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번한 금융위기와 불확실한 직장, 늘어난 수명은 세계인의 재테크 메가트렌드를 확연히 바꿔 놓고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브라질,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 주요 8개국 현지를 돌아본 결과 특히 2008년 글로벌 위기 후부터 현금성 안전자산을 늘린 투자자들이 많았다. 이는 지킬 자산이 있는 선진국은 물론 브라질, 중국 같은 개발도상국가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투자심리의 회복을 유럽발 재정위기(2010년 1월~), 중동지역 불안사태(2011년 1월~), 동일본대지진(2011년 3월~)이 차례로 막아선 까닭이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주식·부동산의 고수익을 신뢰하던 기존 투자 패턴엔 근본적인 변화가 일고 있었다. 잘 아는 자산에 투자하면서 포트폴리오를 직접 짜며 늘어난 수명에 대비하고 ‘기대수익률+∝’를 노리는 대체투자 열풍도 심상치 않았다.
데클렌 쉬먼 HSBC 프라이빗뱅킹(PB) 대표는 이에 대해 “개인들이 전에는 관심도 없던 투자상품의 위험, 규모, 운용형태까지 알려고 한다. 개인투자에도 투명성과 전문성이 한층 향상됐다”고 평했다. 국내 투자전문가들은 “우리나라 투자자들도 이에 맞춰 유동성이 좋은 단기투자상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퇴직연금 가입, 금·원자재·농산물·지수연동상품을 일상적인 투자대상으로 익숙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세계 주요 7개국 은행권 PB와 투자사 대표, 거시경제전문가들은 “투자자들의 행태가 지난 3년간 보다 세세한 정보를 원하고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능동적으로 관리하는 쪽으로 변했다”고 입을 모았다. 현장을 돌며 체감한 글로벌 위기 후 재테크 메가트렌드는 크게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정기예금 등 알기 쉽고 유동성이 좋은 안전자산 선호. 둘째, 주식투자에 뚜렷한 양극화. 셋째, 개인 퇴직연금의 급부상. 넷째, 플러스알파를 제공하는 대체투자 열풍 등이 그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선진국과 신흥국 모두 아직은 안전자산에 많은 여유자금을 묶어 놓았지만 노후를 대비해 수익률을 올리기 위한 전략에 고심하고 있다. 특히 선진국에선 20~30대 젊은 층조차 개인 퇴직연금을 챙길 정도로 에이징 파이낸스(aging finance)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투자자들이 보다 간단하고, 위험이 적고, 현금화가 쉬운 자산을 찾고 있다. 특히 미국에선 복잡한 증권상품보다 단순한 적금이 인기다. 투자자들이 위험을 보다 꼼꼼히 따지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힘들면 투자하지 않는다’는 철칙이 되살아났다. 뉴욕에 소재한 티모시 윌리엄스 씨티은행 개인자산관리 부행장은 “지금은 기본으로 돌아가는(back to the basic) 상품투자가 주류”라고 설명한다.
원래 저축성 예금 선호도가 높은 일본은 안전자산 선호가 한층 극단적이다. 정기예금 연리가 0.04%에 불과한데도 현금성 자산 비중이 늘고 있다. 최근 일본 개인투자자 사이에선 0.05%로 높은 금리를 주는 인터넷예금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일본 전체의 예·적금 잔액은 2008년 3월 775조엔에서 작년 9월 말 800조엔까지 늘었다는 게 일본 정부의 공식 통계다. 중국 역시 개인 중산층을 중심으로 예금 선호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또 브라질의 경우도 리스크가 없는 적금계좌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이관석 신한은행 PB팀장은 “시장 불확실성에 따른 단기 보유자금 증가로 국내 투자자도 예금의 보유기간별로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게 급하다”며 “당분간 현금성 유동자산 굴리기가 화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국경제 자신감이 주식 선호로 연결
주식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시각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투자 역사가 깊은 선진국은 아직도 ‘부동산·금융자산·현금’이 균형을 잡은 포트폴리오 투자가 기본이다. 그러나 주식에 직접 투자하거나 주식을 기초로 하는 펀드를 바라보는 시각은 투자자마다 거시경제를 보는 시각에 따라 엇갈렸다.
