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중견 기업들이 망설이는 사이 대기업들의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이다. 실제로 고객 응대와 서비스 분야에선 지난해 전년 대비 매출과 순이익에서 각각 5%, 18.9% 성장하며 성과(ROI)를 내기도 했다. IT와 통신 등 서비스업이 주력 사업인 국내 대기업들의 AI 관련 실질적인 성과를 보여주는 사례다.
LG그룹은 LG AI연구원에서 개발한 초거대 AI ‘엑사원(EXAONE)’을 중심으로 ‘전문가 AI’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이는 LG그룹사 내 핵심 비즈니스를 고도화하기 위해 각 산업군별 AI 전문성을 강화하는 형태다. LG유플러스는 2024년 12월, AI데이터센터, 기업용 AI플랫폼인 ‘익시 엔터프라이즈’, AI 응용 서비스 등을 아우르는 B2B 성장전략을 밝힌 바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적 셀 설계 추천 AI모델’을 도입해 배터리셀 설계 기간을 2주에서 단 하루로 단축했다. AI 기반 건전성 예측 및 관리 솔루션으로 작업 효율성도 향상시켰다. 센서와 데이터를 활용해 기계·설비 등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어 95%의 정확도로 교체 시점을 예측해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LG전자는 최근 오픈AI의 기업용 ‘챗GPT 엔터프라이즈’를 기반으로 R&D 업무에 최적화된 추론형 AI의 효용성 검증을 마친 후 정식으로 도입했다. LG전자 측은 “새롭게 도입된 추론형 AI는 R&D에 맞게 통제된 변수를 기반으로 수식을 통해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며 “다양한 변수를 입력해 여러 실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결과를 빠르게 도출해 제품 구조를 설계하고, 품질 문제 발생 시 이를 해결하거나 본격적인 제품 개발 전 트렌드 분석, 상품 기획을 위한 실험을 일일이 할 필요가 없어 더 자유롭고 빠르게 제품이나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고 전했다. 예를 들어 기존 AI가 “물이 언제 끓지?”라는 질문에 “섭씨 100°”라고 간략하게 답하는 방식이라면, 추론형 AI는 “실험실에서 대기압이 일정하고 기온의 변화가 없다고 가정할 때 PVC 플라스틱 용기 100㎖의 물은 얼마 만에 끓을 수 있지?” 등 제한 변수를 함께 질문해도 이에 맞춰 답을 제공한다. LG전자 측은 “실제로 ‘냉장고 높이 조정판’ 개발에도 추론형 AI가 활용됐다”며 “냉장고 높이 조정판은 바닥과 냉장고 하단 사이에 설치해 냉장고 높이를 조절하는 부품으로 하중을 견디는 강도가 가장 중요한데, 추론형 AI로 다양한 조건의 부하에 견딜 수 있는지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개선점까지 발굴해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LG전자는 사내 AI 서비스 ‘엘지니(LGenie)’와 HS사업본부의 생성형 AI 기반 데이터 분석 시스템인 ‘찾다(CHATDA·CHAT based Data Analytics)’ 시스템도 사용하고 있다. 찾다는 씽큐앱과 제품으로 수집한 사용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AI와 대화하며 정보를 찾는 시스템이다.
삼성전자는 자체 생성형 AI 모델 ‘삼성 가우스’를 중심으로 하이브리드 AI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올 2월 이재용 회장의 지시로 삼성 가우스와 함께 외부 오픈소스 AI를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삼성전자 측은 “자체 생성형 AI 모델의 장점은 필요한 목적과 응용 분야에 맞춰 최고의 성능을 내도록 맞춤형 개발에 용이하다는 것”이라며 “삼성 가우스는 이런 맞춤형 개발의 장점을 살려 직원들의 다양한 업무에서 활용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 중 ‘코드아이(code.i)’는 사내 S/W 개발자를 지원하는 삼성 가우스 모델의 코딩 어시스턴트 서비스다. 최근에는 ‘삼성 가우스2’ 모델로 업그레이드돼 DX 부문의 사업부와 일부 해외 연구소에서 활용되고 있다. 2024년 12월에 서비스를 시작한 코드아이는 현재 시작 시점 대비 월별 사용량이 약 4배 이상 증가했고, 삼성전자 DX 부문 전체 S/W 개발자의 약 60%가 사용하고 있다. 삼성 가우스의 대화형 AI 서비스인 ‘삼성 가우스 포탈(Samsung Gauss Portal)’은 문서 요약, 번역, 메일 작성 등 DX 부문 직원들의 사무 업무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해외법인으로 서비스가 확대됐다. 삼성전자는 올 8월부터 삼성 가우스를 콜센터에 적용해 상담 내용을 자동 분류하고 요약하는 등 상담원 업무 보조에 활용하고 있다. 삼성전자 측은 “향후 ‘삼성 가우스2’를 통해 코드아이 서비스의 지속적인 성능 개선과 삼성 가우스 포탈의 자연어 질의응답 성능 향상, 표와 차트의 이해, 이미지 생성 등 멀티모달 기능을 지원해 사내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앞서 언급한 네이버는 하이퍼클로바X를 기반으로 한국어 특화 AI 생태계 확장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6월, 추론 능력을 강화한 ‘하이퍼클로바X 씽크’를 공개하며 GPT-4.1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능을 입증했다. 한국어 벤치마크에서는 오픈 AI를 앞서는 정확도를 보였다. 특히 네이버는 소형 모델 ‘하이퍼클로바X 시드’를 오픈소스로 공개해 출시 한 달 만에 30만회 다운로드를 돌파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입증했다. 기존 100B급 규모의 모델을 3분의 1로 경량화하면서도 성능은 향상시켜, 운영 비용을 50% 이상 절감하는 성과를 거뒀다.
