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해가 지겨워서 다 같이 모여 해돋이나 보러 가기로 했습니다. 버릴 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려고요. 어찌나 힘든 한 해였는지 지난 여름엔 입에서 단내가 났다니까요. 성장은 고사하고 부도나지 않은 것만 해도 천운이었어요. 근데 말이요. 정작 새해는 시작도 안 했는데 내년 경기가 새까맣게 어둡다니,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정론 보도가 생명이라지만 희망찬 새해를 맞을 준비는 하게 해줘야죠. 어떻게 신문, 방송할 것 없이 성장은 물 건너가고 저(低), 저, 저만 찾느냐 이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말하는 품이 아나운서 멘트하듯 어찌나 똑 떨어지는지, 생방송에 내놔도 충분히 먹고 살 기운이었다. 어쩌면 그만큼 할 말이 많았고 또 실제로도 우여곡절이 얽히고설킨 한 해였다.
중소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A사장에게 2014년 청마의 해는 한 발만 뒷걸음질 치면 말 그대로 지옥불이었다. 그의 말을 빌면 “까딱 잘못했으면 빚더미에 앉을 운”이었다. 그래도 용케 버텨냈다. 새해맞이 해돋이는 그러니까 그와 직원들이 함께하는 의식이자 가는 해의 불운을 털어내고 오는 해의 기운을 옴팡 받자는 일종의 푸닥거리였다. 그 신성한 다짐을 앞둔 A사장에게 어두운 경기 전망은 어린 시절 줄기차게 외우고 외쳤던 공산당보다 더 싫고 미운 흑색선전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어두워도 다시 버텨야죠. 그래야 제 식구(직원)들 입에 풀칠할 것 아닙니까. 서울의 안산이 좋다길래 거기나 가려고요. 멀리 해돋이 갈 여력도 안 되고, 내려오는 길에 다 같이 막걸리나 한 사발 하려고 합니다. 같이 갈랍니까?”
A사장과 함께 발을 맞추진 못했지만 일주일 뒤 안산자락길에 들어섰다. 서울 서대문구에 자리한 안산의 둘레길이다. 최근 알고 찾는 이들에겐 최고라 손꼽히는 사계절 산책로이기도 하다. 걸음을 옮기니 그 이유가 눈에 들어온다. 등잔 밑이 어두웠다. 고개 젖혀 시선을 멀리 두니 울창한 메타세쿼이아 숲 사이로 이름 모를 새 한 쌍이 훌쩍 고개를 넘고 있었다.
메타세쿼이아 숲길
호랑이가 살던 낮고 웅장한 봉우리
안산 자락길이라 해서 경기도 안산을 떠올렸다면 번지수가 한참 틀렸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 자리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뒷산이 바로 안산이다. 무악(毋岳)이라 불리며 기산, 봉화뚝, 봉우재, 봉우뚝이라고도 알려졌는데, 동봉과 서봉 두 봉우리의 산세가 마치 말의 안장처럼 생겼다 해서 안산(鞍山)이라 했다. 이곳은 서쪽으로 솟은 296m의 낮은 산이다. 높이만 놓고 보면 뒷동산 같지만 내면에 울창한 숲과 정상부근의 기암절벽을 품은 웅장한 산이다. 일례로 안산과 인왕산 사이의 무악재는 지금이야 통일로로 연결되는 탄탄대로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험하고 무서운 고개였다. 간간이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해한 탓에 지금의 서대문 독립공원 자리에 군사가 주둔하기도 했다. 이 군사들은 재를 넘는 행인이 10여 명 이상 모일 때를 기다려 고개 너머까지 호송하는 게 주 임무였다고 한다. 산책하듯 재를 넘는 게 아니라 군사가 화승총을 들고 앞장서 걸었고, 비가 오는 날엔 화약이 물에 젖어 활과 살통을 메고 행인들을 호위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호랑이가 출몰하던 시절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만큼이나 먼 이야기가 될 무렵, 안산은 서울 시민과 동네 주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2013년 11월 무장애 산책로 ‘안산자락길’이 완공되고선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걷기 위해 찾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안산을 한 바퀴 휘감아 도는 7km의 순환로는 나무 데크와 친환경 마사토길이 이어져 있다. 경사가 완만해 유모차나 휠체어가 다니기에도 무리가 없다.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원점 회귀 코스라 발을 떼기 시작한 곳이 곧 출발점이다. 하지만 처음 이곳을 찾는 이들은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다. 자락길이 표시된 이정표가 없는 탓인데, 독립문역에서 출발한다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역사관 뒤에 자리한 이진아 기념도서관의 뒷길을 오르면 군부대가 나타나고 좀 더 오르면 파란색과 노란색 화살표가 선명한 나무 데크길을 만날 수 있다.
