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7일. 그룹 방탄소년단(BTS) 뷔부터 박찬욱 감독, 배우 윤여정까지 각계 유명 인사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이 찾은 곳은 화려한 영화 시사회장이 아니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이들은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서울’을 관람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 공연은 티켓 예매 시작과 동시에 매진됐고,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에서는 정가의 몇 배에 거래됐다. 특히 방탄소년단 멤버 뷔는 공연 전부터 여러 차례 조성진에 대한 팬심을 SNS와 라이브 방송을 통해 밝혀왔다.
그는 과거 팬들과의 V라이브에서 “요즘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듣는다”며 “조성진의 연주 영상을 반복해 본다”고 말한 바 있다. 이날 공연장에서도 뷔는 박찬욱 감독과 함께 관람석에 앉아 세 시간 넘게 이어진 연주를 진지하게 감상했다. 배우 윤여정 역시 조성진의 오랜 팬으로, 여러 인터뷰에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왔다. 윤여정은 “조성진은 한 곡을 연주하는 데 40분이 걸려도 흐트러짐이 없다”며 “그런 경지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을지 생각하면 감탄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이날 조성진은 리스트의 ‘순례의 해’ 중 ‘에스테장의 분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5번 ‘전원’, 버르토크의 ‘야외에서’, 그리고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3번까지 방대한 레퍼토리를 소화하며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조성진과 임윤찬으로 대표되는 젊은 클래식 스타들의 등장은 국내 클래식계에 적잖은 변화를 불러왔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클래식 공연은 중장년층이 주관객이었고, 예매율은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등 대표 공연장 몇 곳에 한정돼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공연장을 찾는 관객층은 눈에 띄게 젊어졌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국내 클래식 공연 건수는 2022년 6920건에서 지난해 8109건으로 늘었고, 매출은 같은 기간 678억원에서 1010억원으로 크게 뛰었다. 그 중심에는 20~30대 관객이 있다. 예술의전당 관계자에 따르면 올해 조성진 리사이틀의 온라인 예매자는 절반 이상이 2030 세대였다.
젊은 팬들이 늘자 공연장을 둘러싼 풍경도 바뀌었다. 아이돌 팬덤의 상징과 같던 ‘N차 관람’과 ‘직캠’ 문화가 클래식 무대에도 스며든 것이다. 실제로 조성진의 이번 투어를 모든 도시에서 관람하는 이른바 ‘올클’ 인증은 SNS에 수천 건 이상 올라왔다. 관객들은 연주자에게 주는 꽃다발 대신 공연 프로그램북과 티켓, 굿즈 사진을 SNS에 공유하며 ‘덕질’을 즐긴다. 몇몇 굿즈는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웃돈이 붙을 만큼 인기가 높다.
조성진뿐만 아니라 임윤찬 역시 20대 관객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이후 국내외 무대에서 연이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임윤찬은 지난 4월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상주 연주자로 참여했는데, 이때도 티켓은 개막과 동시에 매진됐다. 특히 유튜브나 SNS를 통해 그의 연주 영상이 바이럴되면서 ‘입덕’한 팬들이 공연장으로 몰려드는 현상은 이제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왜 MZ세대는 지금 클래식에 열광할까. 전문가들은 첫째로 디지털 피로감을 꼽는다. 짧고 자극적인 영상이 넘치는 SNS 환경에서 긴 호흡으로 몰입할 수 있는 음악은 일종의 ‘마음 챙김’ 도구가 된다. 실제로 ‘공연장에서 스마트폰을 꺼두고 온전히 음악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는 관객 후기는 무대마다 쉽게 찾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진입장벽이 낮아졌다는 점이다. 과거 클래식은 어렵고 무겁다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지금은 유튜브 채널과 플레이리스트, 밈 영상 덕분에 누구나 쉽고 가볍게 접할 수 있는 콘텐츠로 바뀌었다. ‘클래식 좀 들어라’ ‘클래식타벅스’ 같은 유튜브 채널은 해설과 유머를 곁들여 복잡한 음악 이론을 친근하게 풀어준다. 2024년 기준 이 두 채널의 구독자 수는 각각 12만 명과 27만 명에 달하며, 구독자의 절반 이상이 20~30대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음악회 외에도 클래식을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된 것도 MZ세대의 관심을 붙잡는 이유다. 공연장을 찾는 대신 카페에서 클래식 LP를 듣거나, 촛불이 가득한 전시장에서 미니 콘서트를 즐기는 ‘캔들라이트 콘서트’ 같은 이벤트는 새로운 클래식 향유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최근 2년 사이 캔들라이트 공연은 세계 150개 도시에서 열렸고, 누적 관객 수는 300만 명을 돌파했다.
조성진과 임윤찬 같은 슈퍼스타 덕분에 클래식은 다시 주목받고 있지만, 이 열기가 꾸준히 이어지기 위해선 넘어야 할 과제도 있다. 여전히 무대 뒤편에서는 실내악, 고음악, 현대음악 같은 덜 알려진 장르의 공연이 객석을 채우지 못해 고전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오페라단은 무대를 올릴 비용이 없어 유망한 성악가들이 해외로 나가야 하는 현실을 토로한다. 실제로 정명훈 부산 콘서트홀 예술감독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스타 연주자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많은 관객이 오페라와 실내악 무대까지 자연스럽게 찾도록 기초 저변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접근성을 높이는 시도가 계속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세종문화회관이 선보인 ‘누구나 클래식’ 시리즈는 그 한 예다. 해설이 곁들여진 공연을 관람료 자율 선택제로 운영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단돈 1000원부터 원하는 금액을 내고 공연을 즐길 수 있어 젊은 층의 문턱을 낮췄다. 덕분에 표가 나오자마자 매진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MZ세대는 더 이상 클래식을 장년층의 고급 취미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클래식을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긴 음악의 호흡 안에서 일상의 피로를 씻는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다만 이 불씨를 오래 지키려면 스타 연주자의 열기를 넘어 다양한 연주자와 장르로 스펙트럼을 확장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다.
