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넌트>는 묘한 영화입니다. 회색곰의 습격으로 전신이 찢긴 한 남자가, 죽을힘을 다해 살아난 끝에 자신을 배신한 일행을 찾아 복수하는 이야기. 그러나 이 작품은 평범한 복수극 너머에서, 그 이상의 무언가가 은밀히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가 저 뿐일까요. 개인적 정의(正義)를 실행하기 위해 복수를 집행하는 한 남자의 옛 이야기로 일축하기엔 작품 어딘가에 더 깊은 비밀이 숨겨졌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레버넌트>는, 외교관이자 소설가인 마이클 푼케의 동명 소설 <레버넌트>를 원작 삼은 작품입니다. 원작소설에 없던 신이 영화에 여럿 삽입됐고, 두 작품은 결말도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데 ‘복수의 서사’라는 구조는 동일합니다.
최근 소설 <레버넌트>와 영화 <레버넌트>를 번갈아가며 세밀하게 살폈습니다. 감히 해석을 획일화할 순 없겠으나 한동안의 생각 끝에 이런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레버넌트>는 ‘신이 사라진 시대의 종교적 작품’이란 결론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200년 전의 미국 서부개척 시대, 장총을 든 모피 사냥꾼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짐승 가죽을 옮겨 나르는 일을 하던 중 거대한 회색곰을 만나 사지가 찢겨나가는 극심한 부상을 당합니다. 비정한 동료 피츠제럴드(톰 하디)는 원주민족의 습격으로부터 모두가 생존하려면 죽어가는 글래스를 이곳에 두고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주장합니다. 팀을 인솔하는 상관은 피츠제럴드의 냉정한 조언을 거절합니다. 글래스의 아들 호크도 아버지 곁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험준한 산세 탓에 팀의 신속한 이동이 불가능해지자 상관은 피츠제럴드의 조언을 수용하기로 결정합니다. 다만 글래스를 그 자리에서 죽게 만드는 대신 그의 임종(자연사)을 지켜주기로 약속합니다. 피츠제럴드는 회사로부터 ‘300달러’의 금전적 보상을 받기로 약속을 받고 글래스를 지키다 그가 사망하면 팀에 합류하기로 하는데, 피츠제럴드는 약속과 달리 성가신 풋내기 호크를 먼저 살해하고, 글래스도 산 채로 파묻은 채 떠나버립니다.
하지만 삶이란 늘 그렇듯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지요. 글래스의 숨은 끊어지지 않았고 그는 전신 부상과 썩어가는 피부, 원주민의 위협, 배고픔과 추위란 극한 조건을 이겨내 결국 몸을 회복합니다. 살아남아 동료들의 진지에 도착한 글래스는 피츠제럴드를 향한 복수를 감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레버넌트>는 ‘피츠제럴드를 향한 글래스의 복수극’ 이상의 감정을 관객에게 건네줍니다. 왜일까요.
일단 글래스의 복수 여정은, 그가 회색곰의 습격을 받은 이후로부터 브라조 진지, 탤벗 진지, 유니언 진지, 빅혼 진지를 거쳐 결국 앳킨슨 진지에 도착하는 여정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원작소설 <레버넌트>는 1823~1824년 벌어졌던 실화에 기대는데, 글래스가 당시 이동했던 거리는 약 480㎞였다고 역사는 기록합니다.
여기서 잠시, 이 영화의 제목인 단어 ‘revenant’를 사유해볼까요.
이 단어의 뜻은, 영화 <레버넌트>의 부제처럼 ‘죽음에서 돌아온 자’입니다. 신화적으로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무덤에서 일어난 자’를 뜻한다고도 합니다. 사망한 뒤 스스로 부활한 자. 죽음의 복도를 되돌아 건너와 남아 있던 사람들을 공포(이를테면 심판)로 밀어넣는 자. 우리가 기억하기로 인류사에서 이런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바로 성서 속 예수입니다.
글래스가 죽음을 이겨내며 살아 돌아왔던 ‘480㎞의 협곡’은 종교적으로는 예수가 시험을 당했던 광야와 등가를 이룹니다. 글래스의 피부를 찢어버린 회색곰의 ‘15㎝ 발톱’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이고, 피츠제럴드는 성서 속에서 예수를(죽음 속으로) 팔아넘긴 가롯 유다를 은유하기도 합니다. 성경 속 가롯 유다가 받은 ‘은(銀) 30냥’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공교롭게도 <레버넌트>에서 글래스를 배반한 피츠제럴드가 받은 300달러(세켈 기준 355달러)입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요.
또 원작소설 <레버넌트>의 첫 번째 페이지의 한 문장도 이렇습니다. (피츠제럴드로부터 버림받기 직전, 글래스가 소나무 한 그루를 보는 장면을 묘사한 문장입니다.)
