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에서 가장 위험한 때는 만사가 순조롭게 잘 나갈 때’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마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 여자골퍼들을 정조준한 격언 같다.
지난해 ‘한국 신드롬’까지 만들어내며 LPGA투어를 주름잡던 한국 선수들은 올해 들러리 신세로 전락했다. 한국 여자골퍼들의 부진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수치는 LPGA투어 우승 횟수다. 시즌 17번째 대회이자 3번째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여자오픈까지 한국여자골퍼들은 단 1승만을 기록했다. 그것도 시즌 14번째 대회 만에 ‘골프 여제’ 박인비가 이뤄낸 것이다. 그 사이 미국선수들은 3개의 메이저대회를 싹쓸이 하는 등 10승을 합작했다. 최근 열린 10개 대회만 보면 7승을 올렸다.
지난해까지 무서운 기세를 보였던 한국 여자골퍼들의 이 같은 부진은 사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다.
작년에는 박인비가 메이저대회 3연패를 포함해 6승을 올리는 등 한국 선수들이 10승을 올렸다. 최근 5년만 봐도 2011년 3승에 그쳤지만 2012년 8승, 2010년 9승, 2009년 11승 등 꾸준하게 우승을 차지했다.
미국 여자골퍼들의 선전과 대비되는 한국 여자골퍼들의 부진 원인은 외적으로는 ‘길어진 골프 코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완벽한 스윙과 퍼팅감각은 갖고 있지만 신체적으로 장타자가 드문 한국선수들을 견제하기 위해 LPGA투어에서는 ‘합법적’으로 코스 길이를 조금씩 늘려왔다.
지금까지는 파4 홀에서 드라이버샷을 날린 뒤 7~8번 아이언으로 그린을 공략해왔던 한국선수들이 올해에는 4~5번 아이언이나 유틸리티를 잡게 된 것이다. 당연히 그린에 볼을 올려놓는다고 해도 예전처럼 쉽게 버디를 잡아낼 수 있도록 홀에 가깝게 붙이는 일은 어려워졌다.
반면 제시카 코르다, 스테이시 루이스, 미셸 위처럼 장타를 치는 미국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거리’라는 측면에서 한국선수들에 비해 이득을 보게 됐다.
하지만 ‘한국 선수 부진’의 속을 뜯어보면 지금의 부진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적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게 한다.
지금까지 한국선수들은 ‘근면함’과 ‘성실성’으로 LPGA투어를 공략했다. 다른 나라선수들은 늘 한국 선수들의 훈련량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선수들은 한국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저 정도로 훈련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몸을 너무 혹사시키는 것이다”라며 비웃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이들의 생각과 행동이 변했다. 이전보다 훈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어린 선수들은 스윙의 완성을 위해 유명한 코치들을 찾아다닌다. 타고난 신체조건에 한국선수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엄청난 훈련량’까지 소화한 미국선수들은 올해 LPGA투어의 주인 자리를 되찾았다. 그동안 미국을 놀라게 했던 한국 선수들이 오히려 ‘역습’을 당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제국의 역습’이다. 한국선수들이 ‘역습’을 허용한 원인은 미국 여자골퍼들의 ‘한국식 훈련 따라하기’뿐만 아니라 한국선수들의 내적 문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악바리’ 근성으로 투어에서 살아남던 얘기는 이제 옛말이다. 많은 한국여자골퍼들이 미국에서 우승을 하고 탄탄한 스폰서들을 만나면서 ‘악바리 골프’가 아닌 ‘즐기는 골프’로 바뀌고 있는 것.
한 예로 지금까지 미국에 집이 없던 선수들은 경기가 열리는 근처 호텔에 짐을 풀고 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제는 집이 있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대회가 없을 때에는 집에서 휴식을 취한다. 삶의 질은 높아졌을지언정 그들의 현재를 만든 ‘연습량’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LPGA투어에 관여하고 있는 한 한국기업 대표는 “그동안 ‘신체조건’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던 ‘헝그리 정신’과 ‘연습량’이 이제는 미국선수들보다 적은 선수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며 달라진 분위기에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국 선수들로 인해 위기감을 느끼고 ‘독한 연습 문화’를 도입해 미국선수들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과 같은 ‘역습’ 분위기는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투어의 한 선수는 “비슷한 또래인 한국 선수들의 강한 정신력과 뛰어난 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최근 일본 젊은 선수들도 예전보다 훨씬 노력을 많이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일본 여자골프 내부에서도 “일본 선수들은 한국골퍼들처럼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다, 승부욕을 키워야 한다”며 서로를 자극하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달라진 분위기는 일본 여자골프 대회장소만 찾아가 봐도 알 수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경기가 끝난 뒤 연습그린에는 한국선수들만 해가 질 때까지 훈련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본 선수들이 가장 마지막까지 연습을 하는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오다 기세가 한풀 꺾인 한국 골퍼들은 ‘아~ 옛날이여’만 외칠 수는 없다. 2016년 브라질올림픽에 골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각국은 벌써부터 골프 금메달을 정조준하고 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처럼 ‘한때’ 너무 잘나갔던 한국 여자골퍼들이 다시 한 번 강력한 실력으로 외국 골프무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과거는 잊고 마치 1번 홀 티박스에서 티샷을 준비하듯 새로운 마음으로 힘차게 티샷을 날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