클래식 무대가 이제는 낡은 전통이 아닌, 세련된 취향의 상징이 되어가는 시대. 어쩌면 이게 바로 MZ세대가 만들어낸 ‘클래식힙’의 현재진행형 모습일지 모른다.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은 연일 입장 대기줄로 붐볐다. 지난해 11월 개막한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와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시 때문이다. 두 전시는 나란히 관객 기록을 갈아치웠다. 국립중앙박물관과 한국관광데이터랩의 자료에 따르면 2025년 1월 기준 한가람미술관 20대 방문 비율은 직전 3개월 대비 419% 급증하며 서울지역 급상승 핫플레이스 2위에 올랐다. 두 달여 만에 반 고흐 전시 관람객만 35만 명을 넘어섰고, 같은 기간 한가람미술관을 찾은 20~30대 비율은 전체의 약 70%에 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경우도 2024년 전체 관람객 중 20대가 41.3%, 30대까지 합하면 66% 이상을 차지했다. 예전 같으면 미술관은 주말 나들이를 나온 가족이나 중장년층의 교양 프로그램으로 인식되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요즘 전시장은 SNS를 떠도는 유명 카페나 축제 못지않게 젊은 관객으로 붐비는 ‘힙플레이스’가 됐다.
MZ세대가 미술관으로 몰려드는 이유는 분명하다. 팬데믹 이후 오프라인 문화생활의 가치는 다시 높아졌고, 대규모 록 페스티벌이나 스포츠 직관처럼 현장의 열기를 느끼는 취향이 부활했다. 동시에 빠르고 자극적인 디지털 환경에 지친 이들에게는 정적인 공간과 느린 시간이 필요했다. 예술작품 앞에서 스마트폰 알림을 잠시 꺼두고, 아무 말 없이 한 작품에 머무는 시간이 ‘내면을 돌보는 힐링 루틴’이 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사에 따르면 2020년 평균 48분이던 20대 관람 시간이 2024년에는 72분으로 늘어났다. 관람객의 체류 시간이 길어진 만큼 전시장은 단순한 포토존이 아니라, 나만의 속도로 사유를 쌓는 ‘일상 속 사적인 서재’ 역할을 한다.
젊은 관객의 발걸음을 붙잡은 또 하나의 요인은 기술이다. 요즘 전시장은 작품 옆 해설 패널 대신 QR코드와 AR 도슨트가 자연스럽게 배치된다. 복잡한 도슨트 기기를 빌리지 않아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디지털 해설이 따라온다. 덕분에 전시 입문자도 작품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게 됐다. 특히 SNS 알고리즘은 ‘취향 맞춤’ 큐레이터로 기능한다. 예전엔 포스터를 보고 직접 알아보고 예약해야 했지만, 이제는 인스타그램 피드와 틱톡 릴스가 인기 전시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달한다. 알고리즘 덕분에 한 번 전시를 찾은 관람객이 연관된 또 다른 전시를 찾아가는 ‘연쇄 방문’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미술 전시에서 중요한 것은 관람객 본인이었다. 예쁜 전시장 벽 앞에서 사진을 찍고, SNS 피드에 ‘#미술관데이트’와 함께 인증하는 것이 전시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전시장을 찾는 MZ세대는 작품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감상평과 함께 공유한다.
대학 졸업전시장 투어 문화도 같은 맥락이다. 유명 작가의 대규모 전시 못지않게 젊은 세대는 각 대학 미술대 졸업전시장도 즐겨 찾는다. 입장료는 무료, 학생 작가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소규모 굿즈 부스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일부 졸전은 SNS에 ‘올해의 숨은 보석 전시’로 입소문을 타기도 한다. 전시를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새로운 예술적 발견의 경험으로 여기는 흐름이다.
2030 세대가 미술관에 몰리자 전시장은 브랜드들의 새로운 마케팅 실험장이 됐다. 반 고흐 전시장 로비에는 스페셜티 커피 팝업이 들어섰고, 한가람미술관의 카라바조 굿즈숍은 오픈 첫날부터 줄이 길게 늘어섰다. 캔버스백, 엽서, 아크릴 키링 같은 소장용 굿즈는 빠르면 하루 만에 완판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관람객이 전시장을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카페에 들러 음료를 마시고, 굿즈를 사가는 소비 동선이 하나의 ‘문화 상품 코스’가 된 것이다.
미술관 관계자들도 변화에 발맞춘다. 한가람미술관은 젊은 관람객이 몰리면서 작품 설명문도 SNS에 바로 올리기 좋은 카드뉴스 형태로 바꿨다. 작가와 관객의 만남을 늘리기 위해 주말마다 소규모 작가 토크를 기획하거나, 온라인 인터랙티브 도슨트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도도 확산되고 있다.
다만 우려도 없지 않다. 지나친 인증 경쟁이 작품 감상을 방해하거나, 특정 인기 전시에만 관객이 몰려 신진 작가의 소규모 전시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연계 할인 ▲지역 전시 간 공동 패스 운영 ▲디지털 큐레이션 확장 등을 제안한다.
이제 미술관은 더 이상 어렵고 무거운 문화의 상징이 아니다. 바쁜 일상 속 자신을 돌아보는 ‘쉼의 플랫폼’이자, 새로운 영감을 얻고 나를 기록하는 ‘두 번째 방’이다. 전시장에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그림 앞에 서 있는 MZ세대의 뒷모습이, 지금 가장 세련된 문화 소비의 한 장면이 됐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8호 (2025년 7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