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0년 전만 해도 배럴당 150달러까지 치솟았던 유가는 지난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100달러 선으로 내려앉았다. 뒤이어 제1차 셰일가스 붐(2011~2014년)으로 인해 유가는 배럴당 50달러 밑으로 추락했다. 그동안 높은 채굴비용 때문에 시장에서 외면했던 셰일가스가 고유가 덕분에 빛을 보면서 원유 공급량이 급증한 여파다. 유가는 올 들어서야 산유국들의 감산 합의와 글로벌 경기회복 등에 힘입어 반등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올 한 해 동안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배럴당 42~55달러 선에서 등락을 반복하며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내년에도 유가는 좁은 폭으로 등락을 반복하며 60달러 이상 선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내년 유가의 방향성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유가 부양 의지와 신흥국 원유 수요에 달렸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주요 산유국들의 모임인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원유 감산 연장을 논의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조의 바탕에는 내년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회사인 아람코의 상장이 깔려있다. 아울러 세계 2위 원유소비국인 중국과 4위 인도의 에너지 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정부는 국가 에너지 소비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던 석탄 비중을 크게 줄이고 비화석 에너지와 천연가스 사용 비중을 늘리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반면 인도는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석탄과 석유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다. 이 때문에 지난 7일 OPEC은 연례 ‘세계 원유전망 2040보고서’를 통해 “오는 2040년 인도가 세계에서 가장 에너지 수요가 높은 국가가 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이 밖에도 중동의 정치 불안 또한 유가에 단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윤지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이란 핵 협상이나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 독립 등 중동지역 불확실성에 따른 공급 차질 이슈도 단기적으로 유가상승을 견인하지만 유가의 구조적 방향성을 결정하기에는 무리”라며 “중동 지역의 공급 차질 물량은 전체 원유 생산의 1~3%에 불과하며 정치적 이벤트에 따른 변동이 매우 커 유가의 중장기 방향성 전망을 위한 점검요인에서는 배제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원유 관련 펀드, 수익률 회복 조짐
지난 6월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이 연중 최저점을 찍고 반등하면서 원유에 투자하는 펀드들의 수익률도 살아나고 있다. 14일 펀드평가사 제로인에 따르면 운용순자산이 10억원이 넘는 원유 관련 펀드의 최근 3개월 수익률은 4.04%, 6개월 수익률은 5.50%다. 시중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가 0.9~2.0%라는 점을 감안하면 예상보다 높은 수익률을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조금 다르다. 1년 수익률은 -0.31%, 2년 수익률은 -43.48%로 장기간의 저유가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앞으로의 관건은 내년 유가가 배럴당 60달러에 안착한다면 지금 어떤 상품에 투자해야 하는가다. 현재 주식시장에 상장된 원유 관련 펀드는 총 6개로 이 가운데 5개가 상장지수펀드(ETF)다. 또한 이들 펀드의 대부분은 원유를 생산하는 기업이 아니라 원유 선물에 투자한다. 이 때문에 유가와 원유 선물 ETF 수익률이 따로 움직인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올 해 유가 흐름만 그대로 따라갔다 해도 5~10% 수익은 내야 맞는데 원유 선물 ETF는 연초 이후 오히려 손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유가와 원유선물 ETF가 다르게 움직이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원유는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과 달리 일반 투자자가 손쉽게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뉴욕상품거래소와 런던선물거래소 등 국제시장에서 주로 거래되기 때문에 원유 현물 대신 선물을 통해서 간접 투자한다. 원유 선물은 대부분 한 달 단위로 만기가 있는데 만기가 도래하면 기존 선물을 팔고 새로운 선물을 사는 롤오버(만기 연장) 비용이 발생한다. 여기에 환헤지 여부와 괴리율(시장가격과 순자산가치 차이)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개인투자자 입장에서는 이를 따져 보기 쉽지 않다.
김성훈 한화자산운용 ETF팀장은 “원유 선물 ETF는 WTI원유선물 지수를 추종하는데 롤오버를 할 때마다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실제 우리가 접하고 있는 유가와는 차이가 날 수도 있다”며 “또한 ETF는 금융시장에서 실시간으로 체결되다 보니까 시장가격에 따라서 지표지수와의 괴리율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 팀장은 “일시적으로 괴리율이 발생해서 유가와 원유선물 ETF 수익률에 격차가 있을 수도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유가와 원유선물 지수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덧붙였다. 원유 선물 ETF가 유가 상승분을 100% 반영하지 못한다더라도 여전히 유효한 투자수단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 경기가 살아날 조짐을 보이는 데다 신흥국들의 원유 수요 또한 탄탄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가는 내년까지 상승세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유가 상승에 무게가 실리면서 원유에 투자하는 펀드뿐만 아니라 주요 산유국에 투자하는 펀드들도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산유국으로 꼽히는 러시아와 브라질은 국제유가 움직임에 증시가 긴밀하게 연동되기 때문이다. 유가가 본격적으로 상승한다면 유정 개발 등 글로벌 에너지 사업에 투자하는 인프라 펀드 역시 반사이익을 볼 수 있다. 현재 시장에는 KB브라질증권펀드, 멀티에셋삼바브라질펀드, 미래에셋연금인디아인프라펀드 등 20여 개의 러브인 펀드가 있다. 최근 수익률을 따져보면 브라질을 기초자산으로 만들어진 펀드가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좋다. 프랭클린브라질증권 펀드가 6개월 수익률 1.53%, 1년 수익률 19.63%를 기록하고 있다. 미래에셋연금브라질업종대표펀드, KB브라질증권펀드도 1년 기준으로 15%대의 수익률을 내고 있다.
