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벽두부터 한국경제는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상징적 사건이 한보철강 사태였다. 무리한 사업 확장과 부실한 기업경영으로 자금난에 처한 한보그룹이 부도 처리된 날이 1997년 1월 23일. 채권은행단은 당시 정태수 회장에게 주식포기각서를 요구했지만 정 회장은 믿는 구석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끝까지 버티다 결국 기업이 공중 분해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YS의 차남인 김현철 씨와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권노갑 씨 등 정계에까지 불똥이 튀었다.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도 규정한 한보 사태가 IMF 외환위기를 부른 결정적 도화선이었다.
이 사건은 YS 경제팀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비전코리아 프로젝트를 이제 막 출범시킨 매일경제로서는 가장 든든한 후원군을 잃었다. 이석채 경제수석이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그게 2월 28일. 후임엔 경제기획원차관보를 지낸 김인호 씨가 임명됐다. 그리고 뒤이은 개각. 3월 5일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한승수에서 강경식으로 교체된다. 비전코리아 추진팀은 프로젝트가 계획대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강 부총리와 김 수석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보고 프로젝트의 의미와 중요성, 그리고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정부 예산이 들어가는 만큼 주무장관의 협조는 무엇보다도 긴요했다. 강 부총리는 다행히 국가컨설팅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인물이었다. 그가 관료 생활을 접고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던 시절 21세기를 위한 신국가경영의 논리와 21개의 액션플랜 등을 발표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그 시절 매일경제가 그를 인터뷰하면서 가까워진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강 부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1주일 후인 3월 12일 신라호텔에서 마침 프로젝트를 킥오프(kick-off)하는 제1차 운영위원회가 개최되니 그날 오셔서 발표 내용을 들어 보는 게 좋겠다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물론 취임 1주일 되는 날 일정을 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매일경제는 이 국가 프로젝트의 이름을 ‘비전코리아’로 정했다. 부제는 ‘21세기를 실천한다’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추진위원장을 모시는 작업이었다. 우리는 재계에서 명망이 높고 이 프로젝트에 재정적 후원도 아끼지 않으신 김상하 대한상공회의소 의장을 위원장으로 모셨다. 그리고 부즈앨런에서 내는 컨설팅 보고서를 최종 추인하는 운영위원회(Steering Committee)를 구성했다. 총 9명이었다.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사장을 비롯해 ▲박웅서 삼성경제연구소 사장 ▲배순훈 대우전자 회장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김태연 전 노동부 차관 ▲박원훈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 ▲서정욱 SK텔레콤 사장 ▲엄봉성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조정실장 ▲서상목 국회의원 등 총 9명이었다. 위원들의 총의를 모아 운영위원장은 박웅서 사장이 맡았다.
운영위원회는 단순한 위원회가 아니었다. 부즈앨런이 주도해 한국경제를 분석하고 전략을 수립하지만 그 분석 방법이 타당한지, 실천 방안은 현실에 맞는지 등을 단계별로 검증하는 건 운영위원회의 몫이었다. 보고서가 나오기까지 총 4번의 운영위원회가 열렸다. 3월 12일 1차 운영위원회에서는 한국경제의 현실 인식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이뤄졌다. 부즈앨런은 기존의 연구자료 등을 취합해 기초자료로 활용하겠다고 보고했는데 운영위원회가 그 타당성을 검토했다. 2차 회의는 4월 24일. 이 자리에서는 경제위기의 요인 분석과 21세기 비전의 핵심 요소를 추출해 어떤 실천 어젠다를 제시해야 할지에 대한 토론이 이뤄졌다. 3차 회의는 5월 29일. 이 자리에서는 실천을 위한 전략 개발과 새로운 사회계약의 필요성이 도출됐다. 그리고 마지막이 된 4차 운영위원회는 장소를 제주도로 옮겨 1박 2일로 진행됐다. 그 바쁜 사람들이 휴가를 내거나 일정을 빼서 제주도 파라다이스 호텔에 모였다. 그야말로 끝장토론. 보고서의 골격은 사실상 여기서 정해졌다.
강영철 부장을 비롯한 4명의 매일경제 기자들은 거의 밤샘하여 이틀간의 회의 결과를 정리하고 부즈앨런 팀과 마무리 정리에 들어갔다. 여기서 분석의 틀 하나하나, 그리고 어젠다 하나하나에 대해 이견이 생기면 본격적인 보고서 작성 작업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이틀의 운영위원회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려면 숙소가 있는 서귀포에서 렌터카를 몰고 제주공항까지 가서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지치고 졸린 기색을 눈치챘는지 장대환 사장이 “운전은 내가 할게” 하고 차를 몰았다. 뒤에서 코 고는 소리가 났다.
