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심하게 부딪혀 퍼렇게 멍이 든 그런 상처같은 날이었다.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 해역에서 세월호가 쓰러졌다. 승객을 전원 구조했다고 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다수가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꽃다운 안산 단원고 학생들 339명이 타고 있었기에 더 아팠다. 대한민국은 무기력했다. 국민들은 침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경악했고 슬퍼했다. 악몽같은 날이었다.
그날도 기자는 언제나처럼 청와대에 있었다. 평안했던 하루는 번잡하게 바뀌었다. 청와대 전체가 돌연 비상상황으로 돌입했다. 오후로 접어들며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하루 내내 정신이 없었다. 16일 밤부터의 얘기다.
<16일 24:00> 하루를 쉴틈없이 보낸 박근혜 대통령은 16일 밤 12시 즈음에 다음날 진도를 방문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결정되자마자 비상대기하던 경호실 요원들은 즉시 진도로 떠났다. 항공편에서 내려 공항부터 연결할 교통편과 해상 경비상황을 장악해야 했다. 16일 오전 사고 초기에 선장과 승무원들의 비양심적인 무대응과 ‘승객 전원구조’라는 초대형 오보에 ‘골든 타임’을 놓쳐버린 터였다. 이날밤 청와대는 엄청나게 분주했다. 그날까지만 해도 언론은 ‘에어 포켓’을 언급하며 희망이 있다고 보도하던 때였다.참모진사이에선 사고 둘째 날 대통령이 현장에 가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다. 대통령은 그러나 언제나처럼 직접 결정했다. 그 시간이 밤 12시였다.
<17일 03:00> 한 비서관은 17일 새벽까지 회의를 하다가 집에 들어왔는데 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3시였다. “오늘 VIP가 진도로 가십니다. 준비하셔야겠습니다.” 10분만에 집에서 나왔다. 이날 청와대는 새벽 3시, 새벽 5시에 연이어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해가 뜨자 대통령과 함께 밤을 지샌 채 곧 진도로 향했다.
<17일 07:05> 동이 터오는 청와대 춘추관. 언제나처럼 오전 6시가 조금 넘자 방송과 통신기자들을 시작으로 하나둘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출근한 한 기자에게 한 행정관이 다가왔다. “대통령이 진도에 직접 갑니다. 풀기자를 해주실 수 있나요?” 대통령을 취재하는 풀기자는 순번으로 돌아가지만 이날처럼 돌발사건은 가능한 기자들에게 직접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취재기자, 카메라기자, 촬영기자들이 섭외됐다.
<17일 07:20> 민경욱 대변인이 매일 이 시간에 하는 아침 브리핑을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달리 분위기는 무거웠다. 민 대변인은 “대통령께서는 오늘 아침 진도로 향하십니다. 외부행사로 경호가 문제가 되니만큼 행사 종료시까지 엠바고를 지켜주십시오”. 청와대는 엠바고 기준에 따라 인터넷에 대통령의 동선이 노출되지 않도록 사후에 보도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17일 08:00> 대통령과 수행단, 풀기자단은 진도로 떠났다. 비극의 그 바다까지 가는 도중에도 애를 태워야 했다. 한순간 한순간 조여오는 초조함. 가장 빠른 교통편이 제공되는 대통령 일행에게도 진도는 멀었다. 결국 대통령은 진도까지 갔다오는데 11번의 교통수단을 갈아탔다. 청와대→서울공항(승용차)→광주 군사공항(대통령 전용1호기)→진도 서망항(승용차)→근해(해경정)→사고현장(해경 1500톤급 경비함정)→해경지휘함, 그리고 지휘함에서의 브리핑을 청취 후 다시 지휘함→경비함정→서망항(경비정)→진도군 실내체육관(승용차)→광주 군사공항(승용차)→서울공항(전용기)→청와대(승용차). 이렇게 하루를 움직였다.
<17일 22:00> 어두운 밤이었다. 청와대 춘추관에 모여서 기사를 송고하는 기자들은 모두 재난현장이 생중계되는 TV와 인터넷만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쓸 수 없는 현실.
※ 45호에서 계속...
[김선걸 매일경제 정치부 기자 사진 김재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