄 컬렉션은 인글레이즈(in-glaze) 기법으로 제작됐다. 유약을 바르고 재벌구이를 마친 매끈하고 하얀 도자기 위에 장인이 직접 패턴을 그려 넣으며 다시 한번 낮은 온도에서 구워내 코랄 색상을 유약 안에 안착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88년 출시한 ‘블루 하프 레이스’와 1978년 출시한 ‘프린세스’를 재해석해 ‘코랄 하프 레이스’ ‘코랄 레이스’ 등 2가지 컬렉션을 완성했다.
블랙 색상은 초벌구이한 도자기에 손으로 그림을 그려 넣고, 유약 바르기와 재벌구이 과정을 거친 후 언더글레이즈(underglaze) 기법을 통해 제작됐다. 새로운 블랙은 ‘블랙 하프 레이스’와 ‘블랙 레이스’ 컬렉션으로 완성됐다. 로얄코펜하겐은 이 외에도 크리스마스 한정판인 ‘스타 플루티드’와 매해 한정 수량만 생산하는 ‘컬렉터블’ 시리즈의 플레이트와 피겨린, 종 등을 선보이고 있다.
현재 로얄코펜하겐은 전 세계 30여 개국에 진출했다. 그 중 3번째로 큰 시장인 한국은 1994년 한국로얄코펜하겐을 설립하며 진출했다. 전국에 총 25개 매장을 운영 중인 한국로얄코펜하겐은 성장률만 놓고 보면 전 세계 1위를 기록 중이다. 덕분에 한국 고객만을 위한 새로운 제품도 매년 출시된다. 최근엔 최상위 컬렉션인 ‘블루 풀 레이스’에서 한식기 ‘찬기 2종’을 선보이기도 했다. 특히 웨딩 시즌 매출이 높은데 한국로얄코펜하겐 측은 “올 상반기 ‘로얄 웨딩 에디션’의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약 30%나 성장했다”고 밝혔다.
덴마크의 사모펀드 악셀(Axcel)이 소유권을 갖고 있던 로얄코펜하겐은 지난 2013년 핀란드의 피스카스(Fiskars) 그룹에 매각됐다. 피스카스그룹은 375년의 역사를 가진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제철 사업으로 시작해 리빙 브랜드로 변신을 거듭하며 역사를 이어왔다. 한때 핀란드의 국민 기업이라 불리던 노키아가 금융 위기 여파로 사그라들 때도 피스카스그룹은 건재했다. 인수합병(M&A)을 통해 생존 전략의 돌파구를 찾은 피스카스그룹은 2007년 유리 공예품 브랜드 이딸라, 2013년엔 로얄코펜하겐을 인수했다. 2015년엔 영국·아일랜드의 리빙 그룹 WWRD(웨지우드, 워터포드, 로얄덜튼, 로얄알버트, 로가스카)를 사들이며 글로벌 소비재 그룹으로의 면모를 과시했다. 현재 한국로얄코펜하겐은 피스카스그룹이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매출이나 손익 등을 공개하지 않는 탓에 최근 실적을 가늠할 순 없지만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개된 2020년 재무제표를 살펴보면 2019년 매출액은 약 116억6000만원, 2020년 매출액은 141억9000만원을 기록했다.
안재형 기자 · 사진 한국로얄코펜하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