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을 맞아, 대학을 뒤로 하고 학생들을 떠난 지도 해를 넘긴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 컴퓨터 여기저기에는 언제 어디에 쓰려고 모아두었는지 모를 자료랄 것도 없는 자료들이 숨어 있곤 한다. 버릴 건 버리느라 했는데도 그렇다.
며칠 전이었다. 그런 어이없는 잡동사니들을 또 만났다. 무슨 고용정보원에서 운용하는 사이트에서 퍼온 미래의 직업이었다. 취업이니 스펙이니 하는 말로 날 지새는 학생들과 부대끼다 보니 이런 것도 모아놓았던가 싶은 그 자료들을 훑어보자니 ‘요 따위를 미래전망이라고 젊은이들에게 제공하는 세상이니 요새 애들이 요 꼴이지!’ 하는 뒤틀림이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앞으로, 새롭게, 부상할, 미래의 직업이라고 전망하면서 열거한 것에 노인말벗 도우미, 생체인식 기술자, 복고체험 기획자… 가 있다. 뿐만이 아니다. 외국학생 유치전문가도 있다. ‘노인 말벗 도우미’란 고령인구와 다문화 사회를 위한 직업으로 노인들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이야기를 전문적으로 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건 이미 일본에 있는 아르바이트의 하나다. 이 이야기를 다룬 일본소설은 오래 전에 한국어로 번역까지 되어 있다.
‘생체인식 기술자’는 또 뭔가. 사람의 목소리, 지문 등을 인식하는 처리시스템을 개발하거나 이를 응용한 각종 제품을 설계하는 직업이라는데, 이것조차 이미 상용되어 있는 분야가 아닌가. 지문인식 따위는 이미 낡은 이야기이고 우리 눈의 홍채를 인식하는 보안시스템이 개발되어 상용화된 지도 오래다. 내 동생 녀석이 그걸 팔러 세계를 오가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거기에 ‘외국학생 유치전문가’를 미래의 직업으로 열거하고 있는 데는 기가 막힌다. 몇 년 후면 고등학교 졸업자 전원이 대학을 가도 정원을 채울 수 없는 게 한국 대학이다. 그런 판에, 제 나라 학생으로도 정원이 모자라 쩔쩔매는 한국의 대학으로 외국 학생을 유치한다니. 그런 얼빠진 외국학생을 어디서 유치하고 그런 얼빠진 유학생을 데려온 한국 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것인지.
그것만이 아니다. ‘복고체험 기획자’라는 것이 있는데 설명하기를 ‘첨단문명으로 잊었던 과거의 향수와 기억을 되살릴 수 있도록 체험기회를 제공’하는 직업이란다. 이게 미래의 직업이라니. ‘안중근 체험’이라는 현수막을 볼 때의 느낌이 그랬다. 남산을 돌아 한남동을 오가다 보면 ‘안중근 체험’이라고 내건 현수막을 볼 수가 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안중근 체험인가. 1909년, 안중근이 뜻을 같이 하는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이때 왼쪽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는 것은 웬만한 초등학생도 안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처럼 손가락이라도 하나씩 잘라 보는 체험을 하자는 건지.
직업이란 노동보다 구체적인 형태의 하나다. 그리고 노동은 엄숙한 인간의 본능이며 숙명이다. 구약성경의 창세기가 카인의 죄업을 써놓고 있듯이 ‘이마에 소금을 절이며 살아가야 하는’ 노동은 인간의 업보, 우리의 원죄인 것이다. 사랑하는 것, 먹는 것, 노는 것… 이런 것들이 인간이 추구하는 향락이라지만 그 무엇도 노동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매일 8시간씩 사랑하고, 매일 8시간씩 놀고, 매일 8시간씩 먹으라고 해 보자. 정신병자가 되지 않는 한 그걸 일상으로 살아낼 인간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매일 8시간의 노동만은 견디어낸다. 내가 노동을 인간의 원초적인 숙명이라고 이해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노동의 한 형태가 직업일 뿐이다. 작가 알베르 까뮈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8시간의 노동이라는 구속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나머지 시간의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수십 미터 높이에서 매일 8시간씩 고공크레인 기사로는 살 수 있어도 높이 1미터도 안 되는 침대에서 매일 8시간씩 내내 여자와 사랑을 나누며 살 수 있는 남자는 없다. 표현이 난삽하긴 하지만, 인간이란 이렇게 불가해한 존재가 아닌가.
