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현의 브라보 클래식] (36) 노르웨이 민족 음악 알린 ‘스칸디나비아의 영혼’…조국을 사랑한 ‘북구의 쇼팽’ 그리그
입력 : 2014.09.22 17:17:29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를 연주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 <사진제공=서울시립교향악단>
눈을 감으면 새벽빛이 수평선을 따라 부드럽게 번져가는 해안의 풍경이 떠오른다. 어디선가 북구의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다.
노르웨이 국민 작곡가 그리그(1843~1907년)의 ‘페르퀸트’ 조곡 중 ‘아침의 기분’은 고국의 자연을 담은 명곡이다. 그는 노르웨이 산을 등반하면서 숲과 땅에서 얻은 영감으로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독일 작곡가 바흐(1685~1750년)와 오스트리아 작곡가 브루크너(1824~1896년)가 음악으로 거룩한 교회를 지었다면, 그는 고국 사람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행복한 집을 지었다.
그는 “내 조국은 본질이 깃든 반 야생적인 땅이다. 나는 고향 풍경에서 구원을 얻고 싶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뭔가가 내 맘 속에 간직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조국의 보물 같은 민속 음악들을 탐구했다.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은 노르웨이 정신적 유산을 예술로 재창조했다. 그 선율은 독특하고 깊었으며 아름다웠다.
자연을 사랑한 소년
1843년 노르웨이 서해안 항구도시 베르겐에서 태어난 그리그는 어릴 때부터 피오르드와 숲으로 둘러싸인 조국을 사랑했다. 특히 해안가에서 뛰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피아니스트 어머니 덕분에 자연스럽게 음악과 가까워졌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모차르트(1756~1791년)와 베버(1786~1826년), 쇼팽(1810~1849년)에 빠져들었다. 집안도 부유했다. 스코틀랜드계 증조 할아버지부터 3대째 베르겐 영국 영사를 지냈다. 외교관 집안이라 어머니는 매주 하우스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그는 5세부터 피아노로 환상적인 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일기에 “피아노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놀라웠다. 9화음을 찾아내면서 환희를 느꼈다. 그 어떤 것도 그만큼 나를 흥분시키지 못했다”고 적었다.
6세에는 악보 읽는 법과 짧은 피아노 연습곡을 배웠다. 하지만 그 과정이 녹록지 않았나보다. 일기에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노 연습에 염증을 느꼈다. 그때 조금만 더 열심히 피아노를 배웠더라면 음악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라고 썼다.
그러나 음악 재능은 탁월했다. 그가 16세 때 집을 방문한 노르웨이 바이올리니스트 오울 볼이 깜짝 놀랐을 정도다. 볼은 그리그가 12세에 작곡한 ‘주제와 변주’를 들은 후 감탄했다. 그리그를 독일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시키라고 부모를 설득했다. 라이프치히는 바흐(1685~1750년)가 활동한 유서 깊은 음악도시다. 작곡가 멘델스존(1809~1847년)이 설립한 이 음악원은 전통적으로 독일 낭만주의 음악 위주로 가르치고 있었다. 작곡가 슈만도 한때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소년 그리그는 음악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향수병이 도져 건강이 악화됐다. 엄격한 화성법과 작곡법도 싫었다. 그래도 바흐와 모차르트는 좋았다. 훗날 그리그는 “그들이 진정한 스승이었다”라고 털어놨을 정도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는 위기를 잘 극복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유학 생활 중에 만성 폐질환을 얻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촌 누이이자 성악가 니나 하그루프와 사랑에 빠진다. 결혼식을 올린 후에는 아내를 위한 가곡 ‘그대를 사랑해’ 등을 작곡했다.
그리그는 “한 소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훗날 나의 아내가 됐고 지금 이 시간까지 내 인생의 반려자로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내 가곡의 참된 연주자입니다”라는 편지를 지인에게 썼을 정도로 아내를 사랑했다.
친구 덕분에 민족주의 음악에 눈뜨다
그리그는 니나와 함께 1863년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옮겨 예술인들과 교류했다. 덴마크 시인 안데르센(1805~1875년)의 시에 선율을 붙인 가곡 ‘마음의 선율, Op. 5’를 작곡했다.
그곳에서 음악인생 지표를 바꿔준 친구를 만났다. 바로 노르웨이 민족주의 작곡가 리카르드 노르드라크(1842~1866년). 그는 그리그에게 민족주의 음악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당시 노르웨이는 덴마크와 스웨덴의 섭정으로 정치적 독립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노르드라크와 만남 이후 그리그는 노르웨이 민속 민요와 춤곡을 수집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았다. 당시 작곡한 피아노 작품 ‘유모레스크집 Op. 6’이 노르웨이 민속 어법을 담은 최초의 작품이다.
훗날 그리그는 “노르드라크는 음악을 뛰어넘어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1864년 두 사람은 스칸디나비아 음악을 육성하기 위해 유테르프협회를 결성했다. 이듬해 두 사람은 이탈리아로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노르드라크가 갑자기 급성 폐렴에 걸려 베를린으로 가서 한 달 동안 간호했다. 극진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노르드라크는 24세에 요절했다. 그리그는 친구를 위한 장송 행진곡을 작곡해 마지막 가는 길에 선물했다.