막대한 연금적립과 거시경제의 활기로 주식에 대한 자신감이 어느 곳보다 강력한 곳은 호주였다. 게리 존스턴 호주 상무성 해외금융서비스 국장은 “투자자들이 다시 주식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호주는 1조7000억 달러(미국)에 달하는 슈퍼애뉴에이션(퇴직연금)이 주가를 떠받친다.
작년 해외 투자자에게 최고의 인기를 모았던 브라질 역시 여유 있는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저평가된 우량주가 유망하다는 낙관적인 전망이 많다. 호주와 브라질 시장은 2009년, 2010년 랠리를 이어온 한국과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2007년 6000을 넘기던 상하이 지수가 3000대로 내려앉은 중국, 대지진으로 안 그래도 부진한 주식시장이 설상가상의 악재를 맞이한 일본은 주식에 극히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선진국에서도 주식시장의 회복을 기대하면서 아직까지 일반인의 선호투자 대상은 인덱스펀드 등으로 한정되는 분위기다.
20~30대도 “퇴직연금부터 챙겨야”
취재현장에서 투자자들이 공통적으로 불안해 한 것은 갈수록 불투명한 노후였다. 브라질, 중국 등 일부 이머징마켓을 뺀 모든 나라에서 개인 재테크의 최종목적지는 ‘노후소득의 안정적인 확보’였다. 호주에선 자신의 퇴직연금을 짜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선 20~30대 사회 초년병 계층도 퇴직연금부터 챙기고 있었다. 특히 미국에선 개인 연금보험 상품이 각광받고 있다. 소속된 회사에서 가입시켜주는 상품이 아니라 개인이 자율적으로 찾아서 가입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얘기다. 조나단 클리멘츠 씨티은행 재테크교육 본부장은 “2011년부터 1946년생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를 시작했다”며 “이들 세대를 기점으로 역모기지론과 같은 연금상품이 늘어날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 세계적인 개인 퇴직연금의 ‘붐업(boom-up)’ 현상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2~3년 사이 퇴직연금 열풍이 금융사의 마케팅 바람과 함께 불고 있다. 하지만 아직 일반 투자자들은 연금투자의 중요성이나 조건에 익숙지 않다. 자신의 연금운용과 실적이 퇴직 후 미래 삶을 결정한다는 의식을 하루 빨리 갖춰야 한다.
대체투자는 선택 아닌 필수
작년 한국에선 지수연동예금(ELD)의 열풍이 불었다. 지수연계펀드(ELS)나 상장지수펀드(ETF) 등도 인기였다. 과거 은행별로 수백억원에 불과했던 상품 판매가 수천억대, 은행권 전체로는 조 단위 이상을 기록했다. 기준금리가 아직 3%에 머문 상황에서 ‘시장금리+∝’를 제공하는 대체투자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결과다. 그런데 이런 대체투자 열기는 전 세계에서 불고 있었다. 한국보다 호응이 더 뜨거웠다.
불확실한 미래에서 리스크를 적게 지고 보너스 수익률을 얻어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이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미국의 상장지수펀드(ETF), 일본의 인덱스펀드, 펀드오브펀드 투자액 증가가 이런 측면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작년 9월 현재 일본의 인덱스펀드와 펀드오브펀드에는 40조엔이 몰려 있다. 개인 투자자들에게도 낯선 지수연계상품이나 원자재, 금펀드가 성공 재테크로 가는 ‘필수 요소’가 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리카도 브리겐티 맥쿼리 자산운용 수석연구원은 “호주에서 최근 뜨는 상품 중 하나가 ETF”라며 “인터넷을 통해 쉽게 투자할 수 있고 투자비용도 낮은데 상품 ETF 등 연계할 수 있는 지수가 다양해 개인들의 관심이 높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