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더 떨어질 것이다.”
올해 들어 계속되고 있는 엔화 약세로 많은 수출기업들에 비상이 걸렸지만 엔화 약세는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지난 연말만 해도 달러당 80엔대 중반에 머물던 엔/달러 환율은 올해 들어서도 가파른 상승세를 지속해 지난 5월 17일엔 4년 5개월 만에 처음으로 103엔대를 돌파했다.
올해 들어 세계의 투자은행들은 엔/달러 환율을 평균적으로 달러당 104엔 선으로 예상했고 BA메릴린치의 경우 달러당 105엔 선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전망은 그저 전망에 그쳤을 뿐이다. 실제 환율은 이보다 훨씬 가파르게 움직여 최근 글로벌 환율 전문가들은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10엔대를 넘는 것은 물론이고 120엔대에 오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국내에서도 엔/달러 환율이 상당한 정도로 상승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산업실장(상무)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엔화가 달러당 100엔을 넘는 것은 당연했고 언제 가냐가 관심사였는데 100엔을 넘고 나니 이제는 110엔을 넘을 것인가가 관심사다. 그렇다면 과연 엔화 가치가 이 정도로 떨어질 것인가. 과거의 트렌드를 보면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권경혁 써미트투자자문 사장도 “엔화 환율이 최근 달러당 103엔을 뚫고 올라갔는데 오버 슈팅될 가능성이 크다. 달러당 110엔은 물론이고 120엔까지도 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두 사람은 엔화 약세 기간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에 대해선 약간은 다른 입장을 보였다.
권순우 실장은 “과거 엔화의 움직임을 보면 한쪽으로 오랫동안 움직였다. 한 번 움직이면 보통 2~3년은 간다. 그러니 지금 추세가 더 갈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반면에 권경혁 사장은 “엔/달러 환율이 치솟을 것으로 보지만 중요한 것은 오버 슈팅 구간이 길지는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엔화 약세가 일본의 수출기업엔 도움이 되겠지만 이들 수출기업의 상당수가 생산기지를 외국으로 옮겨 효과가 그리 크지도 않다. 오히려 환율이 뛰면 내수 부양을 통한 경제 살리기에 역효과가 생길 것이기에 무작정 엔저 국면을 끌고 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엔저 한국에 타격
어쨌든 엔화가치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자 한국 정부나 경제단체와 수출기업들은 입을 모아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산업통산자원부는 지난 5월 초 4월 수출입동향을 설명하면서 수출이 엔저 영향 등으로 부진했고 특히 일본으로의 수출은 엔저 현상 등으로 인해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다고 했다. 아울러 엔저 등 각종 대외여건을 극복하고 우리 수출이 순항하기 위해서는 범부처 차원의 적극적인 정책적 대응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도 이와 동조해 “최근 급격한 엔저로 기업들의 경영실적 악화가 가시화되고 있어 정부의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전경련은 지난 4월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엔저 영향을 조사해 대다수의 기업들은 이미 적자구조에 직면해 있으며, 원/엔 환율이 10% 하락할 경우 영업이익률은 평균 1.1%p 하락한다고 제시했다. 당시 전경련은 기업의 손익분기점 원/엔 환율을 100엔당 1185.2원으로 현재 수준(1132.5원)은 이보다 52.7원이나 낮다고 주장했다.
김기문 중기중앙회장도 “엔저로 인해 수출 중소기업들은 가격 인상이 불가피해 수출 물량이 감소하거나 환차손을 감수하고 수출을 진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산업별로는 보다 적극적으로 엔저의 영향을 강조하는 곳도 있다.
철강업계는 엔저에 대해 거의 공격적인 수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본 철강업체들이 엔저 바람을 타고 열연코일을 저가로 수출해 국내산 철강재를 시장에서 밀어내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올해 1분기의 경우 일본산 열연강판은 전년 동기 대비 4% 가량 늘어난 78만1194톤이 들어왔는데 평균 수입가는 전년에 비해 13.8%(115달러)나 떨어졌다는 것. 국내 후방산업의 수요가 들어드는 마당에 일본산이 저가에 밀물처럼 들어와 국내 철강업체의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코경영연구소는 특히 일본이 엔저 효과 이후에도 추가로 경쟁력을 확보하려고 최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에 주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베 일본 총리는 지난 3월 15일 “세계경제의 개방화 확산 추세에서 TPP는 일본이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며 TPP 참가를 선언한 바 있는데 일본이 TPP에 참여할 경우 3조2000억엔의 GDP 증가 효과가 예상된다는 게 포스코경영연구소의 분석이다.
