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쏘아올린 관세 폭탄이 환율전쟁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무역 정책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관세전쟁의 일시적 휴전 이후 환율전쟁의 서막이 오를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달러가 너무 강하다. 우리 수출을 죽이고 있다”는 트럼프의 발언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이미 준비된 전면전의 신호탄이다. 미국 중심의 환율개입,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세계는 다시 한 번 화폐를 무기로 삼은 국제 분쟁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트럼프는 “중국과의 무역은 공정하지 않다”며 중국과의 관세전쟁을 선포했다. 전기차와 배터리, 반도체 부품 등에 최대 145%에 달하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해 한달여간 이를 유지했다. ‘관세는 우리의 무기이며, 전 세계가 미국의 조건을 따르도록 만들겠다’는 그의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그러나 5월 12일 미국과 중국은 90일간의 관세 휴전에 합의하며 미국은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30%로, 중국은 미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10%로 각각 인하했다. 이러한 일시적 휴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는 4월 5일부터 모든 수입품에 대해 10%의 보편적 관세를 부과하며 ‘해방의 날’을 선언했다.
관세전쟁이 진정 양상으로 흘러가는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는 달러 약세를 유도하며 수출 경쟁력을 높이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이는 미국뿐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환율을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다. “달러가 비싸면 미국 제품이 비싸지고, 외국 제품은 싸진다. 이건 불공정 무역이다.”
즉, 통화 가치를 무역 전략의 핵심 변수로 삼아 직접 개입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주요 7개국(G7)과 같은 다자간 합의의 틀을 무시하는 일방주의적 접근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금융시장을 정치의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달러가 약해야 미국이 강해진다’는 슬로건은 그의 고립주의와 일맥상통한다.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은 전 세계를 경제적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소비는 붕괴했고, 금융은 마비되고 실업률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주요국은 각자도생에 나섰다. 핵심은 ‘수출 회복’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각국이 선택한 방식은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 즉 환율을 무기화하는 수출 경쟁이었다.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금본위제를 폐기하며 자국 통화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추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국가 간 ‘환율 덤핑’ 경쟁이 벌어지면서 상호보복적 관세가 뒤따랐고, 세계무역은 5년간 60% 이상 감소했다. 특히 1930년 미국이 도입한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은 수입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며 글로벌 무역 시스템을 사실상 붕괴시켰다.
이 시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세계 공조였다. 국제통화기구(IMF) 같은 글로벌 협력체는 아직 없던 시기였고, 각국은 자국 시장 보호와 수출 확대를 위해 극단적 조치를 쏟아냈다. 그 결과, 환율전쟁은 대공황을 더욱 심화시키고 전간기의 국제질서를 붕괴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는 평가다. 세계 대공황 시기,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주요국들은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통화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춰 수출 경쟁에 나섰다. 하지만 이로 인해 세계무역은 60% 가까이 급감했고, 보호무역주의는 전 세계적 경기침체로 이어졌다.
반세기 뒤, 미국은 또 다른 방식으로 환율 조정을 시도한다. 1980년대 초반, 미국은 무역적자가 극심해지며 경제 전반에 구조적 불균형을 겪고 있었다. 특히 일본과 독일로부터의 수입이 급증하면서 제조업 기반이 약화됐고, 이에 미국은 자국 통화가 지나치게 강세라는 인식하에 ‘공동 절하’를 추진했다.
1985년 9월 22일, 미국·일본·독일·프랑스·영국 등 G5 주요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은 뉴욕 플라자 호텔에 모여 ‘플라자합의’를 체결했다. 핵심은 달러화의 질서 있는 절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 엔화는 단기간에 달러 대비 50% 이상 절상됐고, 마르크 역시 크게 강세를 기록했다.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무역수지 개선에 기여했지만, 일본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나타났다. 엔화 급등은 수출기업들의 이익 감소를 초래했고, 이를 상쇄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대응은 대규모 유동성 공급과 금리인하였다. 이 조치는 곧바로 부동산 및 주식시장 버블을 자극했고, 1991년 ‘거품 붕괴’ 이후 일본은 30년에 걸친 디플레이션과 장기불황,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실제로는 30년)’에 빠지게 된다.
플라자합의는 달러 중심의 글로벌 환율 질서가 미국 정치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자, ‘강요된 환율조정’이 타국 경제에 어떤 후폭풍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남아 있다. 한국은 이 시기 수출호황을 누렸지만, 급속한 외화 노출 확대는 훗날 1997년 외환위기의 취약 구조로 이어졌다.
21세기 들어 가장 치열했던 환율 갈등은 단연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벌어진 ‘위안화 전쟁’이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중국은 ‘수출을 통한 고속 성장’을 이어가기 위해 위안화를 의도적으로 저평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미국은 2005년 이후 거의 매년 재무부 환율보고서를 통해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경고했으며, 도널드 트럼프는 대선 유세와 집권 초기부터 이를 정면 이슈로 제기했다. 결국 2019년 8월,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을 공식적으로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했다. 이는 미국이 1994년 이후 25년 만에 처음으로 특정 국가에 대해 취한 조치였다.
