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긴축이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인식이 시장에 퍼지면서 지난해부터 이어진 ‘역(逆)머니무브’ 현상이 사그라들고 있다. 실리콘밸리은행(SVB) 등 미국 은행들의 연이은 폐쇄로 미국 긴축 완화에 대한 기대감이 더해지면서 안전자산인 은행 예·적금에서 주식 등 고위험 투자 상품으로 자금이 흘러가는 ‘머니무브’가 빨라지는 모습이다. 금리 상승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단기 예금 위주의 재테크 전략을 짰던 투자자들은 포트폴리오 배분을 점검해볼 시점이라는 조언이 나온다.
올 들어 은행 수신 자금은 빠른 속도로 이탈하고 있다. 한국은행의 최근 집계에 따르면 지난 1월 은행의 수신 잔액은 전월 대비 48조4000억원 감소했다. 수시입출식예금은 59조5000억원 줄며 통계 작성 이래 최대 감소를 기록했다. 정기예금도 9000억원 줄었다. 2월 은행의 수신 잔액은 전월보다 22조3000억원 늘며 3개월 만에 반등했는데, 기업과 지방자치단체의 자금이 들어오면서 수시입출식예금과 정기예금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기예금 금리가 3%대에 머물면서 다른 투자를 위해 해지를 선택하는 개인 고객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반대로 1월 자산운용사 수신 잔액은 전월 대비 50조4000억원 늘며 증가세로 돌아섰다. 2월에도 자산운용사 수신은 8000억원 늘었다. 단기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머니마켓펀드(MMF) 잔액은 1월 39조원 증가했다가 2월 재정집행에 따른 국고자금 유출 등으로 2조2000억원 감소했다. 반면 2월 주식형·채권형 펀드에는 전달에 이어 증가세를 보이며 각각 1조2000억원, 3000억원 유입됐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증시 대기성 자금인 투자자예탁금은 지난 10일 기준 48조3254억원으로 최근 한 달 동안 2.64% 늘었다.
지난해 금리가 숨가쁘게 치솟는 가운데 주식·채권 시장이 모두 힘을 못 쓰자 투자 자금은 은행 예·적금으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은행 정기예금 금리가 연 5%대에 달했기 때문이다. 한은 통계를 보면 지난해 11월 은행 정기 예·적금은 역대 가장 큰 폭인 58조5000억원 불어났고, 12월에도 31조6000억원 늘었다. 은행 PB들이 추천하는 재테크 상품 목록에 정기예금이 꼽힐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 흐름은 지난해와 정반대다. SVB 파산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통화 긴축에 제동이 걸릴 것이란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예·적금에 묻어둔 자금이 자산 시장으로 빠져나가는 머니무브가 뚜렷해질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오경석 신한PWM 태평로센터 팀장은 “단기 정기예금 중 만기가 도래한 자금이 MMF 등으로 유입되고 있다”며 “주식 투자 시점이나 배당 지급액을 늘려온 ‘배당귀족주’를 궁금해하는 고객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여대영 우리은행 TCE시그니처센터 PB팀장은 “은행 정기예금 금리가 작년 10월 5%대에 달했지만 금융당국의 구두 개입으로 올 초 3%대로 내려가는 등 두 달 만에 2%포인트 떨어지자 일단 자금을 단기로 예치해두고 투자 타이밍을 저울질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은행에서 빠져나간 돈은 채권을 찾아가고 있다. 김정혜 KB골드앤와이즈 더 퍼스트(GOLD&WISE the FIRST) 부센터장은 “듀레이션(만기)이 긴 채권일수록 금리에 따른 가격 변동이 크기 때문에 국채 장기물에 대한 투자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며 “향후 금리가 낮아질 경우 채권 가격이 상승하기 때문에 적당한 시점에 매매수익을 노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국채는 표면 금리가 낮아서 이자소득세가 적고, 매매수익은 과세하지 않기 때문에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다. 금리 인하 시기가 늦어지더라도 만기까지 보유하면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리스크 대비 수익성을 고려하면 채권 투자의 적기라고 볼 수 있다는 게 김 부센터장의 설명이다. 원화로 해외 투자적격등급 채권을 사는 투자자들도 있다.
