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My Walking] 왕의 정원 거닐다 보니 근심도 잠시… 경기도 서오릉 산책길
안재형 기자
입력 : 2020.04.06 14:43:56
수정 : 2020.04.07 10:46:14
부어라 마셔라 그리고 다시 또 마셔라 부어라… 처음부터 그러자고 모인 건 아니었는데 어찌저찌하여 여차저차란 과정도 없이 그렇게 흘러갔다. 사실 모임 전 간사가 내세운 계획은 이랬다.
“2019년 송년회는 뭔가 의미 있게 보내자고. 요즘 핫한 영화도 한 편 보고 비싸서 눈으로만 마시던 와인도 한 잔 하고, 트렌디한 카페에서 커피로 마무리하는 거 어때?”
스마트폰 대화창에 엄지 척 올린 토끼 10여 마리가 ‘까똑’거린 지 일주일 뒤, 중년 남자 예닐곱이 어색하게 극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두어 시간 뒤 분위기가 달라졌다.
“백두산 폭발이라니 뭔 소린가 싶었는데 이게 실제면 어쩌나 생각해보니 아주 섬뜩하더만.”
지난해 막둥이가 태어나 3남매를 둔 친구 입에서 간담이 서늘했단 말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세상 푸념이 이어졌다.
“그러게 말이 씨가 된다고 저게 현실이면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거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잖아.”
“지갑이 얇은 건 더 벌거나 아끼면 되는 건데, 천재지변을 무슨 수로 막냐고. 마동석처럼 운이 억세게 좋은 것도 아니고….”
“하이고 영화가 그냥 영화지 별 걱정들을 다한다. 다들 가장인 거 티내는 것도 아니고….”
“… (일동 침묵) … 가서 쏘주나 한 잔 말자.”
밤 9시 반, 부슬비 내리는 12월 중순… 빠알간 거품 물고 있는 뚝배기 옆엔 바삭하게 구워진 파전이 앉았고, 맥주에 퐁당 빠진 소주는 회오리를 타고 섞여버렸다. 네댓 번 잔이 돌고 찬 기운이 사라지자 하나둘, 묻지도 않은 걱정거리가 툭툭 튀어나온다.
“대출이 어려워진다며? 전세 지겨워 살까 했더니 왜 이리 복잡하게 꼬이냐.”
“돈이 돌고 돌아 돌게 만든다. 몸이라도 건강해야지. 그래야 돌더라도 제자리 찾을 거 아냐.”
“몸이 재산이지. 회사 선배는 나이 오십에 무리하게 운동하다 관절 나갔다더라.”
영화가 어쩌고로 시작해 돈으로 넘어가 건강으로 끝날 것 같은 푸념은 금수저를 거쳐 다시 ‘내 몸’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무한반복…. “아이고, 이렇게 마셔도 몸엔 별 이상 없어야 할 텐데…”라며 송년회를 마무리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개월이나 흘렸다.
지난겨울 송년회 멤버들의 대화창은 이미 ‘코로나19’가 점령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경제가 어쩌고 천재지변이 저쩌고 궤변에 가짜뉴스까지 다양한 얘기들이 올라오지만, 마무리는 늘 ‘건강’이다. 얼마 전 간사가 남긴 코멘트엔 다시 엄지 척 올린 토끼들이 도열했다.
“신년회는 코로나가 물러간 뒤 합시다. 정성을 다해 한 해를 마무리하듯 이 시기를 버텨내시고 신년회 이후부터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생각으로 모두 존버하시길.”
▶왕릉에서 즐기는 산책
“건강한 중년으로 가기 위한 첫 걸음은 걷기예요. 돈 들이지 않고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건강법이죠. 차 놓고 걸어 다니세요.”
자주 들르는 동네의원 원장이 전한 건강법이다. 감염병 예방이 우선인 시기지만 건강을 지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역시 ‘걷기’다. 어떻게 걸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미 알고 있던 답이 새로운 이론인양 귀에 쏙 들어왔다.
“집에만 있다고 웅크리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럴수록 적당한 체중을 유지하고 무리하지 않아야죠. 일상적인 걸음보다 조금 빨리 걷는 유산소 운동이 좋은데, 등에 살짝 땀이 날 만큼 시간 내 걷는 게 중요합니다. 한적한 곳에 나만의 코스를 정해보세요. 이젠 지킬 건 지킬 나이가 됐어요.”
