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명화극장] 1차 세계대전의 촘촘한 에피소드… 몸으로 찌르고 때리는 전쟁의 참혹함 <1917>
입력 : 2020.04.03 14:48:34
수정 : 2020.04.03 14:48:57
영화 제목 <1917>만으로는 이 작품이 무엇에 대한 얘기인가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1917년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2차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켜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던 해이기도 했다. 그건 세계가 난리통이었던 세상사의 어부지리이기도 했는데, 다른 나라들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정신 줄을 놓고 있었던 때였기 때문이다. 영국 연합군과 싸우던 독일군은 1914년 전쟁 발발 이후 서부전선에서 일명 참호전이라 불리는 전술로 유럽 전선을 교착시킨 상태였다. 양 진영 모두 지칠 대로 지쳤고 조만간 양단간에 결론을 봐야 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1917년 가장 참혹했던 최전선의 전투 과정을 그린 얘기이다.
▶기생충과 마지막까지 자웅 겨뤄
<1917>은 소문대로라면 매우 장대한 영화 같고(지난 2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의 <기생충>과 마지막까지 자웅을 겨뤘고 감독상 수상이 마지막까지 유력했었다.), 또 촬영의 측면에서 실로 웅장한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야기 구조가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하다.
일단 영화의 설정은 최전방에서 대대급 부대가 최후 공격을 준비 중이라는 것이다. 눈가에 칼자국이 선명한 대대장 매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은 극 후반에 나오는데, 이번 마지막 전투를 통해 사생결단을 낼 참이다. 그는 전투보다 그 전투를 기다리는 것이 실로 ‘지긋지긋하다’고 말한다.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을 일이다. 흔히들 군인은 총과 칼을 들고 싸우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옛날 군대는 일단 전선을 구축하고 참호를 파고 또 파며, 그 참호 안에서 궂은비와 차가운 눈을 맞아 가며 벌벌 떨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이 전부였다. 화장실, 식당도 없고 씻는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하루하루가 이어진다. 군인들은 신경이 있는 대로 날카로워져 폭력적이 되어 가며,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서 전투를 치러서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끝내고 싶어 한다. 진지전, 참호전이는 것은 전쟁과 전투의 막장으로 불린다. <1917>에 나오는 영국군들이 딱 그런 형국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다. 일개 대대가 그렇게 전면전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후방에 있는 사단 작전실에서는 그게 독일군의 함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유인책이라는 것이다. 전투를 시작하면 대대는 몰살이다. 그래서 사단장 에린무어 장군(콜린 퍼스)은 똑똑하고 발 빠른 전령 두 명, 곧 스코필드(조지 맥케이)와 블레이크(딘 찰스 채프먼)를 차출한다. 전령은 통신이 발달되지 않았거나 그것이 두절된 상황에서 직접 상급자의 명령을 전달하는 존재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 이 전령은 지휘관의 측근 비서로 일하기도 한다.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모두 자신만의 전령을 두고 있는데, 필요할 경우에는 영화에서처럼 별도로 차출하기도 한다. 아무튼 스코필드, 블레이크 두 병사의 임무는 사단장의 공격 중지 명령을 최전방에 있는 매켄지 중령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한시가 급하다. 그런데 그 길이 쉽지 않다. 중간 중간 독일군 잔병들이 남아 있는 데다 매복이 숨어 있고 부비트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917>의 얘기는 단 한 줄로 정리될 수 있는 간단한 스토리다. 전령 두 명이 상관의 명령서를 최전방에 전달하는 이야기. 거기에 과연 인간승리가 담겨 있을까. 2시간의 러닝 타임에 에피소드를 촘촘하게 박아 넣을 수 있을까. 샘 멘데스의 <1917>이 온갖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촬영상 등을 받은 이유는 바로 그런 점에서 혁혁한 성취를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다만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봉준호에게 뺏긴 것은 역설적으로 스토리가 ‘작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광경은 실로 스펙터클하지만 그것을 채우는 이야기는 빈약했기 때문이다.