SK텔레콤은 AI 인프라와 서비스 등 양축에서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올 3분기 기준 AI 사업 매출이 전년 대비 35.7% 성장했다. AI 데이터센터 사업은 분기당 1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며 성장 사업으로 자리잡았다. 지난 6월 아마존과 공동으로 약 7조원을 투자해 울산에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계약도 체결했다. B2C 서비스 ‘에이닷’은 가입자 1000만 명을 돌파했고, 독자적인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을 위한 GPU 클러스터 ‘해인’을 구축해 소버린 AI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제조 현장의 AI 혁신에 집중하고 있다. 올해 준공 2주년을 맞은 현대차그룹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HMGICS)에는 셀 생산 시스템과 디지털 트윈을 결합한 메타 팩토리를 구축했다. 연구소와 공장의 경계를 허무는 미래형 제조 플랫폼이다. 인공지능(AI)과 로보틱스, 목적기반차(PBV)에 이르기까지 차세대 기술을 실제 생산 과정에서 시험한다. 올 1월 엔비디아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해 블랙웰 GPU 5만 개를 확보했고, 이를 통해 자율주행 시스템과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을 가속화한다는 계획이다. 이미 자회사인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개발한 4족보행 로봇 ‘스팟’을 완성차 공장에 투입했고,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의 시험 투입도 준비 중이다. 최근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개최된 ‘E-Forest Tech day’에선 총 200여 건에 달하는 신기술이 공개됐다. 이포레스트는 인간 친화적인 스마트 기술을 적용한 현대차와 기아의 스마트팩토리 브랜드다. 이 자리에서 가장 주목받은 기술은 스팟 기반의 PHM(Prognostics and Health Management·고장 예측 및 관리) 시스템이다. 생산 시설의 문제를 미리 파악해 가동 중단과 비가동 손실을 줄일 수 있는 핵심 기술인데, 기존에는 측정 범위가 진동이나 전류 등으로 제한적이었다. 이번에 개발된 기술은 4족 보행 로봇 스팟이 공장을 자율적으로 순찰하며 설비의 진동, 온도, 가스 누출 등을 실시간 감지한다. 핵심은 스팟 위에 탑재된 모듈. 스팟에 탑재된 카메라, 열화상 카메라, 마이크, 가스 감지 센서 모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확보한다. 예컨대 열화상 카메라를 이용해 구동 모터의 온도를 측정하고 임계치가 넘으면 과열 데이터와 이미지를 PHM 화면으로 즉시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들 로봇은 AI 학습을 통해 작업 중 발생하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갖췄다.
