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미륵도 가는 길
경(중)부고속도로→비룡JC→산내JC→통영대전고속국도→동통영IC→통영대교→미륵도
“월요일 아침이면 간부회의가 열리는데, 회의 마치고 부서로 복귀하던 부장 셋이 한꺼번에 휴게실에 들른 거예요. 휴게실 한쪽에 부장이 셋씩이나 똬리를 틀고 있으니 직원들 말수가 갑자기 줄더군요. 모르면 몰랐지 누가 그 앞에서 마음 놓고 떠들겠어요. 한 10분쯤 지나니까 부장들 목소리가 들리는데, 사장이 회의 때마다 초심(初心)을 잃지 말라고 수십 번씩 강조하는데 그게 뭔지 도통 기억이 안 난다나 뭐라나…. 그땐 속으로 웃었는데, 며칠 뒤에 후배에게 물으니 그런 게 어디 있냐는 군요. 저도 그런 게 있었는지 가물가물하고…. 불과 10여 년 전인데 그런 게 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 부장들이 왜 똥 씹은 표정이었는지… 없는데 잃지 말라니 코미디도 아니고….”
중견기업 홍보실에 근무하는 김 차장은 올봄 제대로 속앓이를 했다. 그의 말을 빌면 사회생활 십수 년 만에 직장인 3년차 증후군이 나타나더니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겹쳐 스스로 공상과 망상에 치를 떨었다. 도대체 왜 출근하고 퇴근하는지 치졸한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건 그렇게 헤매는 데도 주변에선 누구 하나 눈치 채는 이가 없었다.
“가까울수록 뭐라 말할 수가 없었어요. 집사람이요? 아이고, 한국 남자가 이렇구나, 남자도 사람인데 싶었죠. 주말에 혼자 산에 올라 중얼대면서 풀었습니다. 왜 길 가다 보면 혼자 툭툭 말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저 등신 왜 저러나 싶었는데, 제가 그 등신이더라고요. 하지만 효과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입사할 때 입에 달고 살았던 ‘행복하자’란 말도 다시 하게 됐고, 아마 그게 제 초심이었을 거예요. … 혼잣말 하는 분들 이상하게 보지 마세요. 그 분들… 어쩌면 생각보다 큰 산을 넘고 있을지 모릅니다.”
머릿속에 통영이란 지명이 떠오른 건 어쩌면 초심이란 단어 때문이다. 첫 마음가짐이란 어감에 일출이 떠올랐고 떠오르는 해의 장관에 미륵산이 아른거렸다. 게다가 이곳은 ‘한려해상 바다백릿길’이 시작되는 1구간 달앗길이 있는 곳이다. 훌쩍 떠난 길은 예상대로 멀었다. 서울에서 출발해 5시간 반이 지나자 통영 앞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평일 오전인데도 서울을 벗어나는 데만 족히 1시간 이상이 걸렸다. 그럼 그렇지, 초심 찾아 떠난 길이 쉬울 리 있을라고….
미륵산의 보배, 미래사
미륵산(461m)이 있는 미륵도로 가기 위해 통영대교 대신 충무교를 택했다. 여러 차례 보수되면서 개통(1967년) 당시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이 다리는 통영 토박이들에게 뽀뽀다리라 불리기도 했다. 인도 폭이 한 사람 지나기도 버거워 연인끼리 깻잎처럼 꼭 붙어 다녔기 때문이다.
사실 미륵산 정상에 이르는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은 한려수도 조망케이블카다. 선로 거리 1975m, 초당 6m까지 가속할 수 있는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 부근에 내려 나무 데크를 오르면 한려수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 코스엔 방점 한 가지가 빠졌다. 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한 미래사(彌來寺)가 그 주인공이다.
미래사 전경
다도해의 절경이 펼쳐지는 산양일주도로를 타고 넘다 보면 미래사로 향하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그 길로 한동안 경사진 언덕길을 오르면 고즈넉한 공간에 빽빽이 들어선 편백나무 숲이 마음을 차분하게 정리한다. 미래사 초입에 ‘삼회도인문(三會度人門)’이란 현판은 미래에 오실 미륵불이 ‘삼회에 걸쳐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다. 석두·효봉 두 스님의 안거를 위해 2~3칸의 토굴을 짓기 시작해 1954년 대웅전을 낙성하며 사찰의 모습을 갖췄다.
