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1300㎞에 달하는 알래스카 LNG 개발 사업이 외교·통상 의제의 중심에 올랐다. 미국이 한국 등 주요 동맹국에 제시한 협상카드 중 하나로, 알래스카 천연가스 수송관 프로젝트가 급부상하면서 국내 정부와 에너지 업계의 셈법도 복잡해지고 있다.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는 미국 알래스카 주정부 산하 공기업인 알래스카가스개발공사(AGDC)가 주관하는 대형 자원 인프라 개발 사업이다. 총 사업비는 약 440억달러(한화 약 63조원)에 이르며, 알래스카 북부 유전지대에서 천연가스를 채굴해 이를 남쪽의 액화설비로 이송하고, 다시 액화처리 후 아시아 시장에 수출하는 구조다. 사업에는 총 1300㎞에 달하는 천연가스 수송관 건설, 가스 정제시설(GTP), 액화 플랜트, 항만 등 핵심 인프라가 포함된다.
AGDC는 이 사업의 지분 투자자들에게 향후 LNG 시설 운영권과 판매권을 제공하겠다는 입장이다. 일본, 대만과 같은 아시아 국가들이 투자 및 구매의향서를 교환하면서, 한국도 실질적 참여를 압박받는 모양새다.
문제는 해당 사업이 기술적 난이도와 경제성의 문제로 40년 가까이 본격화되지 못했던 장기 구상 프로젝트라는 점이다. 사업비만 우리나라 한 해 예산의 10분의 1에 달하는 데다 혹한의 환경에서 공사 기간이 늘어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환경보호 이슈까지 얽혀 있는 점을 고려하면 사업비는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과거 2010년대 초반부터 엑손모빌, BP 등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이 참여했지만 수익성과 불확실성 등을 이유로 사업을 철수하기도 했다. 여기에 글로벌 탄소중립 목표와 지정학적 변수로 인해 2030년 이후의 LNG 수급 상황을 예측하기 어려운 점도 리스크 요인으로 작용한다. 결국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돼 예정대로 2029∼2030년께 LNG 생산에 돌입하더라도 막대한 투입자금을 감안했을 때 합리적인 가격에 수급이 안된다면 무용지물이란 뜻이다.
이런 상황은 2025년 들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LNG 수출을 국가 전략으로 채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초 의회 연설에서 직접 알래스카 LNG 사업을 언급하며 “한국과 일본이 수조 달러 규모의 투자자로 참여할 수 있다”고 직접 한국을 거론했다. 미국 재무장관과 무역대표부(USTR)도 이 사업이 “관세 협상에서의 전략적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이후 알래스카 주지사는 직접 한국을 찾아 구애에 나섰다. 마이크 던리비 미국 알래스카 주지사가 지난 3월 말 방한해 정부 관계자와 기업 관계자 등과 면담을 진행하고 알래스카 LNG 사업에 대한 적극 홍보에 나섰다. 던리비 주지사의 방한을 계기로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에 한국의 참여를 요구하는 미국 측의 메시지는 한층 분명해졌다는 분석이다. 그는 방한 기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특별한 관계를 내세우면서 LNG 프로젝트와 한미 간 관세 협상을 연계하는 발언도 내놨다. 단순한 주(州) 정부 차원의 ‘세일즈 투어’를 넘어, 트럼프 대통령의 사실상 경제·에너지 외교 특사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 셈이다.
다만 그의 첫 방한에서는 구체적인 성과가 도출되진 않았다. 던리비 주지사는 서울을 떠나기 전까지 투자의향서(LOI) 체결 등 실질적 협력 약속을 기대한다고 밝혔지만, 한국 정부나 에너지·철강 관련 기업 가운데 이번 방한이 진전된 계약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한국으로선 대미 관세 협상의 레버리지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알래스카 LNG 사업에 대한 미국 측의 투자·구매 요구를 무시하기 힘든 측면이 있지만 이와 동시에 현재 추정치만 440억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선뜻 발을 담그기에는 부담이 적지 않다.
알래스카산 LNG 구입이 정부의 대미 무역수지 균형을 위한 핵심 방안으로는 꼽히고 있지만 개발까지 병행하는 것은 무리란 지적이다.