다시 돌아가 1차 운영위원회가 열린 1997년 3월 12일. 이날 매일경제는 공식적으로 ‘비전코리아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엠블럼을 공개했다. 강 부장은 그날 매일경제신문 1면 톱 기사에 이렇게 첫 문장을 썼다. “행동하지 않는 국민에겐 미래가 없다”라고. 프로젝트의 성격은 바람직한 미래 건설을 위해 바로 오늘 우리 한국인들이 무엇을 할지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추진위원회는 “국내외 지적 역량을 총동원해 전 세계적인 시야에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국가전략을 마련하는 국가경영컨설팅을 목적으로 출범했다”라고 분명히 했다. 김상하 위원장은 “우리는 지나치게 과거에 얽매여 있었다”라며 “이제는 미래에 대한 국체적인 실천 프로그램을 마련, 국민 모두가 이를 실행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1차 운영위원회가 열린 신라호텔에 깜짝 손님이 찾아왔는데 그가 바로 강경식 부총리였다. 미리 귀띔은 했지만 설마 이른 아침에 과천 청사로 가지 않고 시내 장충동까지 올 줄은 몰랐다. 취임한 지 1주일 만에 처음으로 외부 언론사 행사에 참여한 그는 “내가 1주일 전 전화로 설명을 들어 보고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정말 국가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는 것 같아 직접 와 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강 부총리는 비전코리아 보고서가 발표된 1997년 10월 31일에도 헤드테이블을 지켰다. 그가 외환위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 20일 전이었다. 매일경제 팀은 3월 행사를 마치고 신문사로 돌아와 4층 편집국 옆 사무실을 하나 마련해 현판식을 가졌다. 드디어 비전코리아 프로젝트가 출범한 것이다.
매일경제신문의 비전코리아 프로젝트는 단순히 국가경영과 관련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한 대국민 통합과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실천 방안을 마련하자는 게 보다 상위의 개념이었다. 일종의 범국민 실천 운동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물론 보고서다. 울림이 있어야 했다. 정확한 현실 진단과 국민이 공감할 만한 액션플랜을 제시해야 했다. 그리고 보고서 작업과는 별도로 ‘경제 살리기’에 대국민 동참을 유도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매일경제신문이 고안해 낸 아이디어가 ‘국민걷기대회’였다.
걷기 좋은 봄날을 택했다. 1997년 5월31일 토요일이었다. 오후 3시 평화의 광장에서 모여 오른편으로 돌아 공원을 일주하는 약 3km의 코스. 이런 일을 할 때마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꼭 나타난다. 기자의 세계가 특히 그렇다. 기자가 기사나 잘 쓰면 되지 무슨 이런 행사를 하느냐는 냉소적 목소리가 꽤 있었다. 편집국에서 누군가 팀원들 들으라고 “걷는다고 경제가 살아나느냐”라고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행사 준비 때문에 지치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강 부장이 화를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그러면 걷지 않으면 경제가 살아나느냐”고.
비전코리아팀은 걷는 구간을 4개 권역으로 나누어 각각의 권역에 테마 전시관을 조성했다. 1구간은 ‘함께하는 한국인’. 세계 속을 찾아 나서는 출발의 의미로 전통의상을 갖춘 길놀이 패들의 흥겨운 가락에 맞춰 걷기를 시작한다. 걸으면서 마주치게 되는 제1 테마 전시관은 현재의 경제위기 진단. 제목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미국보다 6배나 높은 임금상승률, 일본보다 4배나 되는 금리 수준, 선진국 평균의 2배나 되는 물류비용 등. 제2 테마는 ‘우리의 선택… 도전이냐 좌절이냐’. 세계 각국의 사례를 전시했다. 달러 고갈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멕시코, 한때 세계 6대 강국에서 포퓰리즘으로 좌초한 아르헨티나. 그런가 하면 금융빅뱅에 성공한 영국과 과감한 규제 개혁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뉴질랜드의 사례도 담았다. 이 구간을 지날 때 나오는 음악은 마돈나가 주연한 영화 <에비타>의 주제곡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라(Don’t Cry for Me Argentina)’였다.