압권은 자그마한 주차장에서 시작되는 오롯한 산책길이다. 주차장에서 미래사까진 100m, 미륵산 정상까진 1.2㎞, 미륵불 전망대까지 200m에 이르는데, 전망대에 이르는 길이 편백나무 숲길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여름 장마의 희뿌연 안개가 산세를 휘감았지만 곧게 뻗은 나무의 위엄은 실로 대단했다. 가만히 서 있으면 그네들이 내뿜는 피톤치드(Phytoncide)에 몸속 나쁜 기운이 알아서 사그라질 것 같았다.
볏짚을 엮어 길 위에 얹은 덕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고작 200m 길이 뭐 그리 대단할까란 지레짐작에 반대편으로 난 미륵산 정상 길로 발걸음을 옮긴다면 아까운 명소 한 곳을 눈앞에서 놓친 격이다. 산책로의 끝에는 아담한 미륵불이 남해바다, 한려수도를 굽어보고 있다. 그 불상 양 옆에 하필이면 왜 색 바랜 야자수가 자리잡고 섰는지 모를 일이지만 간혹 안개 사이로 비친 풍광은 그 모든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한려수도를 바라보고 선 미륵불
진퇴는 오롯이 당신의 몫
미래사 옆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서면 미륵산 정상에 이른다. 이 길은 달앗길의 시작이자 한려해상 바다 백릿길의 첫걸음이다. 백릿길의 시작이라니, 왠지 가파른 백두대간이 떠오르지만 산 중턱까지는 잔잔한 파도다. 경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완만해 일행과 대화하기도 좋고, 혼자라면 중얼거리기에도 그만이다. 단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날이 흐리면 안개가 산을 휘감아 습도가 높아진다. 고로 서 있어도 땀이 흐른다.
중턱에서 정상에 이르는 길은 꽤 길게 경사가 이어진다. 시야를 가린 희뿌연 안개에 습도까지 높아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럴 땐 서두를수록 힘들고 더뎌진다. 461m밖에 안된다고 얕잡아보단 큰 코 다친다. 보폭을 짧게 하고 속도를 줄여도 정상에 오르는 시간은 고작 10여 분 차이다. 정상에 서면 한눈에 들어온다는 한려수도는 종일 부슬대는 비와 안개에 가려 어느 곳으로 고개를 돌려도 허옇게 바랬다. 반대편으로 내려서는 길옆에는 야소마을로 향하는 달앗길 표지판이 선명했다. 앞서 가든 뒤에서 천천히 따라 가든 결정은 오롯이 당신 몫이다.
이정표 아래에서 통영출신 문인 청마 유치환이 지인에게 보냈다는 편지 한 통이 떠올랐다.
“오늘은 통영 미륵도를 다녀왔다네. 몇 년 만에 들른 미륵도는 여전히 56억7000만년 후에 민중을 구원하러 올 미륵을 기다리고 있더군. 산 정상에 올라 삶의 막막함, 정처없음, 허덕임 그 존재의 덫들로부터 잠시 벗어나 한가한 마음으로 한려수도의 섬들을 바라보았네. 미래사에도 갔었지. 왜 그리 뻔질나게 절집을 찾아다니느냐고 묻는가. 내가 틈틈이 고준한 정신의 세계를 거닐었던 선지식의 자취를 찾아가는 까닭은 내 영혼의 멘토가 그리운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네. 여행이라는 게 본디 참 나를 만나러 떠나는 것 아닌가….”
통영과 미륵도를 잇는 충무교
한려해상 바다백릿길1. 미륵도 달앗길
미래사~미륵산~야소마을~희망봉~달아전망대(14.7㎞, 5시간) : 경사가 심하지 않고 바다와 산, 편백숲이 조화롭다
2. 한산도 역삿길
덮을개~망산~진두(12㎞, 4시간)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자취와 숨결이 살아 있는 바다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