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비중은 낮추고 농산물 투자를 늘려라.”
상품 투자의 귀재 짐 로저스가 2007년 9월 <매일경제>와 인터뷰하면서 한 말이다. 조지 소로스와 함께 권텀펀드를 설립해 기록적인 수익률을 달성한 인물로 현재 로저스홀딩스 회장이자 세계적인 투자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당시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로저스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가장 유망한 투자상품은 농산품”, “유가 계속 오를 것”, “상품 강세장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말로 투자정보(?)를 흘리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원자재 투자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원자재 펀드는 농산물, 원유, 금속 등 상품선물을 대상으로 운용하는 펀드다. 즉 선물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들을 운용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상품펀드’라고 일컫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원자재 펀드’라는 용어로 통용된다.
원자재 펀드는 크게 주식형 원자재 펀드와 파생형 원자재 펀드로 나뉜다. 전자는 원자재 관련 회사의 주식에 투자하는 것을 말하며, 후자는 원자재 관련 선물 등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특정지수를 좇는 상장지수펀드(ETF)라는 것도 있어 원자재 펀드의 한 종류로 분류되고 있다. 상장지수펀드는 거래소에서 일반 주식처럼 사고팔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작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인기몰이
국내에서는 펀드 형태로 원자재 투자가 붐을 일으키고 있다. 올 들어 원자재 펀드의 인기가 크게 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올 들어서 원자재 펀드로 12주 연속 자금이 유입되고 있을 정도다. 유경식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 마케팅 이사는 “전체 시장으로 보면 최근 6개월간 농산물 펀드로만 약 1000억원이 유입됐다”며 “전체 원자재 펀드로 따지면 그보다 3배 이상 유입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작년과 올 초 원자재 펀드의 수익률이 다른 여타 펀드의 수익률보다 월등했다고 얘기한다. 유 이사는 “다른 유형의 펀드는 환매가 지속되고 있지만 원자재 펀드에는 오히려 자금이 속속 유입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다른 형태의 펀드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원자재 펀드만큼은 계속 큰 수익을 주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안정성 면에서는 ‘최악의 펀드’라고 할 수 있다. 원자재라는 것이 워낙 변동성이 크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상황이 뒤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격의 등락폭이 크면서도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이 안정성 면에서 취약한 점이다.
그럼에도 원자재 펀드가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명료하다. 수익이 나기 때문이다. 현대증권 최정원 수석연구원은 “수익률이 좋기 때문”이라며 “개인 투자자들의 관심도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대열 하나대투증권 펀드리서치팀장은 “세계 경기가 회복 국면에 들어서면서 시장의 풍부한 유동성이 새롭게 투자할 만한 곳을 찾은 것”이라며 “인플레에 대한 헤지(위험 회피) 수단으로도 원자재 펀드가 인기를 끌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원자재 펀드를 운용하는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들은 한결같이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창구로 투자자들의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며 “심지어 연구원들에게까지 투자를 문의하는 전화가 부쩍 늘었다”고 전했다.
원자재 펀드에 대한 인기가 갑자기 일어난 현상은 아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부동산 심리가 꺾이면서 원자재 펀드가 대안투자로 떠올랐다. 짐 로저스 같은 세계적인 투자 전문가가 농산물과 원유 등에 투자할 것을 계속 말한 것도 한 이유였다. 서동필 우리투자증권 자산관리컨설팅부 연구위원(펀드애널리스트)은 “국내에서 원자재 펀드 수익률 회복은 지난 2009년부터 있었다”며 “지난해부터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우려로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면서 본격적인 인기몰이에 들어섰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작년 하반기부터 원자재 펀드의 인기가 무서운 속도로 일어났다. 수익률 또한 단기간에 거둔 것치고는 꽤 좋았다. 지난 2월 펀드평가업체 에프앤가이드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6개월간 원자재 펀드 수익률은 대부분 30%가 넘었다. 특히 농산물 펀드 수익률이 가장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원자재 가격이 상승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작년 한 해 곡물은 물론 원유, 광물 등 가릴 것 없이 원자재 가격이 거의 모두 폭등했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에 쏟아진 풍부한 유동성이 인플레이션 우려를 초래하고 글로벌 경기가 회복 기미를 보이면서 공급은 한정돼 있는데 수요가 늘어 원자재 가격이 상승한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김대열 팀장은 “무엇보다 작년 한 해 미국 경기를 비롯해 경기 회복 과정에서 중국 등 이머징 국가들의 원자재 수요가 지속됐다는 점”을 원자재 가격 상승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의 정정 불안은 유가 급등의 원인이 됐다. 여기에다 가격 상승을 부추기는 투기세력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농산물의 상승폭이 컸던 까닭은 기상 악화, 이상기후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그만큼 작황이 나빴기 때문에 증가하는 수요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했던 것이다.
작년 한 해 금값은 사상최고치를 기록했고 곡물 가격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은 데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30~40달러로 하락했던 국제유가도 100달러를 넘어섰다. 이처럼 각종 원자재 가격이 폭등했기에 원자재 펀드 수익률도 좋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자재 중 농산물 가격이 가장 큰 폭으로 상승
칠레 최대 구리 생산기업 코델코의 광산 전경.
