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杜甫)의 시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고전 교과서에 <두시언해(杜詩諺解)> 중 몇 작품이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고전 선생님은 ‘춘망(春望)’을 비롯한 두보의 시가 왜 뛰어난 작품인지는 설명해주지 않았고 오로지 중세국어 문법을 가르치는 데에만 열을 올렸기 때문에 무척 지겨운 시간이었다. 나와 두보와의 첫 번째 만남은 그렇게 아무 인상도 남기지 못한 채 지나갔다.
두보의 시를 두 번째로 만난 것은 1990년대 초였다.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까치’ 출판사에서 펴낸, 궈모뤄(郭沫若)의 <이백과 두보>를 사서 읽었다. 궈모뤄의 박식함에 감탄하면서 그 책을 흥미있게 읽었지만 두보와 관련해서는 무엇인가 찝찝하고 미심쩍었다. 두보의 시가 지닌 가치를 이해하고 분석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두보를 봉건지배계급의 입장에 서 있는, 인민의 고통을 외면한 시인으로 매도하는 궈모뤄의 태도, 마오쩌둥식의 시각이 마음에 걸렸다. 궈모뤄의 박식함을 일단 승인하면서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두보의 시를 반드시 유물사관의 논리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줄곧 따라다녔다.
백제성 충칭 풍졔
고통스러웠던 일생 ‘시성(詩聖)’이 되기까지
두보의 시에 대해 세 번째로 관심을 가지게 만든 것은 시인 백석(白石)이었다. 그가 1941년에 만주에서 쓴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이>란 시를 주의 깊게 읽으면서였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나는 멀리 고향을 나서 남의 나라 쓸쓸한 객고에 있는 신세로다”라는 구절, “내 쓸슬한 마음엔 자꾸 이 나라의 옛 시인들이 그들의 쓸쓸한 마음들이 생각난다/ 내 쓸쓸한 마음은 아마 두보나 이백같은 사람들의 마음인지도 모를 것이다”와 같은 구절 때문이었다. 백석은 왜 이 시에서 ‘쓸쓸한’이란 형용사를 이렇게 자주 사용하는 것일까라는 의문, 백석이 ‘쓸쓸한’이란 형용사를 통해 두보와의 동일시를 연출하고 있다는 생각이 두보의 시와 삶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청두(成都)에 있는 ‘두보초당(杜甫草堂)’을 세 번 찾아가고, 창사(長沙)에서 두보의 무덤을 찾아간 것은 백석이 말한 ‘쓸쓸함’의 정체를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두보의 시에 배어 있는 고단한 삶의 그림자를 제대로 실감하고 싶은 것이다.
두보의 생애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755년에 일어난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기준으로 뤄양(洛陽)과 창안(長安)을 오가며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던 전반기와 떠돌이 생활의 고통으로 점철된 후반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두보에게 있어서 태어나서부터 44세에 이르기까지의 삶은, 평생을 따라다닌 가난과 병마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살았고 당대의 대표적인 시인들과 교유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기에 행복했다. 반면에 안록산의 난이 생활의 무대를 짓밟은 44세부터 유랑생활을 시작하여 59세로 단저우(潭州)의 허름한 배 속에서 죽을 때까지의 삶은, 짧았던 초당시절을 제외하고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두부초당 쓰촨 청두
청두의 두보초당은 사후의 추모열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두보초당이 간직하고 있는, 역대 왕조에서 이루어진 증축과 확대의 역사가 그 추모열기를 증언해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생전에 그토록 줄기차게 고생만 하며 살았던 두보가 죽은 후에는 ‘시성(詩聖)’으로 추앙받으면서 이처럼 광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두보초당의 정문을 들어서서도 정작 진짜 ‘초당’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정도로 규모가 커져서 ‘초당’이란 이름에 따라다니는 검소함, 질박함, 가난함, 초라함 등의 이미지, 내가 기대했던 이미지를 맹렬하게 배반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당혹스러워 하며 궈모뤄가 초당시절의 두보를 두고 호의호식하는 지주생활을 했다고 규탄하던 대목을 잠시 떠올렸지만 곧 떨쳐버릴 수 있었다. 마오쩌둥의 권력에 아부하며 곡학아세를 일삼은 궈모뤄를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게 된 까닭이었다.