‘환율전쟁’ 장기로 보면 달라
국내 재계가 이처럼 엔고에 우려를 표명하자 언론들은 ‘환율전쟁’ 또는 ‘통화전쟁’으로 부풀리고 있다. 또 아베 정부 이후 양적완화를 벌이고 있는 일본뿐 아니라 이보다 앞서 양적완화를 시작한 미국이나 유럽까지 환율전쟁을 벌이는 나라라고 지적하고 있다.
연합뉴스는 지난 5월 13일 “미국 일본 유럽 등 세계 주요국들이 자국 경기부양을 위해 기준금리를 낮추거나 ‘제로금리’를 유지하며 경쟁적으로 양적완화를 추진하자 각국은 환율전쟁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매일경제신문도 같은 날짜 사설을 통해 G7 재무장관 · 중앙은행 회의에서 “글로벌 통화전쟁을 부추기는 ‘엔저’ 공습에 대한 규제책은 내놓지 않았다. … 결국 한국 기업들에 가장 피해를 주고 있는 엔저 공습은 당분간 계속될 상황이다”라며 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통화전쟁에 대응하라고 촉구했다.
조선비즈도 ‘통화전쟁 2.0’이란 시리즈 기사를 통해 통화전쟁의 주범은 미국과 일본이라면서 한국의 자동차나 조선, 철강 등 중화학 공업 부문의 피해가 가장 클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최근 각국의 양적완화 이후 나타나는 일부 국가의 통화 약세를 환율전쟁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게 서구 정책 담당자들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올리 렌 EU 경제·통화 담당 집행위원은 지난 5월 중순 G7 회의와 관련해 미국이나 일본 등 일부국가에 대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은 재정안정을 도모하면서 경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지 환율을 정해진 목표에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엔저를 주요 의제로 삼는 데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지난 4월 워싱턴DC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 중앙은행 회의 역시 “각국 통화정책은 국내 물가 안정을 꾀하고 경기 회복을 견인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엔화가치 하락에 대해 “디플레이션을 타개하고 내수 확대를 유도하기 위한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물론 직접적인 환율전쟁이 없던 것은 아니다.
중국의 경우 이미 오래전부터 환율을 달러화에 연동시키는 방향으로 수출경쟁력을 유지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도 아베 이전에 직접 시장에 개입한 적이 있다. 지난 2010년 중국이 일본 국채를 매수하는 방법으로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자 일본 정부가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엔화를 일시적으로 끌어내린 게 대표적이다.
브라질 정부 역시 미국 등 선진국의 저금리 정책이 자국의 통화가치를 낮추는 방도로 이용돼 브라질을 비롯한 역동적인 신흥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며 시장에 개입했다. 이 때문에 2011년 한때 달러당 1.5헤알까지 강세를 보였던 브라질의 통화가치는 현재 달러당 2헤알 수준으로 완화됐다.
한국 ‘엔고 단맛’에 길들어
이들에 비하면 한국은 엔고를 향유하느라 앞날을 내다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90년대 중반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800원 전후에서 장기간 머물렀다. 당시 원/엔 환율 역시 100엔당 800원 전후에서 유지됐다. 주시할 외국통화가 극히 제한됐던 당시만 해도 달러/엔/원 환율에 대해 국내에선 ‘1 대 8 대 800’이 적정 수준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이후 외환위기를 맞아 한때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2000원대까지 치솟기도 했지만 2000년대 중반에는 한동안 달러당 1000원선 밑에서 머물기도 했다.
원/엔 환율 역시 외환위기 이후 상당기간 100엔당 1000~1100원 사이에서 움직였고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2년여 동안은 800원 전후에서 유지됐다. 당시에 비하면 지금 원/달러 환율이나 원/엔 환율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다. 한국의 경제력이나 외환보유액이 글로벌 금융위기 전보다 엄청나게 성장했는데도 원/달러 환율이나 원/엔 환율은 이전보다 훨씬 높다.
