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정치 사상가가 등장한다. 사상가의 이름은 한비(韓非). 우리가 흔히 한비자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한비는 말더듬이였지만 논리와 문장에 있어서는 당할 자가 없었다. 말을 더듬어서일까, 한나라의 왕은 한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같은 현실을 안타까워한 한비는 수차례 왕을 독대했으나 설득에 실패한다. 결국 그는 책을 쓰기 시작한다. 이렇게 탄생한 책이 <한비자(韓非子)>다.
당시 한나라는 진, 송, 오, 촉, 위, 제 등 강국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한나라는 그 틈에서 약소국의 비애와 울분을 삼키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한비는 그런 한나라에 부국강병의 방법을 알려주고 싶어했다.
한비의 생각은 훗날 ‘법가사상’이라고 불리는 사상이 됐다. 군주가 법(法)을 바로 세우고 그것을 강력한 힘으로 지켜나가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사상이다. 그는 한나라가 약한 것은 법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항상 강한 나라도 없고, 항상 약한 나라도 없다. 법을 받드는 것이 강하면 강한 나라가 되고, 법을 받드는 것이 약하면 약한 나라가 된다.”
당시는 유교사상인 덕치(德治)가 득세할 때이니 법치는 좀 어색한 주장이었다.
<한비자>라는 책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연상시킬 만큼 극도로 현실적인 역사서다. 현재 55편 정도가 남아 전해지고 있는 <한비자> 가운데 나라가 망하는 징조를 제시한 망징편(亡徵篇)이라는 부분이 있다. 망징편에는 이런 글이 있다.
“나라는 작은데 부자의 땅은 넓고, 왕의 권력은 불안한데 신하들 세도가 높으면 나라가 망한다. 법이 완비되지 않은 채 지모와 꾀로 일을 처리하거나, 나라는 황폐한데 동맹국 도움만 믿고 있어도 나라가 망한다. 신하들이 공리공담을 좋아하고, 부자의 자제들이 변론을 일삼고, 상인들이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아 놓으면 나라는 망한다. 궁전과 누각과 정원을 꾸미고, 수레와 의복 가구를 호화롭게 꾸며 백성들 삶이 황폐해지면 나라가 망한다.”
2300년 전 쓰인 책이지만 지금 다시 읽어도 설득력이 있다.
순자의 제자였던 한비는 순자의 성악설에 뜻을 같이했지만, 예(禮)를 통해 정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하지 않은 모든 추상적 사상을 공론(空論)이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세워 나갔다.
한비는 인간의 내면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예리한 인간학을 정치사상과 통치술에 접목시켰고, 이것이 동양최고의 제왕학 교과서가 된다. 마키아벨리즘은 한비자가 만든 제왕학의 서양판이라고 불러야 옳다.
그의 중심 사상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군주는 막강한 힘을 가져야 한다. 군주는 힘을 바탕으로 법치를 하면서 군중들의 찬사나 원망에 흔들려서도 안 된다. 그저 확고한 법에 의해 상벌이 엄격한 정치를 하면 그뿐이다.
‘제왕학’의 창시자인 한비의 사상은 경제학과도 밀접하다.
한비는 ‘희소성의 문제’를 상당히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법이라는 규제 형식을 중시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한비자는 재화는 부족한데 이를 욕망하는 사람이 많은 게 인간사이기 때문에 인자함과 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덕치’는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유교관습으로는 경제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한비는 각자 자기 일에 의무를 갖고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외친다.
한비는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심이 ‘덕치’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면서 그는 시장 역시 ‘법치’의 틀 안에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비의 생각에 제대로 된 시장은 나의 욕망을 채우면서 남의 욕망도 존중해야 했다. 따라서 부당한 방법으로 욕망을 채우는 행위에 대해서는 법을 동원해 철저하게 차단해야 했다.
모두 알다시피 인간적인 차원으로 해결되기에 시장은 너무나 복잡하고 본능적이다. 한비자는 그 해결책으로 법치를 제시한 것이다.
한비자 사상의 핵심 기둥은 사실 평등이다. 그는 불평등한 세상을 통치하기 위해 ‘법’이 절실하다고 외쳤다. <한비자>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법은 귀족을 봐주지 않는다. 법이 시행됨에 있어서 지자(智者)도 이유를 붙일 수 없고, 용자(勇者)도 감히 다투지 못한다. 과오를 벌함에 있어서 대신(大臣)도 피할 수 없으며, 선행에 상을 내리는 데 필부도 빠뜨리지 않는다.”
<한비자>가 세상에 나왔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을 한 사람은 한나라 왕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한비자>를 읽고 가장 감명을 받은 사람은 진시황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막강한 왕권국가를 꿈꾸었던 시황제에게 유가정치를 비난하고 법을 강조한 <한비자>는 한줄기 빛이었을 수도 있다.
진시황이 한비자에게 관심을 보이자 이를 질투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진시황에게 한나라 사람인 한비자를 중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그가 간계를 쓰는 첩자일 수 있다고 모함한다.
결국 한비는 진나라 감옥에서 죽고 만다.
그의 책 <한비자>의 운명도 기구했다.
폭정을 일삼던 진시황이 죽고 진나라가 멸망하자 중원에는 적폐청산 바람이 불었다. 진시황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죄악시됐다. 진시황이 통치에 참고했던 책 <한비자>도 마찬가지였다. <한비자>는 졸지에 분서갱유를 일으킨 원흉으로 낙인이 찍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한비자>는 후세의 학자들이 다시 편집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비는 대단한 선구자였다. 그의 제왕학에는 마키아벨리즘에서부터 유물론이나 실증주의까지 인류사를 뒤흔들었던 수많은 사상의 원형이 관찰된다.
음풍농월 같은 명문만이 난무하던 시절 한비는 인간의 본성을 간파해낸 천재였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는 모든 사상은 결코 인간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