뜻밖의 행운 가져다준 ‘페르퀸트’
혼자 로마로 간 그리그는 우연히 고국 극작가 입센(1828~1906년)을 만났다. 천재 음악가 그리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입센은 희곡 ‘페르퀸트’의 배경음악 작곡을 의뢰했다.
그리그는 이 제안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서정적이어서 극음악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도 없었지만 간곡한 요청에 못 이겨 곡을 완성했다. 그런데 1876년 초연에 크게 성공했고 그해 36회나 공연됐다. 지금까지 불후의 명곡으로 연주되고 있으니 뜻밖의 행운을 가져다 준 셈이다.
이 작품은 페르퀸트라는 남자와 순정적 여인 솔베이그의 이야기. 젊은 페르퀸트는 아내 솔베이그를 집에 두고 세상의 모든 쾌락을 좇아 방황한다. 남의 부인을 약탈하기도 했으며 험준한 산에서 마왕의 딸과 같이 지내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추장의 딸과 청춘을 즐기지만 허망하게 끝난다. 결국 늙고 병든 몸으로 집에 돌아가 아내의 무릎에서 죽는다. 페미니스트들이 들고 일어날 만한 스토리이지만 이 작품 소재는 노르웨이 민담이다. 서글프고 깊은 사랑이 그리그 특유의 맑고 깨끗한 선율로 승화된다.
‘페르퀸트’는 전주곡 5곡을 포함해 행진곡, 무곡, 독창곡, 합창곡 등 23곡으로 구성됐다. 수록곡 중에는 아내가 남편을 그리며 부르는 애틋한 사부곡 ‘솔베이그의 노래’가 가장 많이 연주된다. 여인의 간절한 마음이 음표로 변해 애절하게 흘러내린다. 지난날을 후회하는 페르퀸트가 투신자살을 하려 할 때 멀리서 솔베이그 노래가 들려온다. 그곳을 따라가 보니 머리가 하얗게 센 솔베이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결혼식장에서 처음 본 남편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다. 또 다른 수록곡 ‘아침의 기분’과 ‘아니트라의 춤’, ‘오제의 죽음’도 명곡이다.
세계 음악가들과 영향 주고받아
1870년 그리그는 로마에서 작곡가 리스트(1811~1886년)를 만났다. 리스트는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를 연주한 후 극찬했다. 이 곡은 고정된 틀에 갇혀 있지 않고 파격의 미학을 담은 작품이다. 마치 북극의 빙하가 쩍 갈라지는 느낌이다. 쇼팽처럼 피아노를 잘 쳤던 그리그는 직접 이 곡을 연주하며 세상에 알렸다.
59세 리스트는 27세 그리그를 친구처럼 대해 주었고 집에 초청했다. 대가의 인정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사실 그는 기로에 서 있었다. 노르웨이 국민 음악을 만들겠다고 결심했지만 기성 음악계가 호응하지 않았다. 생활도 힘들었다. 아내와 함께 피아노를 가르치고 지휘를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창작의 고통도 심했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날이면 날마다 나는 나의 예술 세계에 실망하고 있다”고 털어놨을 정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식까지 잃었다. 딸 알렉산드라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뇌막염으로 죽었다. 다행히 노르웨이 정부가 작곡과 지휘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연금을 지급하면서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음악가로서 명성도 차츰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불행이 닥쳤다. 1875년 그의 부모가 죽었고 몇 년 후에는 아내 니나와 이혼했다. 개인적 아픔에 힘겨웠지만 음악은 더 깊어졌다. 1880년부터 2년 동안 베르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활동했다. 1884년에는 베르겐 근교 트롤드하우겐에서 살면서 작곡과 여행에 집중했다. 이곳에서 ‘서정소곡집, Op.43’(1886년)을 작곡했다. 1887년부터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으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명성도 드높아졌다. 스칸디나비아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영국 국왕 앞에서 연주할 정도였다. 런던에서 그의 음악회가 열리는 날에는 긴 줄이 이어졌다.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1899년 프랑스 작곡가 포레(1845~1924년)는 그의 파리 공연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그리그만큼 인기를 누리는 음악가는 없으며, 그의 작품들만큼 우리들 내면의 음악 혼을 일깨우는 작품은 없다”고 호평했다.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1862~1918년)의 현악사중주에서도 그리그의 현악사중주 G단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프랑스 작곡가 라벨(1875~1937년)은 “내 작품 중에서 지금까지 그리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내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1840~1893년)는 “그리그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상상력과 창조성을 음표로 표현했다”고 평했다. 각종 명예도 뒤따랐다. 노르웨이 성 올라브 대십자 훈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네덜란드 훈장, 프랑스 아카데미 명예회원,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으로 위촉됐다. 영국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은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하지만 그는 성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이런 대우를 받기에는 나는 너무 모자란 작곡가다. 과분한 평가에 조금이라도 어울리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해 살겠다”고 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음악회를 열었다. 1907년 9월 4일 영국 리즈 음악 축제를 준비하던 도중에 만성 피로와 고질적 폐병이 겹쳐 눈을 감았다. 유골은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그의 고향 절벽에 매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