글로벌 LNG 수입국 3위인 한국은 최근 카타르·오만 등과의 장기계약이 종료되면서 도입선을 재조정하고 있다. 전체 물량의 약 80%를 책임지는 한국가스공사 역시 신규 공급처 확보에 나섰다. 가격 등 사업성만 확보된다면 알래스카산 가스 구매도 불가능한 선택지는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던리비 주지사도 방한 기간 가스공사 최고경영진과 면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한국이 알래스카 LNG 사업에 안 들어가자니 미국으로부터 관세 협상 등에서 피해를 볼까 걱정이 크고 들어가자니 비유하자면 물이 허리까지 잠길 수 있는 상황”이라며 “정부와 에너지 업계의 전략적인 판단이 굉장히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상황은 4월 본격화된 상호관세 이슈와 맞물려 재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 조치로 미국은 한국, 일본, 인도, 호주, 영국 등 5개국을 대상으로 25%의 관세를 예고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90일 유예기간을 부여하며 국가별로 협상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도 조선산업 협력, 방위비 분담 문제 등과 함께 알래스카 LNG 개발 참여를 ‘관세 인하용 카드’로 고려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가스공사는 알래스카 측과 실무진 화상회의를 진행하며 접촉을 시작했다. 아직은 통성명 수준의 논의에 그치고 있으나,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4월 중 미국을 방문하며 공식 협상에 나서고 있다. 정부는 이 사업이 한미 통상·안보 연계 전략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포스코, SK 등 대기업들도 내부 검토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 참여 의사를 표명한 기업은 없는 상황이다. 국내 에너지 업계는 “사업성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국내 기업이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설비 건설부터 직접 투자해 지분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경우 막대한 초기 자본과 공사 실패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실제로 2013년 유사한 사업이 LNG 가격 하락으로 철회된 전례도 있다.
알래스카산 LNG를 장기 구매 계약하는 간접 참여 방식도 검토되고 있다. 대만중유공사(CPC)는 이미 AGDC와 LOI를 체결했다. 한국 역시 수입선 다변화 측면에서 미국산 LNG 비중을 늘리는 데 관심을 갖고 있지만, 미국이 단순 구매 계약만으로 관세 인하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문제는 한국가스공사의 재정 구조다. 지난해 기준 가스공사의 미수금은 14조원, 부채는 47조원에 달하며 부채비율은 433%에 달한다. 사실상 정부 지원 없이 단독 투자 결정이 어려운 상황이다. 민간 기업 참여 없이 가스공사만 투자에 나설 경우, 국민 세금이 대규모로 투입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산업부 관계자도 “현재로서는 민간기업이 구체적인 투자 의향을 보인 적은 없다”며 “정부와 공기업이 먼저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 역시 알래스카 사업의 난도가 역대급이라고 경고한다. 영구동토층 위에 1300㎞ 가스관을 매설해야 하는 난공사로 기후 조건도 사업 진행에 큰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실제 첫 생산까지 최소 10년은 걸릴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또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에서만 사업이 추진될지, 차기 정부에서도 계속될지 불확실성이 크다. 업계는 국내 대선 후 통상 정책 변화와 미 정권 교체 가능성까지 고려한 ‘보수적 전략’을 택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백성우 덕성여대 교수는 “이 사업은 시간도 길고 변수도 많아 성급한 참여는 위험하다”며 “일본의 투자 여부를 지켜보고, 그에 따른 자료 공유를 요청하는 방식이 안전하다”고 조언했다.
이렇다보니 실제 국내 에너지 공기업 및 민간 기업 대부분은 알래스카 LNG 개발 사업에 대한 구체적 검토를 진행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다. 보통 대규모 해외 가스전 개발은 한국가스공사가 꾸리는 컨소시엄에 채굴, 가스관 건설, 매입·유통 등 밸류 체인별 민간 기업들이 힘을 보태는 식으로 이뤄진다.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기 위해선 가스공사 차원의 검토는 물론, 민간기업들은 사업이 수지타산이 맞나 따져봐야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런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가스전 채굴부터 약 1,300㎞에 달하는 가스관을 놓는 전무후무한 개발 사업인 데다 관련 정보가 전혀 없는 만큼 이에 대해서 함부로 언급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미국 측이 한국 정부에 바라는 역할도 정해지지 않아 기업들은 수익성을 살필 상황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만들어져 있다. 한 에너지 기업 관계자는 “관세 협상을 위해 민간 기업도 나서야 한다는 생각은 알지만 그렇다고 바로 지금 무작정 뛰어들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한 걱정과 미국 내 사업 연속성에 물음표를 다는 이들도 많다. 또 다른 에너지 기업 관계자는 “새 정권이 들어서는 교체기인 가운데 정권 교체 이후에도 알래스카 LNG 사업을 관세 협상의 지렛대로 삼을지 사업 투자 방식은 바뀌지 않을지 등 불확실성이 크다”며 “사업 기간이 상당히 길텐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임기 이후에도 사업이 계속된다는 보장도 없어 선뜻 투자하기에 꺼려진다”고 했다.
다만 알래스카 LNG 사업은 분명 우리나라의 관세 협상에서 전략적 카드가 될 수 있는 만큼 무조건적인 밀어내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사업성, 투자 타당성, 에너지 수급의 실익 등을 따져 국익 차원에서 종합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조선 협력, 방위비 분담 등 다른 의제와의 연계도 검토하며, 알래스카 프로젝트는 관망세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안덕근 장관이 주도하는 협상단은 미국의 구체적 요구 사항을 파악하는 데 집중할 방침이다. 국내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정부는 이제 ‘기회’와 ‘부담’ 사이에서 명확한 셈법을 만들어야 할 시점에 서 있다”며 “알래스카 개발 사업 참여 여부에 따라 에너지 업계에 미칠 파장을 잘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