“수직으로 뻗은 가지들 때문인지 꼭 십자가를 보는 듯했다. 그는 묵묵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이 봄 즈음에 그 빈터에서 죽게 될 거라는 것을.”(11쪽)
글래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난의 십자가의 운명을 예감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레버넌트>의 글래스를 성서 속 예수로만 단정할 순 없는 대목도 있긴 합니다. 글래스의 유일한 가족인 아들 호크가 희생양이 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글래스는 결국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희생양이 될 아들을 뒀던 성서 속 아브라함의 위치에 서게 되니까요. <레버넌트>의 글래스가 원주민 아내와 혼인해 행복한 삶을 살아가다가 그곳에서 파멸을 겪고 절망 속에선 유랑길에 오른다는 점에선 에덴동산에서 추방됐던 <창세기>의 아담을, 또 그가 모든 가족을 잃고 자신마저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는다는 점에선 <욥기>의 욥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뿐인가요. 글래스가 숨이 끊어진 말을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밤중의 강추위를 견디는 장면이 영화 <레버넌트>에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야 했던, 하지만 다시 그 속에서 걸어나왔던 <요나서>의 요나와도 유관합니다. 글래스와 동료들을 두 차례 공격하는 아리카라 족은 이민족에 다름 아니며, 글래스에게 죽은 버팔로의 고깃덩이를 던져주고 그를 치료하는 원주민 이방인은 성서 속 선한 사마리아인(누가복음 10장 25~37절)을 연상시킵니다.
이게 정말로 우연일까요. 글래스가 사투를 벌이는 과정은 따라서 성서 속에서 고난을 겪은 인물들의 현대적 변용의 결과가 아닐까요. 글래스가 흘린 피는 단지 한 인간의 피가 아니라, 그가 정의를 집행하기 위해 흘렸던 피이기도 합니다. 그는 신을 만나기 위해 피를 흘려야 했던 걸까요. “글래스는 가방을 끌어와 곰의 발톱을 꺼냈다. 발톱 끝에는 아직도 마른 피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피였다. (중략)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발톱을 목에 건 그는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부터 이건 내 행운의 부적이야.’”(135쪽)
“신은 이런 서부의 광활한 평원에 살고 있을 게 분명했다.”(251쪽)
무신론자가 다수인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성서 속 예수를 실재가 아닌 신화적 인물, 전승되는 역사 속 가상인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명백하게도 글래스는 저 멀리 2000년 전에 살았던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고작 200년 전의 실존인물입니다. <레버넌트>가 실화에 기반한 역사소설(책의 분류는 정확히는 논픽션)이란 점에서 <레버넌트>의 깊은 아우라가 발생했던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영화 <레버넌트>로 돌아가봅니다. 글래스는 피츠제럴드와 결국 조우합니다. 그는 원수를 내리쳐 살해할 ‘기회’를 잡습니다.
그러나 글래스는 피츠제럴드의 숨통을 끊지 않고 마침 길을 지나던 원주민 부족의 수장에게 피츠제럴드의 생사를 맡깁니다. 그때, 글래스는 이런 말을 납깁니다. “복수는 내 손에 달린 일이 아냐. 신의 일이지.“
반면, 소설 <레버넌트>에선 피츠제럴드의 최후가 다릅니다. 글래스는 복수에 실패합니다. 글래스가 뒤쫓아갔을 때, 피츠제럴드는 글래스의 생존 소식을 듣고 도망친 뒤 이등병 신분으로 군대에 입대한 상태였습니다. 피츠제럴드가 군인 신분이었기에 사적 복수는 허용될 수 없었고, 피츠제럴드는 군사법정에 회부됩니다. 법정에서 ‘살인자’ 피츠제럴드를 고발하는 글래스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피츠제럴드는 죽임은커녕 고작 ‘감봉 2개월’의 처벌만 받았습니다. 영화와 달리 소설에선 ‘신의 뜻’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복수는 신의 일“이란 영화 속 글래스의 메시지는, 소설 <레버넌트>의 첫 장에 인용돼 있는 성경구절과‘만’ 유관합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니라.“(로마서 12장 19절).
그런 점에서 보자면, 소설 <레버넌트>에서 복수는 미완성이며, 영화 <레버넌트>에서만 복수가 ‘신의 뜻’에 따라 집행됐습니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소설 <레버넌트>에선 이뤄지지 않았던 신의 의지를 적극 구현하려던 게 아닐까요.
살아가다 보면 ‘정의의 균형’으로서의 복수를 이루려는 욕망이 꿈틀대곤 합니다. 그런 감정을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 때, 이 복수는 인간의 일일까요 혹은 신만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일까요. <레버넌트>는 바로 애통한 원한의 감정을 우리에게 묻습니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