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그랬다. 그렇게 믿고 살았다. 내 나이 마흔이 넘는 그 무렵이면 달라질 줄 알았고 그렇게 믿었다. 다른 것이 아니다. 내 민족과 문화에 대한 이해와 천착이 깊이를 가지고 그것을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도 깊어질 줄 알았다. 적어도 마흔이란 그런 의미의 깊이를 품을 수 있는 나이일 것이라고 꿈꾸며 살았다.
그게 30대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한마디로 잘라 말하자면, 그런 애정이나 믿음은 결코 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내 문화와 민족에 대한 자긍심은커녕 오히려 ‘이런 나라가 왜 안 망하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하여 나를 곤혹스럽게 하던 선생님들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나의 것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거 참 이상하다. 어째서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는 거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저 지경인 인사가 저 직책을 맡고, 저 인품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데도 안 망하다니. 그게 기이하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이 나이에 그렇다.
오늘도 한국인이 제일 못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가 가구이고 하나가 건물이다. 서울시청, 용산구청… 이런 관공서 건물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안 할 말로 그걸 지은 사람의 손목이라도 잘라버리고 싶게 화가 끓어오른다. 인도의 타지마할을 짓고 나서 왕은 다시는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려고 인부들의 손목을 잘랐다는 전설과는 정반대다. 이런 추악한 건물을 다시는 못 짓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다.
한국인이 만드는 가구는 또 어떤가. 앉아도 불편하고 보기에도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다보니 탄식처럼 중얼거리게 된다. 저 옛 한옥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던 대목과 소목들, 그 손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오래전, 전라도 지역 총선 유세 현장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모 일간지로부터 야당 총재였던 이철승 후보의 선거유세를 동행 취재해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 이철승 씨를 따라 선거유세장인 전주 지역을 돌면서였다. 우리의 농가주택은 기둥과 벽이 땅과 직각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선거 판세가 아니라 농가주택 꼬락서니나 보고 다닌 셈이었다.
그때 만난 전라도 지역의 농촌주택은, 지면을 수평이라고 볼 때 집의 벽이 지면과 수직으로 만나서 올곧게 서 있는 집이 거의 없었다. 처음 그것을 깨달았다. 아, 한국인의 집은 벽이 지면과 수직으로 만나지 않은 거로구나. 생각해 보니 옛 우리의 초가집, 초가삼간이 바로 그런 집이 아니었던가도 싶다. 민화 속에 그려진 우리의 초가삼간은 제대로 서 있는 것이 없다. 삐뚤빼둘 찌그러져 있거나 아예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런 초가삼간 지붕에서 고추가 붉게 익어 가고 흙 마당에서 삽살개가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내가 내내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도시가스관이 폭발하지 않는 게 불가사의하다. 서울의 도시가스관을 두고 하는 말이다. 도시가스관을 묻기 시작할 때 나는 서울의 역삼동에 살았다. 내 집 앞은 물론 거미줄처럼 얽힌 동네 골목길을 파헤치고 도시가스관을 묻는 공사현장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공포를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말 그대로 ‘거미줄로 방귀 엮듯’ 하는 가스관이 폭발하지 않는다면 그게 차라리 이상할 정도로 공사는 주먹구구식 바로 그것이었다.
‘서울에서 오토바이를 타면서 3년 안에 병신이 되지 않으면, 병신이 안 된 그놈이 병신이다’라는 말이 떠돌던 때가 있었다.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저게 폭발하지 않으면 관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가스가 이상한 거 아니겠는가. 그게 내 생각이었다. 담배를 피우며 하는 둥 마는 둥 일을 하고 있는 인부들을 보며 저러고도 과연 도시가스가 공급되기는 되는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서울 어디에서도 대형 도시가스 폭발 사고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건 세계 몇 대 불가사의인가.
여기에는 수리적 합리적 사고를 오히려 믿지 않고 감각에 의존하는 우리 민족의 특성이 있다. 음식을 만들 때도 그렇지 않은가. 요리연구가 황혜성 씨가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나물을 무치면서 “손으로 조물조물 무쳐야 맛이 난다, 젓가락으로 뒤적뒤적해서는 맛이 안 난다”고 말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것이다. 정확하게 계량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조물조물 무치란다. 합리적이고 수리적인 사고가 들어갈 틈이 없는 이 조물조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두어 걸음, 서너 번, 예닐곱 사람… 수없이 많은 이 한국인의 수량에 대한 미학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뛰어난 감각이다. 손과 눈 그리고 마음이 읽어내는 천부적이고 선험적인 감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감에 의해 살아갈 것인가.
내 세대가 살아온 환경은 아름답지도 밝지도 않았다. 그러나 기층문화에서 수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 것이라고 믿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버림받았다.
한복이 예복이 되어 버리고 한옥은 아파트로 대체되면서 형해(形骸)도 없이 사라져 갔다. 제 민족의 집을 박물관에 찾아가야 볼 수 있게 되었다. 음식만이 끈질긴 입맛과 함께 살아남았다지만 먹어도 좋은 양질의 먹거리는 점점 사라지는 추세다. 오일장 한구석 길바닥에서 도라지를 손질하는 할머니까지도 “이거 전부 친환경이에요. 친환경 …”하는 데는 할 말을 잃는다. 제과점이 한식당보다 많고 어쩌자고 닭고기는 그렇게 먹어대는지, ‘치맥’이 한국의 고유음식이 되어 가는 요즈음이다.
그 사이, 나도 이제는 고요하고 담담하게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기다려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아직 가스도 폭발하지 않았고 각이 맞지 않는 집에서 불편하기 그지없는 가구에 몸을 의지하고 살아왔지만, 그 집과 가구 때문에 척추가 휘는 고통도 없이 잘도 견뎌온 세월이 저만큼 쌓여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 해도, 사람마저도 변하고 있다 해도… 그 흐름이 가 닿는 곳에는 희망이 보이고 아름답다. 사람이 아름다우면 되는 것이다.
야구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선생님. 야구장 같이 안 가실래요?” 하던 제자가 있었다. 타자들의 타율까지 줄줄이 꿰면서 LG팀의 광팬임을 자랑하던 여학생이었다. 지금 그녀는 직장여성이 되어 있다. 이 제자가 인터넷 카페에 단 덧글이 그녀의 뒷모습 위에 후광처럼 떠오른다.
‘그냥 들꽃처럼 살아갑시다… 굳이 꽃의 여왕 장미가 될 필요 있나요. 나 말고도 장미 되겠다고 뾰족 가시 세우는 사람은 많으니 그냥 소소한 행복 발견하며 살아요.’
‘사람이 어찌 다 날씬하게 마르고 예쁘기만 하겠는가. 다 꽃 같기야 하겠는가. 나 같은 취나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긴 세계여행에서 돌아오며 그런 생각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적은 제자도 있었다. 취나물이라는 말에 웃었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한마디였다.
자작나무 밑을 떠나며 이 말을 되새겨 본다. 그래, 이 세상에는 취나물도 있어야 한다. 그러자, 나 하나쯤은 취나물이 되어 그냥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며 살아가자. 이제 알지 않는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