제3 테마는 ‘희망의 나라로’. 대한민국의 21세기 비전을 제시한 전시관이었다. 초등학생들이 ‘내가 살고 싶은 나라’라는 주제로 그린 그림과 참가자들에게 공모한 캐치프레이즈 들을 걸었다. 이 같은 국민의 국가비전과 함께 대선주자들의 ‘내가 만들고 싶어 하는 나라’를 소개했다. 제4 테마는 어찌 보면 광고에서 나오는 ‘티저(teaser)’ 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우리가 ‘짠’ 하고 내놓을 비전코리아 보고서의 맛보기 같은 것인데.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골격이 마련되지는 않았다. 다만, 그동안 비전코리아팀과 부즈앨런 연구팀이 숱하게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다 보니 이 정도 맛보기는 보여줘도 되겠다는 선에서 내용을 일부 공개했다. 이때 비전코리아 전략으로 제시한 핵심 두 가지는 ①한국을 세계적인 기술 경영 마케팅 노하우 센터로 만들자는 것과 ②자유시장원리였다. 그러면서 정부, 기업, 개인 모두 집단이기주의에서 벗어나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다른사람의 이익과 조화를 추구하자는 신사회계약(New Social Contract)을 맺자는 어젠다였다.
대회는 대성공이었다. 국민 2만여 명이 참여해 경제 살리기에 한마음으로 뭉쳤다. 정부 측에서는 고건 국무총리와 강경식 경제부총리 등이, 정치인으로는 당시 국민회의 총재인 김대중 전 대통령, 신한국당의 이홍구, 이수성 고문과 이한동, 최병렬 의원 등이, 자민련에선 박철언 부총재가 같이했다. 이인제 경기도지사도 주말에 서울까지 와서 뜻을 모았다.
비전코리아 팀원들 사이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화가 있다. 그건 인원 동원이었다. 자발적 걷기 참가자들로 이뤄지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래서는 전 국민의 주목을 받을 수는 없었다. 유명 인사들 참석은 기본이고 일단 인원수가 많아야 했다. 인력 동원은 편집국 각 부서 기자들이 출입처에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살리자는 뜻깊은 행사에 직원들이 좀 단체로 참가해 달라는 요청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우리는 “너무 강압적으로 인력 동원하지는 말자. 주말에 나들이 겸 나오는 분들도 많을 거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추 파악한 인원은 5000명 정도. 이게 준비팀의 추산이었다.
행사 3일 전 이정근 편집담당 이사가 현장 답사차 올림픽공원에 왔다. 대회 개회 선언을 하는 장소인 평화의 공원. 비전코리아팀은 현장 무대와 4구간으로 나눠진 테마 부스를 점검하고 있었다. 이 이사가 물었다.
“이번 토요일 행사에 얼마나 오느냐”라고.
강 부장은 나름대로 추산한 인원을 얘기했다. 그리고 그 정도면 행사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날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때 불벼락이 떨어진다.
“이 평화의 광장에 5000명 모이면, 그것도 3시 정각에 다 온다고 가정하더라도 어느 정도 채워질 것 같냐? 양팔 간격으로 정리해 서더라도 5000명은 어림없다. 간에 기별도 안 간다. 최소 2만 명은 와야 한다. 다시 해.”
이제 남은 건 이틀. 초비상 사태다. 우리는 내용만 챙기고 인력은 편집국 각 부서에서 담당하는 걸로 역할 분담을 했는데 이제 비전코리아팀 전원이 인력 동원으로 유턴해야만 했다. 이 이사는 ROTC 출신으로 전방부대장 출신. 그는 이 정도 규모의 연병장이면 몇 명의 병력이 집합하는지를 한눈에 파악한 것이다.
매일경제가 걷기 대회에 초청한 인사 중 소설가 이호철 씨가 있었다. 그는 초청받았을 때 무척이나 시니컬했다. 그걸 나중에 기고문을 통해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드넓은 올림픽공원 안을 3km쯤 걸어서 경제가 살아난 다면야 백번 천번도 걷을 수 있겠다마는…. ‘아서라, 아서. 웃긴다, 웃겨. 지금이 어느 판국인데…’ 이런 생각부터 굴뚝같았다. 하루 전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한 것 갖고 여야가 아옹다옹하는 판에 경제 살리기 국민걷기대회라고. 멀쩡한 신문사는 또 ‘갑자기 왜 그러지’ 싶었다.”
그런 그가 한 바퀴 돌고 나서 한 말.
“요즘 재봉틀이 많이 팔리고, 각종 수선가게들이 다시 여기저기 생겨난다던가. 아무려면 그게 정상인 것이다. 우리 경제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 경제는 병적으로 지나치게 부풀려진 것이 아닐까.”
그렇다. 우리는 국민의 그런 깨달음을 원했던 것이다. 이호철 씨는 기자에게 “기막힌 녹음 아래 하루하루의 삶을 다시 챙겨 볼 기회를 가져서 더없이 좋았다”라며 극적 반전의 코멘트를 던졌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주필]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6호 (2026년 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