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투자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부지런함이나 경험이 결코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업계의 날고 긴다는 펀드매니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앞으로 뜰 종목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열정과 감(感), 성실성이 제 아무리 빛을 발한다 하더라도 수십 년째 주식 증서를 장롱에 처박아 둔 어느 투자자의 ‘게으름’을 당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례로 20년 이상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한 투자자를 수익률에서 능가할 펀드는 존재하기 어렵다. 주식 세계에서 전문가의 잘 짜인 논리와 빛나는 직관은 때로는 성공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증시가 한 달 이상 긴 조정을 겪으며 이른바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 주도주에 올인 했던 자문형랩과 압축형 펀드의 수익률이 바닥을 기고 있다. 불과 한 달여 전만 해도 ‘차화정’은 한국 증시에서 ‘불패의 투자 방정식’으로 통했다. 모든 유행이 그렇듯이 증시의 유행 또한 덧없고 변덕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펀드매니저도 사람인 이상 유행에 초연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시장의 변덕을 두려워하는 투자자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휩쓸림 없이 사전에 정한 가이드라인을 따라서 투자하는 펀드 가치에 주목한다. 요즘 퀀트 펀드에 투자자들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펀드 매니저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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퀀트 펀드를 간단히 정의하면 종목 선정에 있어 펀드매니저의 주관을 걷어낸 펀드를 말한다. 종목을 골라내는 것은 펀드매니저가 아니라 사전에 설정된 조건식이다. 아주 단순화한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컴퓨터에 매출액 5000억원 이상 기업 중에서 주가수익비율(PER) 10이하, 주가순자산비율(PBR) 1이하 기업으로 조건을 제시하고 이를 충족하는 모든 기업을 무차별적으로 종목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물론 실제 퀀트 펀드의 조건식은 이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 세분화돼 있다.
일반 펀드와 다른 것은 개별 종목에 대한 펀드매니저의 가치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 펀드도 개량적 지표에 의한 종목 선별 기준은 당연히 있다. 다만 정량적 기준 이외에 펀드매니저가 가중치를 두는 ‘정성적’ 평가가 들어가게 된다. 펀드매니저는 투자대상 종목에 대해 이런저런 정보를 듣게 되고 이 정보를 기초로 향후 해당 종목의 주가가 오를지, 내릴지 판단한다. 주가 상승을 확신하는 종목은 비중을 높이고 미심쩍은 종목은 비중을 줄인다.
퀀트 펀드가 주관을 배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몇 명의 펀드매니저가 모든 종목을 일일이 살펴보기에 시장에는 너무 많은 기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려해야 할 경제 변수도 너무 많다. 투자대상이 이처럼 폭넓은 시장에서는 개별 종목 차원의 접근법은 오히려 효율성과 정확성을 저해할 가능성이 높다. 이보다는 사전에 정한 조건에 의해 종목을 선택하는 편이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퀀트 펀드는 직관보다는 확률에 거는 투자 방정식이다. 확률 투자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충분한 투자기간이 전제돼야 한다. 김범희 푸르덴셜자산운용 AI본부장은 이를 동전 던지기에 비유해 설명한다.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올 확률이 50%라고 할 경우 네 번 던져서 두 번 앞면이 나오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던지는 횟수를 늘려 갈수록 앞면이 나올 확률은 50%에 근접하게 된다.”
이를 통계학에서는 ‘대수의 법칙’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퀀트 모델에 의해 운용하는 펀드가 연간 시장대비 초과성과 목표를 6%로 운용한다고 할 경우 4개월간 투자하면 2%의 초과성과를 달성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2년 또는 3년 이상 투자기간을 가져갈 경우 목적에 근접할 확률은 확실히 높아진다.
퀀트 투자의 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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퀀트 투자에도 여러 범주가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인덱스 펀드다. 인덱스 펀드는 벤치마크를 설정한 후 이와 가깝게 업종과 종목 비중을 구성하는 펀드다. 코스피200을 추종하는 인덱스펀드의 투자 포트폴리오는 코스피200 구성종목의 시가총액 비중과 거의 유사하다. 두 번째는 시스템 유형이다. 특정 투자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해진 규칙에 따라 매매하는 유형이다. 두 종목 간 가격비율에 따라 매수와 매도를 동시에 수행하는 페어트레이딩, 헤지 펀드의 투자전략 중 하나인 CTA전략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퀀트 투자라면 ‘액티브퀀트’를 일컫는 것이 보통이다. 액티브퀀트는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지표들을 결합해 계량적 모델을 만들고 이를 통해 종목을 선정하는 투자방식이다. 펀드매니저가 종목을 선정하는 ‘액티브 펀드’의 상대적 의미에서 ‘액티브퀀트’란 말이 나왔다.
액티브퀀트 투자에서 사용되는 지표들은 대부분 전통적 액티브 투자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주가수익비율, 주가순자산비율 등 밸류에이션 지표들과 이익추정치 변화율, 주가추세 지속성 등 모멘텀 지표들이 퀀트 유형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된다. 다만 액티브퀀트 투자에서는 이들 지표를 엄밀한 테스트를 통해 체계적으로 모델화해 일관성 있게 적용한다는 점이 다르다.
퀀트 투자의 장단점
퀀트 펀드의 가장 큰 장점은 시장의 광범위한 종목들을 대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체계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조건식을 입력하고 이를 충족하는 종목을 압축해내는 방식이므로 대상이 아무리 많다 해도 투자종목을 골라내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이에 비해 펀드매니저가 최종 종목 선택권을 갖는 전통적 액티브는 검토 대상이 아무리 많아봐야 수백 개 이상을 넘어가기 어렵다.