LG전자는 AI·디지털트윈 기술로 ‘지능형 공정 시스템’ 구축했다. 생활가전 생산 기지인 경남 창원의 ‘LG스마트파크’는 국내 가전업계 중 처음으로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한 ‘등대공장’이다. 밤하늘에 등대가 불을 비춰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첨단 기술을 도입해 세계 제조업의 미래를 이끄는 공장을 말한다. 세계경제포럼이 2018년부터 전 세계 공장들을 심사해 매년 두 차례씩 선발하는데, 국내에선 포스코(2019년)와 LS일렉트릭(2021년)이 선정된 바 있다. 냉장고를 생산하는 LG스마트파크 1층 로비에 들어서면 오른쪽 벽면에 모니터 사이니지 18장으로 만든 대형 화면들이 보인다. 사이니지에선 ‘지능형 공정 시스템’이 보여주는 버추얼 팩토리를 통해 냉장고 생산, 부품 이동과 재고 상황 등 실제 공장의 가동 상황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능형 공정 시스템은 AI, 빅데이터와 시뮬레이션 기술인 디지털트윈을 결합해 LG전자가 자체 개발했다. 30초마다 공장 안의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10분 뒤 생산라인을 예측하고 자재를 적시에 공급한다. 또 데이터 딥러닝으로 제품의 불량 가능성이나 생산라인의 설비 고장 등을 사전에 감지해 알려준다. 생산라인에 설치된 지능형 무인창고는 실시간으로 재고를 파악하고 부족하면 스스로 공급을 요청한다. 지상에는 5G 전용망 기반 물류 로봇(Automated Guided Vehicles)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냉장고 컴프레서나 냉각기 등이 담긴 최대 600㎏의 적재함을 최적의 경로로 자동 운반한다. LG전자 측은 “LG스마트파크는 AI 로봇을 투입해 생산 효율은 높아지고 작업 환경은 더 안전해졌다”며 “특히 로봇이 위험하고 까다로운 작업을 도맡으면서 작업자는 생산 라인이나 로봇 작동 상황 등을 모니터링하고 컨트롤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실제로 20kg에 달하는 냉장고 문을 들어 본체에 조립하는 라인에도 볼트 작업을 정확하게 진행할 수 있는 3D 비전 인식 기술을 갖춘 로봇이 투입됐다. 모듈러 디자인 설비와 AI 기술로 고객의 개인화 니즈에 맞춘 혼류 생산도 가능하다. 도어의 색상과 크기가 다른 냉장고나 국내와 미국, 유럽에서 각각 판매할 냉장고 모델 약 60종을 한 라인에서 동시에 생산할 수 있다. LG전자 측은 “스마트파크 구축을 통해 생산성은 기존 대비 20% 향상됐고 불량률은 30% 줄었다”며 “새로운 냉장고 모델 생산을 위해 라인을 개발하고 구축하는 기간도 30%나 짧아졌다”고 전했다.
철강업계의 AI 활용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동국제강은 목표 온도 예측 모델과 부하 예측 모델을 결합해 가열로의 최적 온도를 자동으로 제어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동시에 금속을 눌러 펴는 압연 공정에서 각 롤러에 흐르는 전류 데이터를 분석해 공정 상황에 맞는 최적 압력과 속도를 AI가 실시간으로 계산하고 자동으로 조절하는 기술을 구현했다. 과거 가열로 온도 조절이 자동화되지 않아 연료 효율이 낮고, 작업자 숙련도에 따른 품질 저하가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다. 시스템 구축 이후 가열로의 자동 제어 운영률이 50% 이상 향상되고, 연료 효율이 5% 개선되는 성과를 거뒀다. 포스코는 AI 기반 실시간 분석 및 최적화 기술을 도입해 원료 사용량을 60%까지 절감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강된 액체 상태의 철강을 연속적으로 주조해 반제품인 슬래브, 빌렛, 블룸 등의 형태로 만드는 연주 공정에서 연간 6억원의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전력시스템 전문 LS일렉트릭은 AI 외관·소음 검사 시스템을 도입했다. 고해상도 카메라와 이미지 분석 알고리즘을 활용해 제품의 미세한 결함을 자동으로 감지, 불량률을 감소시키고 생산성을 60% 향상시켰다. 이 밖에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활용해 제조공정 데이터와 에너지 소비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최적화하는 방식으로 에너지 소비량을 최대 20% 절감하고, 고객 클레임이 97%나 줄어드는 성과를 거뒀다.
중소·중견 기업들 또한 AI 도입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유산균 제조사 쎌바이오텍은 원료 데이터, 균주 데이터, 배양 공정 조건 데이터, MES 데이터 등을 분석해 배양 공정 조건과 생균 수 간의 상관관계를 파악했다. 이를 토대로 AI 기술을 활용해 최적의 배양 공정 조건 추천 및 원말 생균 수 예측 체계를 구축했다. 그 결과 분석 리드타임을 50% 단축하고, 공정 분석 소요 시간을 30분 감소시켰다. 또한 원말 생균 수 편차가 20%나 감소해 생산성이 향상됐다. 이를 통해 평균 원가 10% 절감과 매출 9% 증대를 달성하는 성과를 거뒀다.
음향기기 제조사 인터엠은 AI 기반 생산 최적화 시스템을 도입해 제조 현장의 효율성을 크게 개선했다. 이를 통해 불량률을 40% 감소시켰고 작업 전환 횟수를 22% 줄였으며, 설비가동률을 8.9% 향상시키는 효과를 거뒀다.
[안재형 기자 · 박수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3호 (2025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