물론 2020년 1월 1단계 미·중 무역합의가 체결되면서 미국은 중국에 대한 환율조작국 지정을 철회했지만, 이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통화정책이 단순한 금융 조정 수단이 아니라 정치·외교의 무기로 활용된다는 점이었다. 중국은 미국의 환율 압박에 맞서 중앙은행 개입과 위안화 바스켓 관리체계 도입 등 ‘국가 주도형 유연성 강화’ 전략으로 대응했으며, 이는 후일 위안화의 국제화 전략으로까지 확장됐다. 한편 미국은 이 사안에서 WTO나 IMF 같은 다자 틀보다는 양자 대결구도를 선호하며 통화정책의 지정학화를 선도했다.
바이든 정부는 동맹과의 조율, 국제기구 중심의 질서 복원을 추구했다. 환율이나 무역 문제에 있어서도 G20, WTO 등 국제 룰을 중시했으며, 환율에 대한 직접 개입은 자제했다.반면 트럼프 정부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통화정책까지 무역 전략의 일부로 활용했다. 그는 연준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금리를 낮춰야 한다며 독립성을 공격한 바 있다. 이러한 접근은 일시적 효과는 있을 수 있지만, 국제 신뢰도 저하와 금융시장 불안을 부추길 수 있다. 트럼프발 환율전쟁이 본격화되면서 한국엔 그 어느 때보다 정교하고 다층적인 외환 대응전략이 요구된다. 한국은 소규모 개방경제로서 환율에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다. 대외 변수에 따라 수출 경쟁력, 투자유입, 외채 상환능력 등 실물과 금융 모든 측면에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한국은 2025년 기준 약 4280억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액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세계 9위 규모(IMF 기준)로 겉보기에 충분해 보이지만 대외 단기채무가 약 1350억 달러 수준임을 감안하면 ‘초과 안전지대’라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외환보유액 중 상당 부분이 미국 국채나 유로화 채권 등 외화표시 자산으로 구성돼 있어, 실제 급변하는 상황에서 유동성 활용 가능성에 한계가 존재한다.
2020년 코로나19 금융위기 당시 한국은 미국 연준과 최대 600억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해 급락하던 원화 환율을 안정시킨 바 있다. 이는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 원화의 신뢰도를 회복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하지만 현재 해당 스와프는 종료된 상태이며, 아직 재개가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처럼 미국이 달러 약세를 유도하며 통화정책에 변동성이 커질 경우, 미 연준과의 스와프라인 재개는 외환시장의 가장 강력한 방파제가 될 수 있다. 동시에 한국은 한·중·일 3국 간의 위안화·엔화 스와프, ASEAN+3와의 다자 스와프 등 대체 통화 네트워크도 확대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9개국과 양자 통화스와프 협정을 체결하고 있으며 이를 보다 안정적인 외환 네트워크로 구조화할 필요가 있다. 동남아 국가들과 ‘무역결제 중심’ 스와프를 확대하여 달러 이외 결제통화를 활성화하는 전략도 유효하다.
달러 약세는 한국 입장에서 원화 강세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수입물가 하락과 소비자 물가 안정에는 기여할 수 있지만, 동시에 수출기업의 채산성 악화로 산업 경기 하방압력을 유도할 수 있다.
한국은행은 현재 기준금리를 3.25% 수준에서 유지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하반기 중 금리 인하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환율 변동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금리 인하가 원화 약세를 자극하고 외자 유출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의 통화정책과 기획재정부의 외환정책 간 조율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또한 재정 측면에서는 원화강세로 피해를 입는 수출기업에 대한 긴급환 리스크 대응자금 마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의 적극적 역할이 강조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과거 한국을 환율관찰대상국으로 지정하고 수차례 보고서를 통해 “한국은 시장에 대한 개입이 잦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만약 트럼프가 다시 집권하게 될 경우, 한국의 외환정책 자체가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감시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한국은 다자 협의체(G20, IMF, ASEAN+3)를 통해 자국 환율정책의 투명성과 합리성을 설명하고 ‘환율조작국’ 낙인 회피를 위한 외교적 설득 전략을 병행해야 한다. 동시에 무역흑자를 줄이기 위한 ‘전략적 수입 확대’, 해외직접투자 확대 등도 환율문제에서 유리한 논리를 확보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한국이 트럼프발 환율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히 환율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금융정책, 산업전략, 외교역량을 통합한 ‘3중 방어체계’를 구축해야 하며, 이는 국가의 외환주권과 경제안보를 지키는 핵심이다.
환율은 더 이상 숫자의 문제가 아닐 공산이 커지고 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환율문제는 국가의 명운을 가를 지렛대이자, 수출기업과 서민경제 모두에 직결된 생존 변수다”라며 “한국은 이미 여러 위기를 통해 그 중요성을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는 만큼 이번에도 그 교훈이 되살아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