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⑲ 에곤 실레가 사랑했던 ‘보헤미아의 숲’ 체코 예술의 도시 체스키크룸로프
입력 : 2020.08.03 15:32:45
수정 : 2020.08.04 11:26:42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표현주의 작가 에곤 실레는 뇌쇄적인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이다. 16세 때 빈 미술학교에 들어가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았지만, 독특한 그림을 그릴 때마다 선생님으로부터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말하지도 말라”라는 등의 모욕적인 말을 듣자,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제도권 밖으로 뛰쳐나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 새로운 기법과 표현 등을 찾기 위해 어린 시절에 감수성을 키웠던 어머니의 고향, 체스키크룸로프를 찾았다.
체코의 남부에 있는 이곳은 아름다운 자연과 유구한 문화유산이 켜켜이 쌓여 있는 예술의 도시이다. 블타바강을 끼고 있는 인구 1만5000여 명의 체스키크룸로프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253년, 비테크 가문이 절벽 위에 성을 쌓으면서부터이다. 이 가문은 오스트리아와 독일 바이에른주의 이주민들을 모아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곳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후손이 끊기자, 친척인 로젠베르크 가문에 도시를 물려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체스키크룸로프가 전성기를 맞이한 때는, 바로 로젠베르크 가문이 이 도시를 300여 년 동안 다스리면서이다.
100여 년 전, 작은 도시 체스키크룸로프에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던 에곤 실레. 그는 스승이었던 구스타브 클림트의 모델, 발리 노이첼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에서 몇 년 동안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 세계를 찾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이 도시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그는, 1910년 자신의 절친한 친구 안톤 페치카에 보낸 편지에서 체스키크룸로프를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보헤미아의 숲으로 가고 싶다. 그곳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찬찬히 바라보며, 어둑한 곳에서 입에 물을 머금고 하늘이 내려준 천연의 공기를 마시며 이끼 낀 나무를 바라본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어린 자작나무 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무 사이로 비치는 볕을 쬐며 푸른빛과 초록빛에 물든 계곡의 차분한 오후를 즐기고 싶다.”
예술의 도시로 들어가는 관문인 기차역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기차에서 내려 비탈진 길을 따라 20여 분 걸어가면 드디어 한 폭의 그림 같은 도시의 입구가 드러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은 도시의 상징 체스키크룸로프성이다. 이 성에서 에곤 실레는 발리와 함께 산책하고, 사색도 즐기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성 위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풍경은 실레의 그림 속에도 자주 등장한다. 도시에 운치를 더하는 블타바강, 울긋불긋한 지붕, 고풍스러운 골목길,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 거기에 짙은 녹음을 자랑하는 보헤미아 숲까지.
에곤 실레
성을 내려와 고색창연한 중세풍의 도시로 한 발짝 들어서면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실레 그림에 등장하는 오래된 집들과 카페 그리고 투박한 돌길이 눈에 들어온다.이리저리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하얀색으로 칠해진 ‘에곤 실레 미술관’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명성에 비교해 그다지 크지 않지만, 실레의 꿈과 희망이 오롯이 스민 예술의 현장이다.
미술관에는 80여 점의 작품과 친구에게 쓴 편지, 그리고 가구 몇 점이 전시되어 있다. 계단을 따라 2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커다란 거울이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가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했던 거울이자, 작업실을 옮길 때마다 가지고 다녔던 애장품이다. 거울을 뚫어지게 쳐다보면 예술로 인해 방황하고 몸부림치던 실레의 모습과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발리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간다. 거울 안에는 고독감에 휩싸인 실레가 발리를 모델로 정열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 등 다양한 그의 삶이 현실처럼 비친다. 하얀 천장과 기둥이 인상적인 전시실 내부를 돌아보는 순간 ‘겨울 버찌와 자화상’ 작품이 섬광처럼 눈을 스친다. 그 외에도 깡마르고 고독한 이미지의 그의 자화상들이 거울에 나타났다가 이내 그의 그림 속으로 다시 사라진다.
무릎을 들어 올린 붉은 블라우스의 발리
실레의 예술세계와 공감할 수 있는 흔적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면, 빨간 블라우스를 입은 발리의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1913년에 사랑하는 발리를 모델로 그린 ‘무릎을 들어 올린 붉은 블라우스의 발리’라는 작품이다. 큰 눈망울로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발리의 눈빛은 도저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모델로서 화가의 예술적 고뇌와 함께했던 발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실레의 성공을 지켜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녀는 구스타브 클림트의 모델이길 거부하고 실레를 따라 체스키크룸로프로 온 이유였다.
발리는 모델로서뿐만 아니라 연인으로 늘 그의 곁을 지켰다. 어쩌면 그녀는 위대한 화가 곁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에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은 외설적이지 않다. ‘무릎을 들어 올린 붉은 블라우스의 발리’에서도 그녀의 큰 눈망울에는 한 남자를 위한 헌신적인 사랑이 담겨 있다. 두 연인은 한 줌의 바람이 되어 보헤미아를 찾아왔고, 이곳에 정착해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1912)
그러나 뇌쇄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던 실레가 단골 카페 ‘핀크’에서 작품을 전시한 뒤로부터 더는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 고지식하고 성에 보수적이었던 이곳 사람들은 그의 도발적인 그림에 욕설을 퍼부었다. 또한 ‘서 있는 벌거벗은 검은 머리의 소녀’와 같은 어린 소녀를 소재로 한 그림으로 고발되어 24일 동안 구류를 살았다. 그는 옥중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그림 세계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고, 실레는 “아무리 에로틱한 작품도 그것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는 이상 외설은 아니다. 그것은 외설적인 감상자들에 의해 비로소 외설이 된다”고 주장했다. 자작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볕을 쬐며 푸른빛과 초록빛에 물든 계곡의 차분한 오후를 즐기고 싶었던 두 연인은,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온 후 헤어졌고 실레는 에디트라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18년 스페인 독감에 걸린 아내가 먼저 죽었고, 며칠 뒤 감염된 실레도 만 28세의 젊은 나이에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정처 없이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