두보가 거처했던 진짜 ‘초당’을 찾아가는 길에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위광중(余光中) 시인의 <향수(鄕愁)>를 새겨놓은 비석이었다. “어렸을 때/향수는 한 장의 조그만 우표/나는 이쪽/어머니는 저쪽//어른이 된 뒤/향수는 한 장의 작고도 작은 배표/나는 이쪽/아내는 저쪽(小時候/鄉愁是一枚小小的郵票/我在這頭/母親在那頭//長大後/鄉愁是一張窄窄的船票/我在這頭/新娘在那頭).” 타이완에서 대륙에 있는 고향을 그리는 심정이 “한 장의 조그만 우표”와 “한 장의 작고도 작은 배표”라는 절묘한 표현 속에 너무나 절실하게 들어 있어서 가슴이 아렸다. 그리고 이 위광중의 시비가 청두의 초당에서 늘 고향을 그리며 살았던 두보의 심정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두보초당에 꼭 가보려고 했던 것은 <권태로운 밤(倦夜)>이란 한 편의 시에 그 이유가 있었다. “대나무의 서늘함은 누워 있는 침대 속으로 스며들고/들판의 달빛은 뜰 귀퉁이까지 가득하다/겹쳐진 이슬은 물방울을 이루며 떨어지고/성근 별들은 문득 나타났다 사라진다(竹凉侵臥內/野月滿庭隅/重露成涓滴/稀星乍有無)”라는 시에서 볼 수 있듯, 이처럼 섬세한 감각을 보여주는 작품에 표현된 분위기를, 주변의 사물에 대한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각을 직접 작품을 쓴 현장에서 느껴보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두보초당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두보묘 후난 레이양
두보는 <권태로운 밤(倦夜)>에서 뜰 귀퉁이까지 가득 채울 정도로 밝은 달빛이 그를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실은 전란에 초토화된 고향과,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해가는 살림살이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가족, 병마에 시달리며 날로 노쇠해가는 육체 등이 그를 잠 못 이루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예민해진 그는 누워 있는 육체의 서늘함으로 대나무 잎에 맺힌 물방울들이 서로 겹쳐지며 달빛을 머금은 채 흘러내리는 미세한 모습까지 지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두보초당의 침실 앞에서 나는 그가 “성근 별들은 문득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써놓은 것을 서늘함을 느끼는 그의 머릿속에서 하늘에서 명멸하는 별처럼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내 마음대로 상상했다. 두보는 같은 시대의 이백과는 분명히 다른 시인이었다. 그는 이백처럼 거침없이 호방하거나 과감하게 시를 쓰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일상의 사소한 일들에 대해, 자신의 개인적 고통과 쓸쓸함에 대해 민감하고 섬세하게 반응하면서 시를 썼다. 이 점을 <북정(北征)>이란 시는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살아 돌아와 어린 자식들을 대하니/허기와 갈증마저 잊을 듯하구나/자식들은 그동안의 일 물으며 다투어 수염을 잡아당기는데/그 누가 바로 화내면서 야단칠 수 있겠는가!(生還對童稚/似欲忘饑渴/問事競挽鬚/誰能卽嗔喝)” 이 시는 두보가 756년 안록산 군대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가족과 재회했을 때의 모습과 심정을 그린 작품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며 거렁뱅이의 모습으로 사선을 넘어 간신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또 “자식들은 그동안의 일 물으며 다투어 수염을 잡아당기는데”라는 구절을 통해 가족과 재회하여 기뻐하는 풍경을 생생하게 눈앞에 떠올릴 수 있다. 이처럼 두보의 시는 호방했기 때문에 추상적이었던 이백의 경우와는 달리, 사소했기 때문에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었다.
두보와 백석의 평행이론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시인 백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석은 1940년 1월경 일제 치하의 고국을 떠나 만주국의 수도인 신경(新京)으로 갔다. 그때 그는 신경에서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는 자신의 쓸쓸한 처지가 안록산의 난으로 고향을 떠나 유랑하던 두보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석은 “그들의 본을 따서 이날에는 원소(元宵)를 먹을 것을/외로이 타관에 나서도 이 원소를 먹을 것을 생각하며/그들이 아득하니 슬펐을 듯이/나도 떡국을 놓고 아득하니 슬플 것이로다/아, 이 정월 대보름 명절인데”라고 <두보나 이백같이>에서 썼다. 두보가 일상적 사건을 통해 자신의 처지와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듯이 백석 역시 ‘떡국’을 먹어야 한다는 일상적 습관을 통해 자신의 쓸쓸한 처지와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두보는 자신의 후원자 엄무(嚴武)가 청두를 떠난 후 병마의 소란스러움이 초당에까지 미치자 다시 떠돌이 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엽편주에 노쇠한 몸을 싣고 동가숙서가식 하며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동쪽으로 흘러가는 생활이었다. 폐병은 도지고 시력과 청력은 날로 나빠지는 가운데서도 배 위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힘든 세월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죽기 3년 전의 입춘날에 두보는 이렇게 썼다. “입춘날 쟁반에 담긴 가는 부추요리를 보니/문득 장안과 낙양의 매화꽃 필 때가 생각난다(春日春盤細生菜/忽憶兩京梅發時)”라고. 이처럼 이 시기 그의 시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유랑생활의 고달픔은 진하게 배어든 것은 같은 시에서 “이 몸이 돌아가 있을 곳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신세가 되니(此身走地歸定處)”라고 표현했듯 말로 다하기 어려운 참담한 생활과 처량한 신세가 작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두보는 동정호 근처를 떠돌다가 770년에 59세를 일기로 배 속에서 죽었다. 외롭고 처량한 죽음이었다. 죽기 얼마 전에 쓴 시에서 그는 자신의 감정을 봄 제비의 모습을 빌어 “가련하구나 이곳저곳 떠돌며 남의 집에 와 둥지를 트니(可憐處處巢居室)”라는 말로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중국 문학사상 가장 섬세하면서 구체적인 시를 섰던 시인 두보는 이렇게 죽었다.
백석은 아마도 이런 사실 때문에 자신의 시제목을 <이백과 두보같이>가 아니라 <두보나 이백같이>라고 정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백 역시 안록산의 난으로 말미암아 유랑생활을 했고 나이도 11살이나 더 많았는데, 두보의 이름을 앞세운 것은 두보가 표출하는 개인적 감정과 쓸쓸한 유랑이 좀 더 친근하게 느껴졌던 까닭이라고 나는 두보초당을 떠나면서 멋대로 생각했다. 나의 생각이 맞았건 틀렸건 나는 두보와 백석이라는 두 위대한 시인이 남겨 놓은 그 예스러운 쓸쓸함과 외로움이 왈칵 절박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6호(2015년 0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