▶원 샷으로 담아낸 인상적인 오프닝
영화는 특히나 촬영이 휘황찬란한데 전편을 거의 원 신 원 컷(One Scene One Cut)으로 찍어내는 고난도의 기술력을 과시한다. 사실은 ‘원 컨티뉴어스 쇼트(One Continuous Shot)’라 해서 원 신 원 컷처럼 보이게 한 것인데, 신을 길게 찍고 그것을 교묘하게 이어 붙인 것이다. 촬영 기술도 있지만 편집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원 신 원 컷이란, 장면을 찍을 때 카메라를 한 번도 끊지 않고 한 번에 길게 찍는 것을 말하는데 작가주의형 감독일수록 영화가 눈속임의 예술이 아니어서 리얼리티의 극대화를 위해 즐겨 쓰는 기법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에서 최민식의 그 유명한 장도리 액션 신이 그렇게 찍힌 것이다. <1917>은 원 컨티뉴어스 쇼트의 구사만으로도 현대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작품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두 명의 전령이 길고 긴 참호를 통해 사단장 장군 앞으로 가는 장면은 편집 기술을 쓰지 않고 원 신 원 컷으로 찍었다. 한 번도 끊지 않고 스테디 캠으로 찍어낸 이 첫 장면은 할리우드의 가장 인상적인 오프닝 신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아메리칸 뷰티>와 <007 스카이폴>을 만들었던 샘 멘데스 감독이 <1917> 같이 1차 대전이라는 조금 더 먼 시간대의 전쟁 역사를 스크린에 옮기려는 욕망은 오로지 인간의 육체를 주요 병기로 사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멀리 떨어져 있는 전쟁일수록 무기나 첨단 도구가 쓰이지 않는다. 총을 쏘기보다는 총부리에 장검을 꽂고 돌격 앞으로를 통해 육탄으로 부딪혀 몸을 찌르고 때리고 머리통을 부수고 등등 해서 한 발 한 발 나아갔던 전쟁. 그 참혹함. 그래서 1차 대전은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앞으로 전진할 때의 그 두려움을 병사들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그 돌격 앞으로의 의지는 어디서 나왔을까. 바로 그 생존의 의지를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현대 전쟁은 미사일 버튼을 누르느냐 마느냐의 문제, 곧 선택의 문제에 더 가깝다. 1차 대전을 두고 말하기를 가장 잔혹하고 비참하기 이를 데 없으며,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거의 천운에 가까운 데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얼굴 반쪽이 날아가면서까지 살아남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의 전쟁이었다고들 했다. <1917>은 전쟁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그 시절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그런데 지금 우리가 그 시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은근히 직설하고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다. 샘 멘데스는 시대에 대한 자신의 그 같은 정신적 고찰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병사 스코필드는 최전선을 향해 가는 길에 온갖 고초를 다 겪는다. 독일군 저격병하고 싸우느라 뒤통수를 부상당한 채 폐허 한가운데 숨어 사는 여인과 그녀의 갓난아기를 발견하기도 한다. 착한 이 젊은 병사는 여자에게 자기가 갖고 있는 먹을 것을 다 내어 준다. 여자는 아이에게는 우유가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젖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 스코필드는 몇 시간 전 엄청난 일을 당했던 농장에서 우유를 수통에 받아 왔던 터다. 여자는 아이에게 먹일 우유를 얻게 돼 너무나 기뻐한다. 그리고 병사에게 얘기한다. “가지 마요. 밖에 독일군이 있어요. 여기 숨어 있으면 살 수 있어요.” 스코필드는 잠시 망설인다. 눈빛이 흔들린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튀어 나온다. “가야 해요. 난 가야 해요. 가야만 해요.” 스코필드는 자신이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안다. 일종의 소명의식이다. 사람은 종종 소명에 의해 자신의 삶의 동선(動線)을 정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 장면이, 신파임에도, 가슴을 뭉클거리게 만드는 이유다. 저 때에, 저 야만의 시대에 얼마나 많은 어린 병사들이 그랬을까. 우리의 삶은 어쩌면 소명과 사명으로 점철된 역사일지도 모를 일이다.
스코필드가 최전선에 다다를 무렵 병사들 무리에서 한 소년병이 노래를 부른다. ‘떠도는 나그네(Wayfaring Stranger)’다.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전쟁과 평화는 실로 종이 한 장 차이임이 느껴진다. 그 덧없음이란. 인간들이여. 세계대전의 역사에서 제발 깨달음을 얻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