직업을 비하하는데 쓰이는 접미사가 있다. ‘질’ ‘꾼’ ‘노릇’이 그것이다. 먼저, ‘꾼’이 있다.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잘하는 사람을 뜻하면서도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꾼’이라고 비하한다. 장사꾼, 나무꾼이 있는가 하면 노름질을 일삼는 노름꾼도 있다.
사람이 하고 사는 일을 ‘질’로 비하하기도 한다. ‘선생질’이 있는가 하면 ‘도둑질’도 있다. 어쩌다가 요즈음은 ‘검사질’이라는 비아냥거림도 생겼다. 어디 그것뿐이랴. 직업으로서야 그 짓을 하랴만 ‘서방질’이나 ‘계집질’도 있고 그걸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오입질’도 있다. 그런데 어떤 직업이나 직책을 비하해서 쓰는 말이긴 하지만 좀 다른 것이 ‘노릇’이다. ‘선생 노릇’하기도 참 힘든 세상이라고 일선교사들이 한탄하는 것을 듣는다. 누군가가 ‘넌 평생 면 서기질이나 해 먹을 거냐?’ 할 때 ‘나라고 평생 말단 공무원 노릇이나 하겠소?’하고 되받는다면 하나의 직업을 놓고 ‘질’과 ‘노릇’이 부딪친다. 다 같이 하는 일의 의미나 가치를 낮추어 말하고는 있지만 ‘질’과 ‘노릇’은 엄연히 다르다. ‘노릇’이라고 말할 때 그 노동은 그 일이 맡은 바의 사회적 구실, 혹은 역할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비 노릇’이라거나 ‘사람 노릇’이라는 말을 쓴다.
故노무현 대통령이 재직시절에 했다는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한탄인지 푸념인지가 대중에 알려진 적이 있었다.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해야 하는 것이 대통령의 일이다.
이 직책의 막중함을 생각할 때, 알려져서도 안 되고 알려질 수도 없는 이런 말이 어떻게 흘러나왔는지 의문이었다. 혹 의도적으로 흘린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말한 뜻이 ‘대통령질’인가 ‘대통령 노릇’인가를 생각했었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질’을 하며 살 것인가, ‘꾼’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노릇’을 위해 몸을 바칠까를 먼저 고민하라는 것이다. 직업을 달라고 아우성치기 전에, 그 일을 받아들이는 정신 혹은 결의부터 더 견고해지길 바라는 것이다. 무슨 ‘질’을 하든 무슨 ‘꾼’이 되든 어떤 ‘노릇’을 하며 살든 하여튼 아무 직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너에게 누가 무슨 일을 시키려 하겠는가.
요즘 세상에 이런 말을 손자에게 했다간 무슨 ‘엿 같은 소리’냐고, 봉변이나 당하기 딱 좋은 줄은 나도 잘 안다. 그래선지 나는 아직 손자가 없다. 그러니, 할아버지 노릇도 못 하는 내가 젊은이들을 꾸짖어 보려니 이 짓도 못할 노릇이다. 그러나 기왕에 꺼낸 이야기라 이 말 하나만은 덧붙이고 싶다.
다산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글에는 이런 말이 있다. ‘누에가 알을 깨고 나올 때면 뽕나무가 잎을 틔운다’는 아름다운 말이다. 자연의 순리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누에가 알에서 깨어나 그 작은 몸을 꿈틀거리며 세상을 시작하는 새봄이 오면 자연은 그와 때를 맞춰 뽕나무에서 그가 먹을 새 잎을 틔운다는 것이다.
다산의 이 말은 어찌 이다지도 마태복음 6장의 말과 닮아 있는가.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