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도 인생도 똑같아. 밥과 같이 매번 기다려지고 설레고. 기대가 있기에 골프 칠 맛도 나고 인생 살 맛도 나는 거 아닐까? 내기는 거기에 들어가는 양념이지.”
‘싱글 골퍼’로 통하는 이현세 화백은 지난 2010년 매일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며 ‘내기 골프 예찬론’을 펼쳤다.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얘기다. 맛있게 밥을 먹으려면 ‘양념’은 필수다. 내기를 하지 않는다면 동반자가 아무리 좋아도 라운드 자체가 영 맹맹한 것이 양념 없는 싱거운 음식을 먹은 것 같이 허전한 느낌이다. 이처럼 골프와 내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도 싱글 골퍼가 되려면 집 한 채나 자동차 한 대 정도는 날려야 된다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고수와 치열하게 게임을 해야 집중력도 좋아지고 빨리 실력이 늘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때 내기골프 방법은 주로 타당 얼마의 금액을 건 ‘스트로크’ 방식이었다. 이때에도 약자에 대한 배려는 있다. 일명 ‘핸디’를 주는 것. 80타를 치는 사람과 90타를 치는 사람이 1타당 1만원짜리 내기를 한다고 하면 먼저 하수에게 10만원을 주고 시작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참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함정이 있다. ‘배판’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하수가 자꾸 돈을 잃으면 ‘배판을 부르든지’라며 꼬드긴다. 대부분 넘어간다. 왠지 버디 한방이면 돈을 다 딸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 때문이다.
대부분 이 환상은 무참하게 깨진다. 배판의 함정에 빠져 미리 받았던 ‘핸디’는 1~2 홀이면 사라지고 준비한 돈을 다 잃고 두 손 드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렇게 내기골프가 치열하고 점점 더 수위가 높아질수록 ‘골프용품 회사’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때 골퍼들을 유혹하던 용품사들의 광고 문구는 ‘이전 드라이버보다 10% 더 거리를 늘려준다’거나 ‘최고의 방향성과 거리’라는 것이었다.
1990년대 일본 골프클럽을 수입하던 한 용품점 대표는 “이때는 정말 ‘장타’라는 단어만 붙이면 200만원이 넘는 드라이버도 불티나게 팔렸다”며 웃어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드라이버만 바꿔도 거리가 더 나간다고 하니 동반자들의 기를 죽이고 타수도 함께 줄일 수 있다는 기대심리에서다. 그리고 내기 골프 금액이 높았던 것도 한 이유였다. 몇 번만 내기골프에서 이겨도 드라이버 값은 금세 뽑을 수 있다는 심리도 한몫한 것이다.
이처럼 골프를 치는 사람들끼리의 경쟁의식과 하수들의 타수를 줄이기 위한 열정(?)이 ‘장타’, ‘정확성’이라는 단어가 붙은 신제품 고가 골프용품 시장을 키웠다.
여기에 한국사람 특유의 ‘빨리 빨리’와 ‘경쟁 심리’도 고가 골프용품 시장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하루라도 빨리 타수를 줄여야 하니 매년 신제품으로 용품을 바꾸고 1타라도 더 줄이고자 했다. 자신보다 잘 치는 경쟁자(?)들의 클럽을 보면서 따라서 바꾸거나 더 비싼 제품을 구해서 갖고 다니는 경우도 허다했다. 골프에서 지면 용품에서라도 이기고자 하는 경쟁심에서다.
이렇게 살벌한 스트로크 내기골프의 영향으로 용품 시장, 특히 고가 용품시장은 엄청난 성장을 함께 했다.
2014 서울골프쇼
내기 줄면서 용품 경쟁 식어
하지만 이런 호황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7년 유가폭등과 이어지는 경제위기로 인해 경기가 침체되면서 ‘내기 골프’ 환경까지 바꿔 놨다.
1인당 30만원이 넘는 라운드 비용이 점점 부담스러워지면서 골퍼들의 내기 강도가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타당 계산하는 스트로크 게임 대신 ‘하수들의 게임’으로 불리던 홀당 내기를 하는 스킨스 게임이 늘어났다. 일부 용품 기업에서는 ‘뽑기’를 위한 용품까지 만들어 골프장에 배치해 다양한 내기골프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같은 무늬가 새겨진 막대기가 2쌍이 있고 ‘조커’로 불리는 막대가 한 개 포함된 것이다. 자신이 못 쳐도 조커를 잡거나 잘 친 사람과 편을 먹으면 돈을 딸 수 있으니 스킨스 게임보다 분위기는 더 화기애애해질 수밖에 없다.
1인당 5만원씩 갹출해 20만원을 만들면 홀당 1만원씩의 상금과 2개의 파3홀에서 니어리스트 시상을 할 수 있다. 또 많이 딴 사람은 동반자들에게 일부 돌려주거나 일정 금액을 보태서 캐디비로 내니 내기 금액을 잃어도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이 줄어갔다. 만약 스트로크 게임을 해도 타당 1000원 선으로 확 내려갔다.
‘내기골프’의 트렌드가 살벌하고 살 떨렸던 스트로크 플레이에서 ‘부담 없고’, ‘재미있는’ 게임으로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내기골프 트렌드가 바뀌면서 예전처럼 치열한 내기골프 열풍도 차츰 수그러들었다. 즐거운 내기골프가 점점 보편화되면서 골프 용품사들은 울상을 지었다.
이 또한 이유가 간단하다. 분위기 자체가 치열하지 않으니 수백만원짜리 드라이버로 바꾸고 신제품 아이언을 구입해 악착같이 거리를 더 낼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속된 경기 불황으로 골프장들도 가격 할인에 나서고 대중적 골프장도 늘어나며 골프 인구도 함께 늘어났다. 새로운 아마추어 골퍼들에게 골프는 ‘레저’로 인식됐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기분 좋은 라운드를 하는 데 애써 용품을 과시하거나 10야드라도 더 보내려 값비싼 용품을 살 필요도 없었다. 그저 즐겁게 운동하고 맥주 한 잔하면 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메이저 용품업계 담당자는 “예전에는 비싸게 내놓기만 하면 팔려 골프 용품사들의 천국이었는데 내기골프 분위기가 바뀐 것 하나로 정말 용품사들은 어려워졌다”고 말한 뒤 “이제는 골퍼들이 실용적으로 값싼 제품을 선호하고 가격에 민감해 병행수입 제품을 찾기 시작하니 마진도 적고 경쟁이 너무 치열해졌다”고 하소연했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레저’의 수단으로 골프를 인식하고 ‘내기’ 또한 건전하게 즐긴다면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없다. 불과 10년 사이에 뚝 떨어진 골프용품 가격으로 골퍼들은 어느 때보다 부담 없이 골프를 즐기고 있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된다. 용품사들은 한국 골퍼들이 다시 ‘빨리 빨리’ 싱글 골퍼가 되고 싶어 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분위기가 다시 찾아올 따뜻한 봄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