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준비로 1분이 아쉬운 아침…’ 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나 씻고 먹고 챙겨 입는 따위의 허례(虛禮)는 아마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유물일 뿐. 눈곱이 눈을 가리거나 말거나 수염이 덥수룩하거나 말거나 양치질을 했거나 말거나 가상세계에 접속하는 안경만 쓰면 현재의 나보다 한결 젊고 피부 탱탱한 써로게이트가 나를 대신해 일하고 운전하고 취미를 즐긴다. 자신의 콤플렉스는 뒤로 감춘 채 장점만을 내세운 써로게이트는 인류 역사상 최고 발명품이다….
브루스 윌리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2009년 작 <써로게이트(Surrogates)>의 설정이다. 영화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가상세계 ‘써로게이트’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인류를 그리고 있다. 9년 후인 2018년 할리우드의 손꼽히는 명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2045년을 배경으로 가상현실 세계 ‘오아시스(OASIS)’를 창조했다. 이곳에선 누구든 원하는 캐릭터로 어디든 갈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다. 상상하는 모든 게 가능한 셈이다. 가난하건 부자건 인류의 대부분은 하루를 살기 위해 오아시스에 접속한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2021년. 올해 가장 주목받는 키워드 중 하나는 ‘메타버스(Metaverse)’다. 가상, 초월을 뜻하는 메타(Meta)와 우주, 세계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다. 그러니까 브루스 윌리스가 활동하던 ‘써로게이트’와 스티븐 스필버그가 창조한 ‘오아시스’의 현실판 쯤 되는 셈이다.
“앞으로의 미래 20년은 SF(공상과학)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인터넷의 뒤를 잇는 가상현실 공간인 ‘메타버스’ 시대가 오고 있다.”
비주얼 컴퓨팅 기술의 세계적인 선도 기업 엔비디아의 창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이 지난해 10월 자사 ‘GTC(GPU 기술 콘퍼런스)’에서 강조한 말이다. 그는 “미래의 메타버스는 현실과 아주 비슷할 것이고, SF소설 <스노 크래시>처럼 인간 아바타와 AI(인공지능)가 그 안에서 함께 지낼 것”이라고 예견했다.
<스노 크래시>는 1992년 미국 작가 닐 스티븐슨이 발표한 SF소설이다. 이 책에서 메타버스는 가상의 신체인 아바타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가상의 세계란 뜻으로 처음 등장했다. 약 30여 년이 지난 현재의 메타버스는 게임, 엔터테인먼트, 기업 간 업무 환경에서 가상공간에 일상을 복제하는 행위를 총칭해 사용되고 있다. 쉽게 말해 온라인 속 3차원 가상세계에서 아바타로 구현된 개개인이 서로 소통하고 놀고 업무까지 진행하는플랫폼이 바로 메타버스다.
▶Z세대는 이미 메타버스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 이들은 디지털기기와 문화에 익숙한 Z세대다. 미국 게임사 에픽게임즈는 자사가 개발해 서비스 중인 ‘포트나이트(Fortnite)’의 3D 소셜 공간 ‘파티로얄’에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파티로얄은 이용자들이 게임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다른 이용자들과 콘서트, 영화 등을 즐길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이다. 에픽게임즈는 지난해 이 공간에서 트래비스 스콧, DJ 마시멜로 등 유명 래퍼의 콘서트를 진행했다. 지난해 4월 포트나이트 콘서트장에서 열린 트래비스 스콧의 공연에는 1230만 명이 동시 접속했다. 가수나 관객 모두 아바타들이 춤추며 즐긴 이 가상공연의 매출은 약 2000만달러. 콘서트 이후 트래비스 스콧의 음원 이용률이 약 25%나 상승했다. 방탄소년단(BTS)도 지난해 신곡 ‘다이너마이트’의 안무를 이곳에서 전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지금도 ‘파티로얄 무비 나이트’에선 새로운 영화의 예고편이 상영되는가 하면 다양한 이벤트로 세계 각국의 아바타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16세 미만 중 55%가 가입한 것으로 알려진 모바일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Roblox)’에선 월 1억 명의 사용자가 자신의 아바타를 이용해 원하는 공간을 만든다. 게임에서만 통용되는 가상화폐로 거래도 가능하다.
코로나19로 외부 출입이 통제된 청소년들이 이곳에서 소통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고 있는 중이다. 로블록스의 기업 가치는 현재 약 40억달러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메타버스가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IT업계 관계자는 “팬데믹 이후 언택트 문화가 대중화되며 아바타로 소통하는 게 별 반향 없이 받아들여졌고, 이를 구현하는 기술도 빠르게 발전했다”며 “디지털 게임에 익숙한 세대들이 먼저 환호했고 점차 세대를 넓혀가고 있는 형국”이라고 설명했다. 시장조사 업체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는 VR기기를 포함한 메타버스 시장이 올해부터 급격히 성장해 2025년 관련 하드웨어 기기 매출이 2800억달러(약 304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구찌x테니스 클래시
▶콧대 높은 명품기업도 가상세계로
이러한 분위기에 명품업계와 게임업계의 협업도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다. 코로나19로 컬렉션 론칭과 패션쇼 등 오프라인 행사 개최가 어려워진 명품업계가 게임 속 가상공간을 이용해 미래의 소비자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 ‘발렌시아가’는 직접 ‘애프터월드: 더 에이지 오브 투모로’라는 게임을 만들어 2021년 가을·겨울 컬렉션을 공개했다. 오직 새로운 컬렉션 공개를 위해 게임이란 플랫폼을 이용한 것이다. 루이비통, 구찌, 발렌티노, 마크제이콥스 등 이름만으로도 내로라하는 명품 브랜드들도 유명 게임들과 공동으로 다양한 마케팅을 진행했다.