그런데도 정부나 재계가 엔저를 걱정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달러화 대비 엔화 가치는 아베노믹스가 본격화한 지난해 9월 이후 23%나 하락했고 이것이 엄청나게 급격한 변화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장기적인 환율 그래프는 한국의 원화 가치가 아직도 평균 수준 이하에서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상수지나 상품수지 그래프 역시 아직은 금융위기 전보다 좋은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난 3월 말 한국의 경상수지는 49.8억달러 흑자로 14개월 연속 흑자행진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한국은행은 업종별 3월 말 수출에 대해 “정보통신기기나 화공품, 반도체 등의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증가했으나 선박이나 승용차 및 철강제품 등은 감소했다”고 밝혔다. 또 지역별로도 “중국, 동남아 및 중남미에 대한 수출이 증가한 반면 일본, 미국 등은 감소했다”고 분석했다.
아직까지는 총량이 문제가 아니라 부문이 문제라는 것이다.
다수의 한국 전문가들은 ‘엔고에 단련’된 일본 기업들이 ‘엔저 바람을 타고 부상’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를 뒤집으면 한국 기업들은 ‘엔고의 즐거움을 향유’했을 뿐 ‘다가올 엔저 위협’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수출기업·정부 임금 상승 과도해
실제 한국의 주요 기업들은 환율로 번 이익을 ‘실력’으로 번 것인 양 착각해 비용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지난 5월 15일 전년도 순이익의 30%를 조합원과 협력업체 직원들의 성과급으로 지급하라고 요구한 것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이런 모습은 현대차그룹에만 나타난 게 아니다. 노조가 있건 없건 그동안 수출기업의 임직원들은 고환율로 번 이익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급여를 받아 챙겼다. 일부 수출기업에서 거의 연봉 수준의 보너스를 주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다.
이렇게 높아진 임금 수준은 최근 원화가치가 올라가면서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위협하는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중소기업들은 간판 수출기업의 고임금 추세를 따르지 못해 해외로 나가거나 사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엔고 시기를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조조정의 시기로 활용하지 못한 데는 무책임한 정부와 통화당국에도 책임이 있다.
고환율로 국내 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도 물가를 책임져야 할 한국은행은 환율을 내려 물가를 잡는 대신 국제 원자재가 상승은 어쩔 수 없는 외생변수라며 외면했다. 실제 한국은행은 최근 몇 년 간 “원유와 비철금속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올라 수입물가 상승률이 높아졌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런데도 고환율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벤 버냉키 연준 의장보다 훨씬 많은 연봉을 받고 있는 한은 총재를 비롯한 고임금의 한국은행 임직원들에겐 국내 물가 수준이 피부에 와 닿는 이슈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참여정부 이후 임금수준이 급격히 상승한 공무원들 역시 물가에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다. 휘발유나 밀가루 등 수입에 의존하는 주요 원자재 가격이 폭등해 국내 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도 관리들은 환율을 낮춰 물가를 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휘발유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유사 휘발유가 범람하고 3000원 정도하던 자장면 값이 불과 2~3년 만에 거의 배로 뛰는데도 월급이 뛴 그들에겐 남의 나라 일처럼 여겨졌다고나 할까.
물론 공무원 노조는 공무원 급여 수준이 일반 기업에 비해 낮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의 엄청난 경쟁률에서 알 수 있듯이 공무원은 30여 가지 수당에다 근속연수에 따른 임금상승폭이 커 퇴직 무렵엔 일반 회사원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받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무직 공무원들의 재산이 매년 크게 늘어나는 것도 높은 급여가 한 몫을 하고 있다.
최근 공무원 연금이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연금제도 자체의 잘못이라기보다 공무원 급여가 지나치게 뛴 게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고환율은 한국사회에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공무원과 일반시민 사이의 양극화를 초래했다. 많은 중소기업 근로자들이 10년 전보다 월급이 늘었는데도 실제 수중에 남는 돈은 훨씬 줄었다고 불평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