김 부센터장은 “투자적격등급 채권은 국채보다 만기는 짧지만 이율이 높아서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며 “분산투자 관점에서 고려해보면 좋다”고 조언했다. 10년 만기 미국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도 최근 은행 PB들이 추천하는 재테크 상품들이다.
이희윤 하나은행 분당PB센터지점 Gold PB부장은 “잔존 만기가 13~18개월 남은 우량한 유통물 채권을 눈여겨볼 만하다”며 “금융투자소득세가 2025년까지 유예돼 만기 시 자본차익에 대해 비과세 혜택을 볼 수 있어 나오기가 무섭게 소진되고 있다”고 말했다. 오 팀장도 “유통 중인 선순위 채권은 과거 낮은 금리에 발행돼 현재 저렴한 가격에 매수가 가능하다”고 소개했다.
ETF(상장지수펀드) 투자심리도 살아나고 있다. 이 부장은 “고점 대비 20% 이상 하락한 시점”이라며 “반도체, 2차전지, 테크놀로지, 모빌리티, 소비재 등 중장기적으로 성장 가능한 산업과 종목에 적립식 분할 투자를 해볼 만한 절호의 기회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적립식 투자는 시장의 등락과 상관없이 꾸준한 불입을 통해 매입단가를 낮추고, 투자 시점을 분산해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수익을 끌어올릴 수 있는 투자 방법이다.
노녹인(No Knock-in)을 조건으로 한 ELT(주가연계신탁)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 부장은 “일정 수준 아래로 주가 지수가 하락하지 않으면 사전에 정해진 투자수익률을 확보할 수 있는 상품”이라며 “노녹인 구조로 6개월 상환, 배리어(평가율) 75~85인 경우 연 5~7.8%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시장의 방향성이 불분명한 시기에 투자 성과가 좋은 편이어서 투자자들이 선호한다”라고 덧붙였다.
ELT와 비슷한 ELS(주가연계증권)에도 돈이 몰리고 있다. 고금리가 상당기간 지속돼 증시가 크게 오르지 못할 것으로 예상한 투자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2월 발행된 ELS는 총 2조3928억원으로 작년 말 대비 67% 급증했다. 여 팀장은 “증시가 변동성은 있지만 박스권에서 움직이는 만큼 지수형 ELS가 정기예금 선호도를 넘어섰다”고 말했다.
금융사가 발행한 신종자본증권도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국내 금융지주사와 은행들이 발행한 신종자본증권의 금리는 연 4.6% 수준으로 3%대인 은행 정기예금 금리보다 높다. 이 부장은 “3개월 이표채로 금융 소득이 매년 분산되고, 지급되는 이자로 적금 또는 적립식 펀드로 운용하면 복리효과도 누릴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소개했다. 오 팀장도 “과거 저금리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 금리도 높다고 볼 수 있다”라며 “신종자본증권이나 정기예금을 든다면 5년 이상의 장기 상품을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증시 전망은 낙관론과 비관론이 맞서고 있지만 주식 투자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는 게 PB들의 전언이다. 김 센터장은 “국내 주식은 글로벌 평균 대비 큰 폭으로 하락한 만큼 저가 매수 수요가 있지만 경기 개선의 불확실성 때문에 상승 폭은 제한적일 것”이라며 “당분간 박스권을 유지하며 업종별 차이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말했다.
