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평소 자주 이용하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제도 중의 하나가 신탁이다. 펀드를 가입하고 가입증서를 받으면 그 명칭이 ‘~ 투자신탁’임을 확인할 수 있고, 재건축아파트는 사업진행을 위하여 대부분 조합에 소유권을 ‘신탁’한다. 또한 중위험 중수익의 대표상품인 ELT의 정식명칭은 ‘특정금전신탁’이다.
펀드는 자산운용사가 다수 투자자의 돈을 모아 운용한 손익을 투자자에게 분배하는 구조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운용손익이 아닌 자산운용사의 파산으로 투자자가 손해를 입는 경우는 없어야 하기 때문에 그 운용재산을 자산운용사가 아닌 다른 금융기관에게 신탁하게 한다. 투자자는 위와 같이 별도 관리되는 신탁재산에서 발생한 손익을 받을 수익권을 투자금에 비례하여 취득하므로, 투자금이 신탁으로 관리·운용된다 하여 ‘~ 투자신탁’이라고 한다.
재건축아파트를 조합에 신탁하는 이유는 위 펀드에서와 반대다. 아파트 재건축은 개개의 노후 아파트를 한꺼번에 멸실하고 신축하여 조합원들에게 분배해야 하기 때문에 조합원 개개인이 신축조건을 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수많은 조합원이 매각, 근저당권설정, 압류·가압류 등 각각의 권리변동을 발생시키면 사업이 진행되기 힘들다. 따라서 아파트 전부에 대한 소유권을 조합에 신탁하게 하여 조합이 통일적으로 관리하면서 재건축사업을 진행한다.
펀드와 재건축아파트의 신탁이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인 것과 달리, ELT는 은행이 판매자격이 없는 ELS를 판매하기 위한 것이다. 투자자가 투자금을 은행에 신탁하면 은행이 은행명의로 ELS를 취득한 후 ELS가 상환되면 그 상환 받은 금액을 투자자에게 지급한다. 은행은 판매가 금지된 ELS를 판매한 것이 아니라 투자자로부터 금전을 신탁으로 받았다가 운용 후 그 결과를 반환한 것뿐이다. 그런데 은행이 임의로 취득한 ELS에서 손실이 나면 그 책임에 논란이 있을 수 있으므로, 투자자에게 ELS를 ‘특정’하도록 하는 것에서 ‘특정금전신탁’이라고 한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다양한 목적으로 신탁을 이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탁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영국, 미국, 싱가포르 등 금융선진국에서와 같이 자산관리의 수단으로 신탁을 이용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산관리수단으로 가장 흔히 알려진 생전신탁(Revocable Living Trust)은 금융기관에게 재산의 소유권을 맡기고 금융자산은 물론 부동산의 관리까지도 대신하게 한다. 만약 상속이 발생하면 금융기관은 법정상속절차(Probate)가 아닌 미리 정해놓은 계획과 방법대로 상속집행까지도 대신한다. 자녀가 어리거나 장애가 있는 경우 생명보험신탁(Irrevocable Life Insurance Trust) 또한 많이 이용하는데, 보험금이 자녀를 위하여 사용되지 않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금융기관이 보험금을 신탁으로 관리하면서 자녀에 대한 안정적인 지급을 보장한다. 일본에서는 본인 생존 시 본인을 위해 치료비의 지급 등을 보장하고 사후에는 가족이 매월 일정액을 받도록 하거나, 본인 사후에도 미성년자인 자녀를 위하여 필요자금이 안정적으로 관리될 수 있도록 하는 신탁이 활성화되어 있다.
신탁이 자산관리수단으로 널리 이용되는 이유는 자산설계에 있어서 신탁보다 유연하고 확실한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수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 펀드, 아파트 재건축, ELT의 신탁에서 공통적으로 재산 소유자는 소유권을 맡기고 그 운용 손익을 취득한다. 신탁은 재산 운용자에게 소유권을 맡겨서 완전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특징이 있다. 재산 운용자가 본인을 위하여 완전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본인이 정해놓은 자산설계를 제한 없이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신탁의 특징을 이용하면 그동안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던 경우에도 보다 완전하고 유연하게 자산관리를 할 수 있다. 효도계약의 경우 그 불이행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통제할 방법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신탁을 조건으로 증여하면 금융기관이 그 이행을 담보하고 불효하면 부모에게 재산을 반환한다. 상속의 경우에도 금융기관을 통하여 상속재산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신탁제도라고 하여 신탁 설계의 유연성과 집행의 확실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도 신탁을 단순한 구조로 이용하기보다는 자산관리수단으로 현명하게 활용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