(위)봉원사, (아래)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의 암벽
유쾌! 상쾌! 통쾌!
걷는 내내 같은 색 화살표만 따라 가면 출발점으로 돌아올 수 있어 길 잃을 염려가 없는 안산자락길은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짧지만 다양한 풍광을 숨기고 있다. 물결처럼 표시된 파란색 화살표를 따라 나가니 경사가 완만한 데크 위로 숲이 우거졌다. 그 숲에 시선을 두고 두리번거리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니 이번엔 하늘길이 열렸다. 봄, 여름, 가을의 경관이 화려하고 싱그럽다면 겨울의 그것은 차갑고 맑은 공기가 더해져 눈이 시릴 만큼 깊고 선명했다.
무엇보다 눈에 띈 건 노약자나 임산부, 장애인을 배려한 길의 세심함이다. 우선 데크에 계단이나 턱이 없다. 가파른 산비탈은 나무 데크를 지그재그로 설치해 경사를 줄였고 휠체어나 유모차의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촘촘하게 닦았다. 힘들면 쉬어 가라고 곳곳에 쉼터가 마련돼 있고 휠체어 교차에 무리가 없도록 100여 미터마다 폭이 3~4.5m나 됐다. 그 길을 따라 30분쯤 걸었을까. 인왕산과 북한산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하는 겨울산 곳곳에는 한양도성길(성곽길)이 얽혀 있고, 그 아래 서울 강북의 도심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이번엔 메타세쿼이아 숲이 오는 이를 반긴다. 20여 미터가 넘는 나무 수백그루가 휘어짐 없이 하늘로 솟았다. 하늘을 가린 숲에 볕이 들면 푸릇푸릇한 나뭇잎이 싱그럽게 반응한다. 서울 근교 혹은 지방 명소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을 도심에서 즐길 수 있다는 건 분명 안산자락길의 강점이자 매력이다. 숲을 지나 마지막 전망대에 이르러 좀 더 나가면 출발점이 나온다. 이제 정상에 오르는 일만 남았다.
북한산과 한강이 한눈에
안산의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다. ‘무악산 동봉수대터’라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동쪽과 서쪽 두 곳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나무 데크길이 아니라 일반 등산로다. 오르는 길은 짧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오르기엔 숨이 벅차다. 목표가 눈앞에 보이면 없던 힘이 솟아나듯 신기하게도 지척에 봉수대가 보이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렇다고 남은 구간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커다란 암벽이 막아서 밧줄을 잡고 올라야 할 때도 있고, 낭떠러지 사이를 가로질러야 할 때도 있다. 그 중심에 버티고 선 산세는 기가 막히다. 설악을 축소해 놓은 듯, 곳곳의 커다란 바위와 암벽이 장중함을 연출한다.
봉수대에 올라서면 시야가 훤하다. 남으론 한강이 보이고 서울 강북과 강남 도심의 빌딩 숲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고개 돌려 시선을 북서쪽에 두면 인왕산이, 그 뒤쪽에는 북한산 줄기가 흐른다. 높이는 고작 290여 미터지만 내려다 본 서울은 장난감 마냥 작고 귀엽다. 그곳에 내려서면 다시금 아등바등 사연 담은 희로애락이 기다리고 섰겠지만 위에서 바라보니 그저 손톱보다 작은 이들의 꼬물거림일 뿐이다.
정상에 섰으면 내려가야 하는 법. 하산은 봉원사를 거치기로 했다. 이곳은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반야사라 이름 지으며 창건했다. 그 당시에는 연세대 터에 자리했는데, 조선시대 영조 24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영조가 친히 봉원사라 쓴 현판을 내렸다는데,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고즈넉한 사찰 내부는 목마른 이들이 약수 한 모금 머금고 가는 중간 기착지다. 시원한 물 한 잔 들이켜고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안산이 궁궐 후보지?! 안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신촌은 조선 개국 당시 한양의 궁궐 후보지 중 하나였다. 당시 정도전, 무학대사, 하륜 등이 터를 물색했는데, 하륜이 안산을 주산으로 하고 신촌 일대에 궁궐이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정도전의 주장대로 현재의 경복궁이 지어졌는데, 안산 아래 봉원사 경내에서 정도전의 서체를 확인할 수 있다. 명부전 편액이 그의 작품이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2호(2015년 1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