그러니 어쩌겠는가. 올해도 한 걸음 두 걸음 차근차근 힘차게 걷는 수밖에…. 그래서 찾은 곳이 서울에서 지척인 ‘서오릉’이다. 이곳은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왕조 왕실의 무덤이다. 입구부터 고르게 난 산책길이 고즈넉하다. 180여만㎡에 조성된 울창한 소나무 숲이 들고 내는 숨이 맑고 평안하다. 평일에도 걷는 이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 간간이 어린아이들이 무리지어 찾는 소풍 명소이기도 하다. 덕분에 숲 곳곳으로 뻗어나가는 길은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잠깐 조선 왕릉에 대해 살펴보면 왕족의 무덤은 모두 120기에 이른다. 이 가운데 능이 42기, 원이 14기, 묘가 64기다.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명칭이 다른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이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들의 무덤처럼 묘(墓)라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쪽에 있고, ‘세계 유산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당연히 서오릉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이곳엔 경릉, 창릉, 익릉, 명릉, 홍릉 등 5개의 능이 있고, 순창원, 수경원 등 2개의 원, 그리고 대빈묘가 있다.
서오릉 측에서 추천하는 관람코스는 매표소에서 명릉→역사문화관→수경원→익릉→순창원→경릉→대빈묘→홍릉→창릉으로 돌아나가는 길이다. 그대로 따라가 볼까 하다 마침 마스크 쓰고 걷기를 실천하는 이들이 걷는 쪽으로 가다보니 나름의 코스로 들어섰다. 매표소에서 수경원→익릉→순창원→서어나무길→창릉→대빈묘→경릉→순창원, 다시 매표소로 나오는 길인데, 한 바퀴 크게 돌기엔 이 방향도 나쁘지 않았다.
먼저 도착한 수경원(綏慶園)은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의 원이다. 영조와의 사이에 1남6녀를 둔 그녀는 6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개봉돼 화제를 낳은 영화 <사도>의 등장인물이다. 1899년 사도세자가 사후에 왕으로 추존되자 영빈도 추존돼 원의 이름을 수경원이라 했다. 들어서는 길 양쪽으로 쭉 뻗은 소나무가 마치 수묵화를 연상케 했다. 이러한 기운은 서오릉 어딜 가도 느낄 수 있었는데, 그만큼 보존과 관리가 뛰어났다. 익릉(翼陵)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능이요, 순창원은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원이다.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고개를 향해 오르면 소나무길과 서어나무길이 나타난다. 서쪽에 있는 나무란 의미의 서어나무길로 들어서니 소나무와 혼재된 숲길이 울창했다. 산책로의 위치에 따라 나무를 식재한 때가 달랐는데, 표지판을 보니 2000년 소나무 1000주, 1996년 소나무 500주, 2002년 소나무 910주, 1997년 소나무 300주, 물푸레나무 100주, 참나무 60주, 1999년 소나무 700주, 2007년 소나무 2600주가 관리되고 있었다. 단순히 능 한 바퀴를 도는 게 지루하지 않을까 싶지만 서어나무길과 소나무길로 들어서면 오르고 내리는 길이 이어져 트레킹에 나선 것 같다. 내리막길의 막바지에 모습을 드러낸 창릉(昌陵)은 세조의 둘째아들인 예종과 안순왕후의 능이다. 서오릉에 가장 먼저 들어선 무덤은 덕종과 소혜왕후의 능인 경릉(敬陵)이지만 덕종이 사후, 왕으로 추존되기 이전에 조성돼 당시에는 능이 아니었다. 서오릉 최초의 왕릉은 바로 이 창릉이다.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래로 내려서면 홍릉과 대빈묘, 경릉이 자리한다. 이 중 홍릉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이다. 이 능은 왕의 능침 자리가 비어있는데, 원래는 영조의 능침이었지만 영조는 동구릉의 원릉에 능을 조성했다고 한다.
느릿한 걸음으로 주변 풍광을 즐기며 걷다보면 두서너 시간 산책이 충분한 서오릉은 주변에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이 많다. 가마솥으로 맛을 낸 탕이나 참나무 숯으로 구워낸 갈비가 유명한데, 어느 곳에 들어가도 평균 이상의 맛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