또 퀀트는 사전에 펀드의 위험수준에 대한 목표설정이 가능한 반면 일반 펀드는 이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매니저의 주관을 배제하는 퀀트 펀드는 시장상황에 휩쓸리지 않지만 전통 펀드는 시장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물론 전통 액티브 펀드만의 장점도 있다. 개별 종목들에 대한 질적인 분석이 바로 그것이다. 비슷한 매출에 영업이익, PER을 가졌더라도 개별 종목의 주가 전망은 각 회사가 처한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다. 전통 펀드는 해당 기업의 미래 가치까지 고려해 투자를 결정하지만 퀀트 펀드는 이것이 쉽지 않다.
이 같은 특성 차이는 펀드 성과 차이로 이어진다.
퀀트 펀드는 시장 등락의 영향을 덜 받아 꾸준한 성과를 보이는 반면 전통 펀드는 변동성이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난다. 김범희 푸르덴셜자산운용 AI본부장은 “한해 상위 25%내에 들었던 전통적 액티브펀드가 몇 년 동안 계속 상위권을 유지할 확률은 낮다. 퀀트모델에 의해 운용되는 펀드는 한번 상위권에 들면 꾸준하게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따라서 오르는 장세에서 시장상승률 이상의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공격형 투자자라면 퀀트 펀드를 대안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 대신 시장을 크게 이기기보다 평균적 수익률을 안정적으로 달성하는 데 목표를 두는 보수적 투자자일수록 퀀트 펀드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그렇다면 여러 퀀트 펀드 중 어떤 펀드를 골라야 할까. 좋은 퀀트 운용회사는 합리적인 철학과 이론에 기초한 검증된 모델, 시장 상황에 흔들림 없이 원칙을 준수하는 기업문화 등 두 가지 조건을 겸비해야만 한다.
일부 퀀트 펀드의 경우 펀드 수익률이 부진하면 당초 설정된 기준을 벗어나 시장선도 종목 투자 비중을 늘리는 등 편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이런 임기응변으로는 퀀트 투자의 철학은 물론 원래 목표한 수익률을 지켜내기도 불가능하다.
기관투자가는 실사 과정을 통해 실력 있는 운용회사를 선별할 수 있지만 개인투자자는 쉽지 않다. 개인투자자가 퀀트 투자 위험을 줄이는 방법으로는 운용성과 기록이 충분히 긴 펀드를 택하는 것이 권장된다. 또 이들 펀드 중에서 특정 기간에 두드러진 초과 성과를 보인 펀드 보다는 큰 변동성 없이 꾸준히 성과를 달성하는 쪽이 퀀트 펀드의 본령에 충실할 가능성이 높다.
국내 퀀트펀드 현황
미국에서 퀀트 투자가 활성화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미국 자료조사기관인 탭(TABB) 그룹에 따르면 미국의 전체 주식운용자산 중 퀀트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14%에서 2009년 33%로 증가했다. 이중 액티브 퀀트로 운용되는 자산은 총 운용자산의 9%를 차지한다. BGI, 뱅가드, 블랙록 등 주식형 기준 운용규모 상위 10개 운용사 중 절반가량이 퀀트 중심 운용을 하고 있다.
국내에선 2007년 푸르덴셜자산운용이 처음으로 공모형 퀀트액티브 펀드를 출시한 것을 시작으로 잇따라 관련 펀드가 출시됐다. 2009년까지만 하더라도 전체 운용자산 규모가 100억원 미만이던 것이 지난해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해 현재는 2200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펀드평가사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내에서 운용 중인 공모형 퀀트 펀드는 클래스 기준 40개에 달한다. 이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교보악사코어셀렉션’으로 설정액이 767억원에 이른다. 연초 후 수익률은 17.19%다. 연초 후 수익률 비교가 가능한 36개 퀀트형 펀드 중 같은 기간 국내주식형 평균(2.39%)보다 높은 것이 24개로 비교적 안정적 수익률을 나타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향후 퀀트 펀드 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퀀트모델이 활성화되려면 무엇보다 주식 관련 데이터 축적이 중요한데 이 대목에서 한국증시가 눈부신 발전 속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새 기업 재무데이터의 투명성이 매우 높아졌고 공시 주기도 6개월에서 3개월로 단축됐다. 애널리스트 숫자가 획기적으로 늘었고 분석 기법도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해 기업실적 추정이 양적·질적으로 개선됐다.
다만 국내 시장은 아직 개인투자자 비중이 높은 데다 기관투자가 중에서도 전통 액티브 투자 비중이 높아 퀀트 펀드가 아직 확실히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김범희 본부장은 “연기금 등의 운용자산 증가에 따라 성과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고 초과 성과의 유형간 분산 효과가 큰 퀀트 운용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 내다봤다.
실제 국민연금의 퀀트 투자는 최근 몇 년 간 증가세가 두드러진다. 국민연금관리운용 본부에 따르면 4월 말 현재 국민연금의 액티브퀀트 위탁투자 규모는 4조4461억원으로 집계된다. 액티브퀀트 위탁을 시작한 2008년 말 6334억원에 비해 7배가량 증가한 규모다. 위탁 규모는 2009년 1조513억원, 2010년 3조9555억원 등 매년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체 위탁투자에서 액티브퀀트형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9년 5.8%에서 14.1%로 늘어났다. 국민연금으로부터 액티브퀀트 투자를 위탁받은 운용사는 12개사에 이른다.
국민연금이 이처럼 액티브퀀트 투자를 늘리는 것은 시장 평균보다는 높은 수익률을 얻으면서 일반 액티브펀드 투자보다는 변동성을 줄이려는 목적에서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2009년 말 2조원에 달하던 인덱스형 투자를 거의 없애는 대신 액티브퀀트를 늘렸다”며 “구체적 수익률을 밝힐 수는 없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