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2인자들은 대부분 말단사원에서 시작해 부회장이란 자리까지 올랐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한 회사에서만 20~30년 가까이 근무해야 한다. 하지만 40대에 이미 부회장에 오른 이들도 있다. 바로 경영권 승계를 앞둔 오너 2·3세들이다.
빠르게 성장한 오너직계 대부분은 경영에 참여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는 게 보통이다. 섣불리 전면에 나섰다가 맡은 사업이 삐꺽거리기라도 하면 후계 승계과정에서 잡음이 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뛰어난 경영능력을 바탕으로 전문경영인 출신 부회장 이상의 실적을 내는 실력형들도 있다. 이들은 오너라는 지위를 활용해 과감한 결단과 선택을 한다. 그 결과 남들보다 한발 앞서 뛰어난 실적을 거두며 당당히 경영능력을 인정받는다. 경영의 달인이란 평가를 받는 2인자들보다 한 수 위에 실적을 보여준 실력파 오너 2·3세들을 살펴봤다.
기아차 중흥 이끈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현대차 정의선 부회장은 재계가 인정하는 노력파다. 부드럽고 소탈한 성격으로 겸손하고 예의바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경영인으로서 정 부회장은 할아버지인 고(故) 정주영 창업주나 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의 추진력에 밀리지 않는다. 일단 현안이 있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는 게 내부의 평가다.
정 부회장의 경영능력은 기아차의 중흥에서 빛을 발한다. 2003년 기아차 부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적자였던 기아차를 업계 1위인 현대차의 강력한 경쟁자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세계 3대 디자이너로 손꼽히던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하며 ‘디자인 경영’을 선언했고, 그 결과 기아차의 중흥을 이끈 K-시리즈가 탄생했다.
기아차를 되살린 정 부회장은 2010년 현대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브랜드 경영’에 나서며 현대차의 글로벌 성장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정 부회장이 브랜드 경영을 시작한 지 단 2년 만에 현대차는 미국시장에서 고객 충성도가 가장 높은 브랜드로 성장하며 글로벌 자동차업계의 신성이 됐다.
태양광으로 한화의 미래 밝히는 김동관 실장
2001년 대한생명을 인수하며 재계 서열 10위권에 당당히 입성한 한화그룹은 2008년 태양광을 신성장동력 사업으로 선정한 뒤 불황과 공급과잉으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에 김승연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실장이 전면에 나섰다.
김 실장은 그룹 내 여러 계열사에서 맡아왔던 태양광 사업을 일원화하고, M&A를 통해 태양광 관련 산업의 수직일관화에도 성공했다. 특히 태양광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해외에서 잇따른 수주에 성공하며 태양광 사업을 한화그룹의 차세대 먹거리로 안착시켰다.
재계가 그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적자사업을 흑자로 전환시켰기 때문만은 아니다. 경쟁사들의 사업포기에도 뚝심 있게 사업을 추진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키웠고, 그 결과 한화그룹을 태양광 부문에서 글로벌 수위를 다투는 리더로 변모시켰기 때문이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한화그룹을 위기로 몰아갔던 태양광을 새로운 캐시카우로 변모시킨 것은 온전히 김동관 실장의 몫”이라며 “김승연 회장처럼 오너 일가 특유의 뚝심 있는 결단력이 빛을 발한 사례”라고 말했다.
생활 속 유통명가로 도약,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도 재계가 주목하는 오너 3세다. 결정권자가 아닌 조언자의 역할에 머물며 전문경영인들로부터 조용하게 경영수업을 받던 그가 재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8년부터다. 신세계그룹 내 할인마트 부문인 이마트의 경영을 맡은 것이다. 이후 정 부회장은 공격적인 출점 전략으로 이마트를 국내 최대 규모의 대형할인점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2011년에는 ㈜신세계에서 이마트 부문을 분사, 독립했다. 출점경쟁을 통해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왔던 정 부회장은 편의점 브랜드 ‘위드미’ 인수 이후 잠잠했으나 올해 7월 위드미 브랜드 출시와 함께 다시 한 번 공격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정 부회장은 위드미 출범과 함께 올해 안에 1000개의 매장을 오픈하는 것은 물론 3년 내에 2500여 개로 확장하겠다는 전략을 공개했다. 이를 위해 정 부회장은 편의점 수수료를 10%대로 낮춰 기존 편의점 점주들의 마음을 움직이겠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발생할 손실에 대해서는 감수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도 내비쳤다.
재계에서는 정 부회장의 이 같은 움직임이 대해 기대 반 우려 반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마트 출점경쟁에서 정 부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을 경험한 재계는 정 부회장이 이번에도 잘해낼 것으로 보고 있다.
효성의 변신 주도하는 글로벌 리더 조현준 사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장남 조현준 사장은 효성그룹의 변신과 성장을 주도해 재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미국 예일대에서 수학한 그는 효성 입사 전 미쓰비시상사와 모건 스탠리에서 근무하는 글로벌 감각을 갖춘 인재로 꼽힌다.
조 사장은 특히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그룹의 핵심 주력 4개사를 ㈜효성으로 합병시키면서 PG/PU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혁신적인 구조조정 프로젝트를 주도해 눈길을 끌었다. 이와 함께 연봉제 중심의 인사평가 시스템, 포트폴리오 전략 수립, ERP와 같은 최신 경영시스템을 주도적으로 도입했다. 위기경영 능력도 탁월하다. 적자위기에 빠진 계열사에 구원투수로 등장한 후 단시간 내에 흑자전환을 이뤄내며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실제 조 사장은 2007년 66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던 섬유부문 PG장을 맡은 지 단 1년만에 130억원의 흑자로 전환시키는 등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효성의 섬유부문은 지난해 2679억원의 흑자를 올리는 등 해마다 큰 폭의 수익을 내고 있다.
특히 세계시장에서 2위였던 효성의 스판덱스 부문을 혁신해 2012년부터 세계시장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효성의 섬유사업부문은 ㈜효성의 전체 매출 중 15.3%를 차지하지만, 지난 7년간 총 영업이익인 3조3000억원 중 1조원을 달성하며 그룹 전체 수익의 31%를 담당하고 있다. 이뿐 아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는 무역PG를 맡아 흑자행진을 기록했으며, 지난해 공석이었던 중공업PG에 구원투수로 나서 2012년 1700억원 규모의 적자를 기록했던 중공업부문을 흑자로 전환시켰다.
조 사장의 경영능력이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단순한 영업개선뿐 아니라 긴 안목을 통해 계열사의 미래먹거리를 찾아낸다는 데 있다. 효성 섬유부문에서 스판덱스를 키워냈듯이 중공업PG에서는 에너지 저장 시스템인 ESS 사업과 에너지 관련 핵심기업으로서의 기술력을 키워냈다.
최근에는 글로벌 인맥을 활용해 IT 및 LED 사업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보통신PG 소속 계열사인 효성ITX를 통해 사물인터넷 분야에도 뛰어들었으며, 클라우드솔루션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오랜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친분을 쌓은 글로벌 인맥 역시 그의 강점이다. 영어, 일어, 이탈리아어 등 4개 국어에 능통한 조 사장은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은 물론, 허용수 GS 전무, 박진원 두산 사장, 김동관 한화큐셀 실장 등과 막역한 관계로 알려졌으며, 중국 썬미디어그룹의 브루노 우 대표와 미국 MS 이사회 존 톰슨 의장과도 친분을 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