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8일 덴마크중앙은행은 예금금리를 마이너스 0.1%에서 플러스 0.05%로 0.15%포인트 올렸다. 유럽 재정위기가 한창 진행될 당시 경제를 살리려고 은행 예금에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역으로 수수료를 물리는 초강수까지 두었던 덴마크중앙은행이 2년여 만에 금리정상화를 위한 행보를 내디딘 것이다.
이에 앞서 뉴질랜드중앙은행은 같은 달 24일 2.75%였던 기준금리를 3%로 0.25%포인트 인상했다. 이 은행은 지난 3월 12일에도 선진국 중앙은행 가운데 처음으로 금융위기 때 내렸던 기준금리를 0.25% 올린 바 있다. 뉴질랜드에선 최근 중국 등으로 유제품 수출이 급증하는 경기회복 조짐이 뚜렷해지면서 인플레이션 가능성까지 거론돼 연속해서 금리를 올렸다는 게 시장의 분석이다.
유럽 금융위기의 진앙이었던 곳에서도 금리가 꿈틀대고 있다.
한때 국가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아일랜드는 최근 경기회복 기대감이 퍼지면서 국채금리가 뚝 떨어져 영국 국채금리보다도 낮은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11년만 해도 아일랜드 국채는 영국 국채에 비해 11% 이상 높은 금리를 줘도 투자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요즘 그리스도 경기가 급격히 살아나면서 신용평가사들이 신용등급을 상향조정하는 등 오랜만에 훈풍이 불고 있다. S&P는 지난
5월 14일 알파뱅크 등 그리스 4대은행의 신용등급을 CCC+로 한 등급 상향조정하면서 ‘긍정적’ 등급전망까지 달았다.
그리스에는 최근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4월까지 전년 동기에 비해 30% 이상 증가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관광수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5%가 넘는 나라이다보니 관광객 유입은 경기가 회복되고 재정불안이 완화될 수 있다는 청신호로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ECB가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면서 최근 대규모 자금이 유입돼 이 나라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확신시키고 있다.
이처럼 일부 국가에서 나타나고 있는 금리인상 바람이나 경기회복 추세는 전 세계로 확산될 것인가. 이것이 최근 세계경제가 안고 있는 리스크를 해소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까. 한국은 또 여기서 어떤 입지를 취해야 할까.
금리인상 카드 만지작거리는 한국
지난 4월 28일 오후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은행회관으로 들어섰다. 자리를 메우고 있던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이날 이 총재는 한국경제학회와 한국금융연구원이 이곳에서 연 세미나에서 기조연설을 하러 왔다.
한은 총재가 외부 세미나에서 기조연설을 하는 것도 이례적이었지만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와 한국 통화정책의 방향’이라고 내걸린 이날 세미나의 주제는 더 두드러졌다.
금리인상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를 논의하겠다는 세미나에 한은 총재가 나왔으니 금리인상 카드를 들고 타이밍을 재고 있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실제 윤창현 한국금융연구원장은 환영사를 통해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로 내년이나 내후년에 금리인상이 이뤄진다고 할 때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국내외 금리격차를 얼마로 가져가야 할지, 또 금리를 올리면 올리는 대로, 내리면 내리는 대로 이 부분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가야 할지 지혜가 필요한 상황이다”며 한은이 굉장히 어려운 정책선택을 해야 한다며 금리인상 시점을 고려할 때가 됐다고 밝혔다.
이주열 총재는 이에 대해 “오늘 세미나의 주제는 세계경제가 금융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변곡점에 서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하다”는 인사말로 한은 역시 금리인상 카드를 생각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이 총재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를 견인하던 신흥국의 성장 모멘텀이 눈에 띄게 둔화된 반면에 선진국의 경기 회복세는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선진국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지만 미 연준이 통화정책을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비롯될 수 있는 신흥국의 금융 불안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는 말로 금리인상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외자유출 가능성도 경계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지난 5월 9일 금통위 이후 기자회견에서도 “지금 금리 수준이 경기회복을 뒷받침 못할 수준은 아니다”는 말로 인하보다는 인상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 이 총재는 5월 16일 시중은행장들과의 금융협의회에서도 여전히 ‘금리인상’을 고려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선진국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는 견해가 한 달 전과 마찬가지로 유지되고 있다”고 강조한 대목이다.
다만 그는 지난해 5월 이후 다른 신흥국과 차별성을 보이며 강한 복원력을 나타낸 한국 경제에 대해 “이러한 차별성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쉽게 자신할 수만은 없다”는 말로 내재된 문제 때문에 금리인상 카드를 꺼내지 못하고 있음을 밝혔다.
