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지년(不惑之年), 세상일에 미혹(迷惑)되지 않는 나이란 뜻이자 마흔 살을 이르는 사자성어다.
흔들리지 않는 나이,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완전한 성인이자 중년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이는 ‘논어를 읽어야 한다’하고 다른 이는 ‘손자병법’을 권하며 인생의 혜안을 나열한다. ‘인생 2막’, ‘마흔 이후 30년’, ‘노후대책’, ‘마흔 이후 인생을 당당하게 만드는 99가지’도 모자라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라며 시키지도 않은 걱정에 조언을 보탠다. 삶에 대해 다시금 바라봐야 하는 나이, 그게 마흔이요 40대라는 것이다.
사실 2015년을 사는 40대는 이른바 낀 세대였다.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린 베이비부머 세대와 세기말에 태어난 88만원 세대의 갈등이 1990년대에 사회로 진출한 이들의 설움을 유행가 가사처럼 흩날리게 했다. 찬찬히 살펴보면 우선 초·중·고등학생 시절, 그들은 컬러TV와 프로야구, 88올림픽을 경험하며 윗세대가 이뤄놓은 달콤한 성장의 과실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당시만 해도 시위와 분노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추억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1990년대 후반의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은 그들에게 유독 시리고 혹독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불어 닥친 위기는 좀처럼 쉬 사그라지지 않았고, 머리 터지도록 공부해 명문대를 졸업했어도 기업은 바늘구멍 통과한 낙타에게만 문을 열었다.
부잣집 도령이 하루아침에 거리에 내몰린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상황, 충격의 파고는 높았고 이겨낼 재간은 부족했다. 그리고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낀 세대의 설움을 삭힌 그들이 40대가 돼 돌아왔다. 중년을 거부한 젊은 오빠로….
소비 트렌드 이끄는 40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기성세대가 붙인 엑스(X), 그 X세대가 40대가 됐다. 선배들은 그들을 향해 쟤들 뭐냐며 혀를 내둘렀고 규정할 수 없는 발칙함과 끼 덕에 오랫동안 문제적 세대로 기억됐다. 1990년대 당시 언론은 신인류, 신세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별종이라며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연령대를 X세대라 불렀고, 외환위기를 거치며 ‘저주받은 세대’라 칭했다. 제일기획이 작성한 트렌드 리포트에는 X세대를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개성파였으며 경제적 풍요 속에 성장했던 세대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었던 세대’라고 정의하고 있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트렌드코리아 2014>에서 ‘주변 세대에 끼어 사회적으로 잊혀졌으며(Forgotten), 안정을 갖출 시기지만 여전히 흔들리고(Fragile), 놀이와 재미(Fun)를 추구하는 영원한 피터팬(Forever Peter Pan)이란 측면에서 F세대’라 규정하기도 했다. 그동안 표출하지 못했던 욕망과 본능을 소년의 감성으로 분출하는 ‘어른아이’란 것이다. 어쩌면 그건 개성을 중시하는 그들만의 사회성이 바탕이 된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X세대가 청소년기와 20대를 보낸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이른바 해금의 시대요, 해제의 시대였다. 우선 1982년에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됐고,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통제됐던 금지곡과 외국영화들이 해금됐다. 짧은 머리에 고이접어 각 잡아야 했던 검은 교복도 이 무렵 자율화된다. 1971~1973년생은 중·고등학생 시절 단 한 번도 교복을 입지 않았고, 입더라도 학교의 선택에 따라 세련된 디자인의 교복을 입었다. 그만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었고 선배 세대에 비해 경험할 수 있는 문화가 범람했다. 당연히 자율을 접한 첫 세대에게 개성은 의도치 않은 부산물이었다. X세대의 이러한 성향은 세월이 흘러 아빠가 되면서 전 세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소비성향을 낳았다. ‘나는 나’로 대변되던 서구식 개인주의 가치관이 ‘가족 중심주의’로 발전하면서 이른바 ‘X대디’가 탄생한 것이다. 주말에 비즈니스 골프 대신 아이들과 캠핑에 나서고 자녀 교육에 적극적인 이들은 기러기 아빠 식의 무조건적인 희생보다 나 또한 중요하다는 걸 분명히 내세웠다. 가족을 위해 오직 회사에만 매달리던 아버지 세대가 명예퇴직으로 내몰리는 걸 보고 자란 그들은 좋은 아빠를 꿈꾸며 가족과 함께 여행에 나섰고, 나를 위한 취미에 경제적인 투자도 서슴지 않았다.