하지만 최근 중동의 정정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국제유가를 제외하고는 원자재 가격이 대체로 하락세를 보이면서 펀드 수익률도 함께 하락하고 있다. 특히 농산물의 경우 하락폭이 상대적으로 더했다. 최근 한 달 새에 밀은 15%가량 급락했고, 옥수수는 10% 이상 하락했다.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그동안 너무 올랐기 때문’이라는 데는 대체로 동의한다. 또 투자자들이 차익실현에 나서면서 펀드 수익률이 하락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하락은 상승장에서 불가피한 조정 국면이라고 생각하는 전문가가 많다.
물론 하락 요인은 몇 가지 존재한다. 중국의 금리 인상 등 긴축 정책을 펼 조짐이 보이는 데다 무엇보다 일본 대지진과 원전 폭발에 따른 방사능 유출 문제가 원자재 수요를 감소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
올해 원자재 펀드에 대한 전문가들의 예상은 엇갈린다. 지난 2월까지만 해도 많은 전문가들이 올해 혹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원자재 펀드의 수익률이 좋을 것이라고 전망한 것과 비교하면 많이 조심스러워진 분위기다. 일본 대지진과 방사능 유출의 충격이 너무 큰 데다 중국의 긴축정책 등 경기 둔화 가능성마저 대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상승 국면은 유지할 것이라는 전문가가 많다.
향후 전망에 대한 의견 엇갈려
백화점 식품 매장 육류 코너.
서동필 우리투자증권 연구위원은 “비록 최근 차익실현이 나오면서 주춤하고 있지만 방향성과 기조, 펀더멘탈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원자재 펀드 수익률은 올 연말에는 높아져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서 연구위원은 “농산물보다 원유 관련 펀드가 매력적”이라고 전했다. 그 이유로 “농산물은 그동안 많이 올랐고 모멘텀도 약하다”며 “변동성이 워낙 커서 가격 예측이 쉽지 않다는 점도 불안 요인”이라고 말했다. 서 연구위원은 “유가는 상대적으로 많이 오르지 않았고 앞으로도 꾸준히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돼 안정적”이라고 내다봤다.
김대열 하나대투증권 펀드리서치팀장은 “일본 대지진이 예상치 못한 악재로 작용할 것은 분명하지만 단기에 그칠 것”이라며 “일본 경제의 규모가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위축시킬 만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팀장은 경기 둔화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파악했다. 김 팀장은 “지금 세계 경제는 미국과 중국이 이끌고 가는 형국인데 그쪽 변화가 별로 없다”며 “중동 문제가 장기화한다든가 남유럽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 세계 경제를 위축시킨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경기둔화 가능성이 낮다”고 전망했다. 다만 일본 원전 문제가 확산되는 일은 경계했다.
김 팀장은 개별 품목보다 복합투자펀드를 추천했다. 원자재라는 것이 워낙 변동성이 크기 때문에 리스크가 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주식시장에 빗대 말하자면 ‘분산투자’를 추천한 것이다. 굳이 개별종목을 들자면 “광업주가 유망할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경기 둔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이석진 동양종합금융 자산전략팀장은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의 긴축으로 인해 경기 둔화 가능성이 높아 원자재 시장도 조정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팀장은 “단기적으로는 인플레이션, 식량 위기 논란 등으로 원유와 농산물이 좋고 중장기적으로는 금이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유경식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 이사는 “농산물 가격이 빠지고 일본 대지진 때문에 지금은 어려운 상황”이라며 “일단은 관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최정원 현대증권 수석연구원은 일본 문제를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을 주문했다. “일본 문제가 어떻게 정리되느냐, 그 충격이 완화될지 더욱 거세질지 어떤 쪽으로든 정리돼야 방향성이 정해질 듯하다”고 말했다.
원자재 펀드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증가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걸음마 단계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투자금액이 적은 데다 투자 선진국들처럼 확실히 자리매김된 상태도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연기금이 포트폴리오 관리 차원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지만 해외 사례와 비교해 보면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이 같은 현상들이 자산관리 측면에서 선진화되고 있다는 징표가 될 수는 있다.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과거처럼 그리 크지 않은 데다 랩어카운트, 다양한 선진 펀드 등이 속속 얼굴을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헤지펀드까지 등장하고 있어 금융·자산관리 선진 시장의 형태를 차차 닮아가고 있다.
투자자들이 원자재 펀드에 접근할 때 가장 유념해야 할 사항으로 전문가들은 제일 먼저 “절대 올인하지 말고 위험관리 측면에서 접근하라”고 지적한다. 원자재 펀드의 기본은 ‘인플레이션에 대비한 헤지 차원’이라는 것이다. 즉 투자매력에 현혹돼 원자재 시장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채 접근한다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고 충고한다.
김대열 팀장은 “원자재 펀드가 투자 매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산투자의 대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며 “변동성이 큰 만큼 리스크도 크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또 “리턴보다 리스크를 먼저 생각하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