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그룹의 지주회사 웅진홀딩스는 지난해 2600억원대 회사채를 발행했지만 같은해 9월 법정관리를 신청해 논란을 일으켰다
“판 사람은 있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상장기업들의 자금조달원으로 부상한 회사채나 기업어음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다. 막대한 규모의 기업어음을 발행한 뒤, 곧바로 법정관리 신청을 해 일반 투자자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어서다.
지난 7월 1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STX팬오션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지난 6월 중순 이후 한 달 동안 금감원에 접수된 STX팬오션 CP 관련 민원은 120여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액만 따져도 70억원이 넘는다.
이들 민원인들의 원성은 CP를 발행한 STX팬오션이 아닌 유통을 맡은 증권사들과 신용평가사에 집중되고 있다. STX팬오션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후 회사채 가격이 곤두박질쳤는데도 이에 대한 위험 고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지난 2011년 3월에도 발생했다. 중견 건설사인 LIG건설이 242억원 규모의 기업어음을 발행한 후 열흘 만에 곧바로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약 800여명의 일반 투자자들이 손실을 입었다. 이밖에도 대한해운과 웅진그룹 등이 유사한 방법으로 기업어음 및 채권을 발행한 후 곧바로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한 발 늦은 평가와 위험 고지 논란
일반 투자자들은 바로 이 때문에 민원을 제기하고 있다. 법정관리를 앞둔 기업들의 CP와 채권 판매를 중개한 금융사들이 일반 투자자들에게 위험요인에 대해 고지를 제대로 안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금융권과 신용평가사들이 수수료를 벌기 위해 불완전판매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용평가사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기업평가를 제대로 해 올바른 신용정보를 제공해야 함에도 법정관리 직전에야 비로소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하기 때문이다. 실제 웅진홀딩스는 법정관리 직전까지 최고 A- 등급이 부여됐다가 사태가 터진 후에야 D등급으로 강등됐다. LIG건설은 아예 법정관리에 들어간 후에야 신용등급이 내려갔다.
일반 투자자들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금융권과 신용평가사가 법정관리를 택한 기업들의 채권 혹은 기업어음의 손실을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금융권과 신용평가사들은 이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증권사들은 신용평가사가 내놓은 신용등급을 바탕으로 정보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신용평가사는 아예 법정관리를 택한 기업들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독자적인 신용평가 등급 도입해야
더 큰 문제는 같은 문제가 앞으로도 계속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먼저 금융권은 경기침체와 불확실성의 심화로 투자자금이 빠져나가면서 수수료에 대한 매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주식투자 규모나 펀드 가입률이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라 당연히 기업어음 및 채권의 중개판매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게 한 금융관계자의 설명이다.
신용평가사 역시 마찬가지다. 신용평가사들이 주 수입원인 기업평가 수수료를 기업에서 받고 있는 만큼 해당 기업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특히 ‘복수평가제도’를 시행하고 있어 채권발행 기업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게 금융권의 설명이다.
금융당국 역시 이런 문제점을 인지하고 해결책으로 ‘독자신용등급 도입안’을 지난해 발표했다. 기업 자체의 기초 체력을 독립적으로 평가한 신용등급과 모기업 등 외부지원 가능성을 고려한 최종등급을 분리해 발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도입안은 그러나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올해 역시 STX팬오션과 웅진식품처럼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에 금융당국은 주거래은행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주거래기업이 재무 상태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면 곧바로 대출을 회수할 수 있도록 규정을 변경한 것이다. 하지만 불씨는 여전하다. 금융권은 주거래 은행의 관리감독은 기업경영의 또 다른 불안요소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올 4월 워크아웃을 신청한 STX 그룹의 협력업체들을 위해 구제책을 논의 중인 채권단
금융위 저금리 제한, 주관사 책임 강화
논란이 커지자 금융위는 지난 7월 8일 신용평가 제도개선안을 내놨다. 먼저 부도직전 신용등급 공개를 강화해 신용평가사에 대한 평판형성을 유도하겠다는 게 한 방안이다. 직접 통제는 하지 못하고 시장을 통해 평가사를 제재하겠다는 것이어서 효과는 미지수다. 다음으로 발행사가 과도하게 낮은 금리를 고집하지 못하도록 희망금리밴드의 최고 수준을 시장금리보다 높은 수준으로 제한했다. 상승 추세의 금리를 따라가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증권사에 대해서도 월별로 보고를 받는 식으로 과도하게 낮은 금리를 제시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 수요예측에 참여한 뒤 청약은 하지 않는 기관에 대해선 향후 6개월 동안 청약을 하지 못하도록 벌칙을 강화했다.
금융위는 또 채권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채관리회사를 통해 발생사를 통제하는 별도의 제도도 제시했다. 인수증권사가 아닌 제3의 사채관리회사로 하여금 발행사가 준수해야 할 부채비율이나 담보제공금액 제한, 자산처분금액 제한 등의 계약사항을 신고서에 충실히 기재하도록 한다는 것. 또 사채관리회사는 이를 바탕으로 적정성 의견을 달고 손해배상책임까지 명시하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 일부 망나니 같은 회사와 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평가사들 때문에 전체 기업의 채권발행 비용이 상승하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