실제로 이러한 성향에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분야는 키드(Kid)와 어덜트(Adult)가 결합된 키덜트 산업이다. 어린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는 심리도 있지만 아이들과 함께 취미를 공유하는 키덜트족이 늘어나며 이들을 겨냥한 다양한 상품도 속속 출시되고 있다. 지난해 시장 규모는 약 5000억원. 매년 20% 이상 성장하며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일례로 캠핑의 황금시즌이라는 지난해 5~6월, 온라인몰 옥션의 R/C자동차와 무선조종 상품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95%, R/C자동차 소품은 565%나 급증했다. 야외용 기차, 레일, 트랙 등의 매출도 340%나 뛰어올랐다. 모형 프라모델이나 헬기의 매출도 각각 35%와 15% 늘며 키덜트 상품의 폭발적인 인기를 반영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자녀와 함께하는 캠핑이 늘면서 야외에서 즐길 수 있는 제품이 큰 인기를 얻었다”며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함께 놀고 즐기는 친구 같은 아빠가 늘어난 것도 키덜트 시장 확대의 견인차”라고 설명했다.
나를 위한 소비, 오빠라고 불러다오
이정재, 신하균, 이성민, 정우성, 이선균, 이서진, 차태현, 박진영, 양현석, 윤상, 유희열, 이적, 서태지, 유재석, 신동엽, 이휘재… 대한민국의 방송과 영화, 음악계를 주름잡는 이들의 공통분모는 첫째 남자, 둘째 40대, 셋째 X세대란 점이다. 중년(아저씨)보다 오빠의 이미지가 부각된 40대 연예인의 이미지는 이들로 대변되는 대표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달라진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광고 시장에서의 인기다. 특히 젊은 꽃미남의 상징이었던 패션, 뷰티 분야에서 이들의 독주는 이미 당연한 현상이다.
동시대를 함께 자란 이들과 꾸미고 가꾸는 게 부끄러울 리 만무한 법. 자연스레 남성화장품 시장의 규모도 확대되고 있다. 롯데백화점의 한 관계자는 “과거 40대 남자들의 화장품은 선물로 주고받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소비자가 직접 매장에 찾아와 취향에 맞는 제품을 고르고 있다”며 “피부 톤에 따라 맞는 제품을 선택하는 게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상황을 전했다. 업계에 따르면 2010년 8000억원이던 남성화장품 시장은 해마다 성장을 거듭하며 2013년엔 1조300억원, 지난해엔 1조2000억원 규모로 추산되고 있다.
최근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출간한 <트렌드코리아 2015>는 “양적 성장보다 주목할 점은 스킨, 로션 같은 기초화장품을 넘어 BB크림, 에어쿠션, 아이라이너 등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색조 화장품까지 남성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는 점”이라며 “지난 3년간 불황으로 인해 전체 화장품 시장의 매출 성장률은 5%대로 둔화되고 있는 반면, 남성 화장품 시장은 해마다 10% 이상 급성장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패션에 대한 관심은 백화점의 쇼핑 동선까지 바꿔놓았다.
신세계 백화점의 경우 전체 고객 중 남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23%에서 지난해 9월 32%까지 높아졌다. 2012년과 2013년 남성 전문관이 들어선 신세계 강남점과 센텀시티점의 매출은 전년대비 각각 5.4%와 9.3% 늘었다.
서울 압구정동의 갤러리아 명품관의 경우, 전년 대비 매출 증가가 가장 큰 곳은 남성 명품 브랜드가 자리한 4층이었다. 무려 30%나 증가했다.
명품 시장에서의 이들의 소비본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트렌드 중 하나. 한 명품 시계 업체 브랜드 매니저는 “한 달에 10피스의 시계가 판매되는데 그 중 3~4개는 40대 남성이 매장에 홀로 방문해 구입한 것”이라며 “주로 800만~1500만원대 제품이 인기”라고 전했다. 그는 “브랜드가 전년 대비 50% 이상 성장한 건 자신을 중시하는 이들 덕분”이라며 40대 고객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덧붙였다.
“명품을 비롯해 각 브랜드의 여성 제품은 이제 성장률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반면 남성 고객 특히 40대 꽃중년들의 소비는 이제 시작이죠. 전통적인 명품의 기준을 벗어난 그들만의 개성이 새로운 명품을 탄생시키기도 합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이제 시작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앞으로 브랜드와 유통의 성장 방향이자, 틀림없는 기준이죠. 확실히 40대가 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