앞으로 유가가 더 오른다면 지금까지 덜 오른 러시아 펀드가 각광받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브라질 펀드의 수익률이 철광석과 구리 등 다른 원자재 가격에 상당 부분 좌우되는 것과 달리 러시아 펀드는 유가에 기대는 측면이 좀 더 크기 때문이다. 또한 유가가 올라 러시아 경제가 안정되면 내수 소비심리를 자극해 현지 소비재 기업들의 주가가 덩달아 오르는 선순환 구도를 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KB러시아대표성장주펀드, 키움러시아익스플로러펀드 등을 살펴볼 만하다. 아울러 유가 상승에 따른 인프라 설비 확대 효과가 기대된다면 미래에셋친디아인프라섹터펀드와 IBK인디아인프라펀드 등 인프라 펀드로 눈을 돌릴 수 있다. 이들 펀드는 인프라 설비 신규 발주가 중국과 인도 등 신흥국에 미치는 경제 효과에 주목하는 상품이다.
원유 정제시설(출처: 픽사베이)
▶업종별 기상도
조선·건설·정유株 ‘맑음’
앞서 말한 원유 관련 펀드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원한다면 유가상승에 따른 수혜주와 피해주를 가려서 직접 투자하는 건 어떨까. 올 하반기 국제유가가 상승세를 기록하면서 우리 주식시장에서도 업종별로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전통적인 유가 수혜주인 조선과 건설업종은 ‘중동 오일머니’의 신규 발주량이 늘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 속에서 상승세를 탔다. 정유사들 또한 이미 확보한 원유 가치가 높아지면서 평가이익을 볼 가능성이 크다. 반면 항공과 해운, 유틸리티업종은 원가상승에 따른 수익성 저하 우려로 주가 약세가 이어졌다.
유재훈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 2011년 이후 글로벌 석유 메이저 회사들의 설비투자가 지속적으로 감소했지만 국제유가 안정화로 내년부터는 해양자원개발 설비투자가 증가할 것”이라며 “글로벌 조선업황 개선 본격화와 맞물려 조선사들의 수주잔고가 4년 만에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밸류에이션 측면에서도 조선과 건설업종은 매력적이다. 지난 몇 년간 해외프로젝트 손실 등으로 주가가 조정을 받으면서 현재 제값을 못 받고 있다. 주가순자산비율(PBR·주가/주당순자산)을 살펴보면 현대중공업(0.62배), 삼성중공업(0.73배), 현대건설(0.66배) 등 주요 업체들의 PER가 1에도 못 미친다. 이것은 현재 주가가 회사의 장부가치보다도 낮다는 의미다.
아울러 유가 상승 수혜주 중 하나로 정유업종을 꼽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유업종 실적은 원유를 수입하고 이를 정제해 되파는 정제마진 규모로 결정된다. 원유수입에서 제품판매까지의 기간 동안에 유가가 상승하면 원유 비축분에 대한 재고평가이익이 발생한다. 이게 바로 지난 6개월간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각각 37.72%, 18.02%씩 급등한 주요 배경이다. 또한 정유사들은 겨울철 난방 수요가 늘어나는 4분기까지 호실적을 이어갈 전망이다.
한편 기름 소비가 많은 기업들은 유가 상승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지난 3분기 한국전력공사의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53% 늘어난 16조1877억원을 기록했지만 영업이익은 37.3% 줄어든 2조7729억원에 그쳤다. 매출액은 소폭 늘었지만 유가 상승 여파로 원가 부담이 커지면서 영업이익은 3분의 2 토막 난 것이다. 한국전력 주가는 최근 석 달간 12.75% 빠졌다.
항공과 해운업종 또한 고전하기는 마찬가지다. 항공업종은 지난 상반기 일본, 동남아 등 대체노선을 발 빠르게 확보해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여파를 이겨냈지만 최근 유가 상승세에는 맥을 못 추고 있다. 대한항공(-13.88%), 아시아나항공(-11.18%) 등 항공사와 현대상선(-23.37%), 팬오션(-14.77%) 등 해운사는 최근 석 달간 두 자릿수 하락세를 나타냈다.
송재학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 7일 기준 제트유가는 배럴당 75달러를 기록하는 등 최근 제트유가 급등세가 나타나면서 항공사 주가의 약세 요인으로 부각됐다”며 “4분기에 지속적인 원화강세 흐름이 예상되는데 이를 통해 유가상승에 따른 부담 일부가 상쇄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