‘루이비통’은 2019년 말 라이엇게임즈의 유명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와 협업한 ‘루이비통×리그 오브 레전드’ 캡슐 컬렉션을 공개했다. LOL 로고와 챔피언을 모티브로 한 제품으로 출시 1시간 만에 전 제품이 판매될 만큼 인기를 누렸다.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구찌’는 지난해 6월 글로벌 모바일 게임 ‘테니스 클래시’와 협업을 진행했다. 테니스 클래시는 2019년 구글플레이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게임 5’에 선정된 스포츠게임이다. 구찌는 남자 트레이닝 슈트, 여성용 로고 티셔츠 등 4가지 게임 캐릭터용 패션 아이템을 출시했다. 게이머들은 게임머니로 이를 구매해 게임 속 자신의 아바타에 입힐 수 있다. 구찌는 자사 홈페이지로 연결되는 링크를 만들어 게임 아이템이 아니라 실제 해당 옷도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이용자들이 가상공간에서 다른 이들과 어울리며 마을을 만들어가는 닌텐도의 ‘모여봐요 동물의 숲’도 명품 브랜드의 타깃 플랫폼 중 하나였다. 발렌티노와 마크제이콥스가 2020년 봄·여름 컬렉션을 이 공간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모여봐요 동물의 숲’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대선 전 이곳에 섬을 만들고 선거유세를 한 것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한 명품 브랜드 관계자는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들이 가상공간에 투자하는 건 미래를 염두에 둔 장기적인 포석”이라며 “Z세대 등 미래 고객이 모이는 곳에서 직접 브랜드 이미지를 친숙하고 확고히 굳히기 위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루이비통 x 리그 오브 레전드 세나 캡슐 컬렉션
▶국내 시장도 후끈, 제페토에 10대 열광
이러한 분위기는 국내라고 다르지 않다. 올해 국내 IT업계의 화두도 단연 메타버스다. 다양한 콘텐츠 산업의 성장이 자연스럽게 메타버스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국내 시장에선 네이버가 자회사 스노우를 통해 개발한 증강현실(AR) 기반 3차원(3D) 아바타 앱 ‘제페토’가 대표적이다. 2018년 8월에 첫선을 보인 제페토는 지난해 3월 누적 가입자 1억 명을 돌파한 이후 지난해 10월 1억900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10대 이용자 비중이 80%, 이 중 해외 이용자 비중이 90%에 달한다.
제휴를 통해 K팝 그룹 ‘블랙핑크’ ‘레드벨벳’의 아바타·가상 아이템·맵이 출시되거나, 방탄소년단(BTS)이 제페토 아바타로 춤추는 영상을 만들어 SNS에 공유하는 등 한류 콘텐츠 생산 도구로도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 관련 업계에선 ‘나와 닮은 아바타’ 제공과 10대들의 놀이문화를 파악해 자발적인 참여로 이끈 점을 제페토의 성공 요인으로 꼽는다.
제페토는 네이버의 AR기술을 활용해 사진으로 자신과 닮은 아바타를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1000개가 넘은 표정까지 지원해 실제 느끼는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기존 아바타 서비스와 달리 공간적 제약을 초월할 수 있는 가상공간에 10대들의 놀이문화를 접목시켰다. 제페토 이용자가 ‘월드’라는 기능을 활용하면 가상공간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소통하고 함께 놀 수 있다. 이용자들은 제페토가 제공하는 다양한 맵에서 새로운 놀이와 역할극을 직접 만들어낸다. 월드는 현재 제페토 내에서 가장 이용이 활발한 기능 중 하나다.
제페토가 YG엔터테인먼트와 제휴해 선보인 블랙핑크 아바타와 의상 아이템. 제페토는 블랙핑크 과거 뮤직비디오를 기반으로 전체 멤버의 아바타, 의상 등을 제작했다.
제페토는 지난해 5월 네이버 자회사 스노우에서 독립 법인으로 분사한 후 가상세계 구축과 함께 콘텐츠 차별화를 위한 협업을 진행 중이다. 우선 인기 아이돌의 IP를 확보하기 위해 빅히트엔터테인먼트와 YG엔터테인먼트로부터 총 12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CJ ENM의 1인 창작자 지원 사업 다이아티비와는 협업을 통해 가상 크리에이터를 육성하기로 했다.
SK텔레콤이 공개한 서비스 ‘버추얼 밋업(Virtual Meetup)’도 메타버스가 배경이다. 이용자가 각자 아바타를 만들어 가상공간에 최대 100명까지 동시 접속해 콘퍼런스와 공연 등 다양한 모임을 할 수 있다. 기존 ‘점프 VR앱’에서 누구나 버추얼 밋업 모임을 주관하고 지인을 초대할 수 있다. SK텔레콤은 실제 모임 같은 현실감을 위해 가상 콘퍼런스 공간의 대형 스크린, 무대, 객석 등을 3D로 세밀하게 구현했다. 이용자는 개인 취향에 따라 얼굴, 머리모양, 복장 등을 선택해 나만의 아바타를 만들고 가상 모임에 참여해 다른 아바타들과 대화할 수 있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가 운영하고 있는 커뮤니티 플랫폼 ‘위버스’도 증강현실 기술을 적용해 메타버스로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