한은 총재 두 가지 불균형 지적
이 총재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문제는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불균형(imbalance)이다. 그는 먼저 수출-내수 간 불균형을 지적했다. 오랜 기간 부문 간 균형성장의 필요성이 인식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수출의 GDP 대비 비중 및 성장기여도는 최근 더욱 높아졌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지나친 수출의존도는 대외 취약성과 경기변동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성장과 고용 간 선순환 고리를 약화시킴으로써 중장기적 성장동력을 제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특히 수출-내수 간 불균형 고리가 가계부채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고 내다봤다. 서비스업을 비롯한 내수부문에 자원을 더 배분해 소비와 투자를 활성화해야 하는데 과다한 가계부채가 소비여력을 제약하고 있어 부채 수준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이 총재의 지적은 그동안 수출만을 강조한 고환율 제도의 문제점을 겨냥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그가 금융협의회에서 “환율 변동성 확대에 따른 과도한 쏠림현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시장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히면서도 무역흑자를 염두에 둔 환율개입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언급한 대목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일정 수준의 원화강세가 내수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실물과 금융부문 간의 불균형도 지적했다. “실물부문에 비해 우리나라 금융부문은 글로벌 경쟁력 등의 면에서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으며,특히 혁신기업의 출현 및 성장을 지원할 수 있는 자본시장의 발달이 미흡한 상황이다.”
한은으로선 저금리 기조가 지나치게 오래 지속될 경우 보험을 비롯한 채권투자기관의 거시안전성을 위협한다는 점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총재는 금융연구원 세미나에서도 “중앙은행이 물가안정뿐 아니라 금융안정도 함께 적극적으로 도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며 “금리정책보다 역사가 긴 신용정책을 새롭게 적용하는 것도 모두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말로 이를 뒷받침했다.
확대해서 해석하면 금리를 올려 금융건전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예대마진을 확보해주되 충분한 유동성 공급으로 경제에 활력을 넣는 전향적 카드를 고려하는 것일 수도 있다.
멍석 깔기 나선 학계
어쨌든 한국경제학회나 금융연구원은 4월 세미나에서 한은의 금리인상을 위한 ‘멍석’을 깔았다. 기왕 바람을 잡을 바에야 확실히 일으켜 국민들이 대비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점에선 긍정적 움직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윤창현 금융연구원장은 “연준의 통화정책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당히 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1990년대 연준의 금리인상으로 중남미 국가들에서 외국인 투자자금이 급격히 유출되면서 외환위기가 발생한 점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예상된다면 외국인 자금을 잡아두기 위한 선제적 금리인상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날 핵심 주제를 맡은 오정근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GDP갭률이 1%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의 6개월 전에 금리를 인상하는 게 바람직하다. 내년 중반 이후 이 수치가 1%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는 점에서 금년 말이나 내년 초 금리인상을 고려해야 한다.” 고 밝혔다.
그러나 김창배 한국경제연구원 신임연구위원은 “현재로선 인상 시기가 관심인 것 같다”면서 “(아직은) 과열이 아니다. 2015년 이후 나아진다고 하지만 누구도 전망하지 못한다. 한은이 섣불리 인상했다가 또 내리면 정책 신뢰성이 떨어진다”며 금리인상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물가나 성장률 자산시장 버블 등 세 측면에서 볼 때 올해 금리를 인상하기는 쉽지 않다. … 동결도 유효한 전략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주열 총재가 직면한 환경은 재닛 옐런 FRB 의장이 맞은 환경보다 훨씬 열악하다”는 말로 한은이 금리를 내리기는 쉬워도 올리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한국은행이 금리정상화를 무리 없이 성공시키려면 적극적으로 사전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위원은 특히 “중앙은행의 기본적 임무는 물가안정이지만 물가안정만 내세운 것은 1970년대 정책의 유산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물가만 안정됐다고 한은이 할 일을 다한 것은 아니다”며 한은이 경제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인철 성균관대 교수(한국경제학회 명예회장)는 “우리나라도 이제 통화정책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재정 부담이 커져서 한은이 통화정책으로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기준금리만 갖고는 안 된다. … 통화정책은 추석이나 설날에 자금 푸는 것만 생각하는데 지금도 자금을 풀어야 할 상황이다”며 한은에 적극적 대응을 주문했다.
이지순 서울대 교수도 “전통적 통화정책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로 한은의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요구했다.
고용을 비롯한 거시경제 안정성 유지까지 한은이 관리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엇갈리는 브릭스 자금사정
브릭스를 비롯한 신흥국 자금사정은 엇갈리고 있다. 그동안 러시아와 중국이 강세를 보였고 인도와 브라질이 위축됐으나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가 제재를 받고 있고 중국이 그림자금융 문제로 고전하는 가운데 인도와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으로 자금이 유입될 기미가 나타나고 있다. 이들 3국의 CDS 프리미엄은 올해 큰 폭으로 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