여 팀장은 “3월은 종목과 테마를 중심으로 지난달 부진했던 증시가 따라잡기에 나서고, 4월은 실적에 따른 등락이 예상된다”라며 “하반기 증시는 중국의 본격적인 공장 재가동과 러시아 원유 감산으로 국제 유가 흐름이 물가를 다시 자극할 경우 순탄치 못할 수도 있다”라고 전망했다. 이어 “지난해 배럴당 130달러에 달했던 원유 가격(WTI)이 최근 80달러로 내려갔는데 다시 100달러를 향해 오를 경우 경기 민감주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 팀장은 미 국채 금리 등락에 따라 성장주와 가치주에 투자하면 리스크를 줄이면서 수익률을 개선할 수 있다는 조언도 내놨다. 국채 금리 4%대에서는 금리 하락을 예상한 채권형 펀드와 성장주에 투자하고, 국채 금리가 3% 중반대라면 금리 상승 가능성을 보고 가치주를 선택하는 식이다. 가치주에선 달러 강세에도 버틸 수 있는 미국 필수소비재와 헬스케어 종목에 주목해볼 만하다.
전문가들은 이번 머니무브 시대엔 금융 시장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SVB 파산으로 미국이 긴축 속도 조절에 들어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지만 물가와 고용 등 경제지표 호조로 긴축 고삐를 다시 바짝 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리 영향을 받는 환율도 출렁이고 있다. 달러당 원홧값은 지난 2월 거래일 중 절반은 10원 안팎 움직였고, 한 달 동안 무려 100원 이상 급락했다. 이에 환율에 기반한 자산 투자는 주의가 필요하다.
여 팀장은 “미국의 중국 견제 심화와 국내 무역적자 개선 지연, 한미 간 기준금리 격차 확대 등을 감안하면 원달러 환율은 불안한 흐름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라며 “외국인의 한국 주식 매입이 멈출 경우 원달러 환율이 급하게 상승(원홧값 급락)할 수 있기 때문에 달러에 투자한다면 1200원대가 유리하다”라고 조언했다. 이 부장은 “미 연준이 올해 상반기까지 기준금리를 인상한다면 그간 긴축정책으로 유지된 달러 강세 흐름도 바뀔 것”이라며 “한국이 올해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에 성공한다면 외국인 투자 수요가 늘어나면서 환율이 하향 안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라고 내다봤다.
중국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 많지만 투자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여 팀장은 “중국 투자는 이미 손실을 안고 있는 투자자들이 많다”며 “중국 관련 투자는 전체의 30% 이하가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중국은 코로나19 팬데믹 후 3년 만의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으로 경기 정상화가 기대되지만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5% 안팎으로 설정한 것은 부채관리에 집중하며 과도한 유동성을 자제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 팀장은 “중국은 부동산 시장이 여전히 불안하고, 미국이 산업망 재편에 나서면서 각국의 탈(脫)중국이 현실화하는 등 불확실성이 여전히 높다”고 설명했다.
머니무브 흐름에 맞춰 자산은 어떻게 배분하면 좋을까. 김 부센터장은 대기 자금은 20%, 국내와 해외 채권에 각각 25%, 해외 주식 20%, 국내 주식 10%를 추천했다. 김 부센터장은 “주식은 성장주 위주로 분할 매수가 바람직하다”라고 말했다. 오 팀장은 투자에 관심이 많다면 단기 유동성 비중은 25% 정도로 놓고, 주식과 채권은 각각 30%, 40% 정도의 비중으로 배분할 것을 추천했다. 그는 “하반기 미 국채 장단기 금리 차가 지금처럼 1%포인트에 가깝다면 은행의 대출 축소와 부실이 대두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부장은 주식과 채권, 현금의 비중을 30 대 40 대 30의 비율로 나누면 좋다고 했다. 그는 “향후 금리가 하락할 때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채권에 비중을 둬야 한다”라며 “탄탄한 미국의 소비 여력과 기업 실적을 고려할 때 주식 시장도 외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여 팀장은 현금·예금은 30%, 국내외 주식형 50%, ELS 20%를 추천했다. 유보 자금을 확보해 놓고 가격이 조정되면 주식과 채권에 분산 투자해야 한다는 게 공통된 조언이다. 김 부센터장은 “시장의 변화 속도가 빨라지고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라며 “금융 시장 리스크에 대비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임영신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51호 (2023년 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