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최근 3년 동안 사용했던 아이언을 교체했다. 지인에게 소개받은 숍에서 현금 115만원을 주고 미즈노의 JPX-825 아이언 세트를 구매했다.
가격표에 적혀 있던 140만원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샀고 덤으로 골프공과 장갑, 아이언 덮개까지 받아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런데 딱 2주가 지나고 마음은 180도 바뀌었다. 함께 라운드에 나섰던 동반자가 A씨의 아이언을 보곤 너무 비싸게 샀다며 비아냥거렸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직후 인터넷 포털에서 JPX 아이언 세트의 가격을 비교 검색했다. A씨는 뒷목을 잡았다. 최저가로 판매하는 사이트의 경우 같은 스펙임에도 50만원 이상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타이틀리스트 드라이버 가격 차이 무려 30만원
인터넷 가격 비교전문 사이트 ‘다나와’의 골프 섹션을 보면 클럽과 용품, 가방과 의류 등 온라인에서 판매하고 있는 모델들의 가격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제품을 ‘인기상품순’으로 정렬하면 맨 윗줄에 뜨는 타이틀리스트의 913 D2 드라이버의 경우 일본 스펙 정품 최저가는 77만1100원이며 동급 병행수입 제품 최저가는 47만8600원이다. 가격 차이가 무려 30만원 가까이 나는 것이다. 핑 G20 드라이버의 경우도 포털에 사이트별 가격 비교 검색을 하면 22만5000원부터 70만원까지 큰 폭으로 차이가 난다. 최저가는 병행수입 제품이고 최고가는 공식 수입업체인 삼양인터내셔날 제품이다.
골프 클럽에는 세 가지 가격이 있다. 공식 수입업체가 판매가로 책정한 가격, 공식 수입업체와 거래하는 숍과 온라인 쇼핑몰 등에서 실제로 판매하는 가격, 마지막으론 ‘나까마(병행수입)’ 제품의 가격이다. 금액은 큰 폭으로 차이가 나는데, 가장 가격이 비싼 공식 수입업체의 경우 수입 가격 + 마진 + 국내 본사 운영비 + 마케팅 비용 등을 고려해 가격을 책정한다.
가령 30만원으로 수입해 왔다면 + 5만원의 마진 + 5만원의 본사 운영비 + 2만원의 마케팅 비용 등을 고려해 42만원을 판매가로 책정한다는 것이다. 거기엔 중간 도매업체와 거래 숍들의 마진까지 더해진다. 권장 판매가라는 괴상한 용어가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던롭의 젝시오 7 드라이버의 경우 본사가 숍에 권장하는 판매 가격은 90만원 수준이다. 그러나 병행수입 제품과 타 판매처와의 과도한 가격 경쟁으로 실제 판매가는 70만원 중반이다.
송파구에서 골프용품점을 운영하는 B씨는 “가격 꺾기가 관행인 것은 맞지만 요새처럼 폭이 커졌던 적은 없었다.
병행수입 제품 등 유통 판매 창구가 다양해지면서 마진이 큰 폭으로 줄어 운영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두 번째 가격이 탄생한다.
마지막으로 ‘나까마’ 제품. 일명 보따리상이라고 불리는 도매업자들이 해외에서 대량으로 제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방식이다.
현지 공장이나 대형 도매상과 직거래로 구매하다 보니 중간 마진이 없고 공식 수입업체보다 운영자금이 적게 들어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특히 저환율인 이맘때 높은 차익을 볼 수 있다. 마케팅도 공식 수입업체가 알아서 해주기 때문에 추가로 비용이 발생할 일도 없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국내 클럽시장 규모 5000억원 내외
지난해 관세청이 발표한 ‘병행수입 물품 통관 인증제’ 자료에 따르면 골프용품을 병행수입하는 국내 업체는 총 381곳으로 1년에 2억달러 가까이 수입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의류와 용품을 다 합친다고 하더라도 지난해 국내 클럽시장이 5000억원 내외인 것에 비춰봤을 때 상당한 규모의 마켓이 형성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G마켓과 11번가 등 대형 쇼핑몰에서 오픈마켓을 운영하는 한 수입업자는 “엔저 현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 브랜드의 ‘나까마’ 제품들이 차익을 많이 내고 있다. 현지 경기도 좋지 못해 덤핑으로 처분하는 클럽들이 많다. 정품과 가격 차이가 많이 벌어질수록 유리한 상황이다. 특히 한국인에게도 적합한 스펙의 제품들이 많아 리스크가 적은 편”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럽 업체들은 정품을 사용할 것을 권한다. 혼마의 김성남 마케팅 본부장은 “클럽은 신체적 스펙에 따라 샤프트의 길이와 강도, 그립의 두께 등이 결정된다. 서양인 체형에 맞게 출시된 제품이 국내 골퍼들에게 적합할 리 없다. 공식 수입사를 통해 출시되는 제품들은 국내 골퍼들의 신체와 성향, 코스 등에 따라 맞춤으로 설계된 제품이다. 가격적인 메리트보단 자신에게 맞는 클럽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클럽 업체들이 정품 사용을 권장하는 두 번째 이유는 AS 문제다. 페이스가 깨지거나 헤드가 떨어져 나가면 병행수입의 경우 제품 교체 말고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던롭의 경우 정품이 아니면 AS를 접수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병행수입 마켓이 점차 확대되면서 여러 루트를 통해 클럽의 수리가 가능해지고 있다. 혼마의 경우 병행수입 제품이라도 혼마 클럽이라면 AS를 해준다. 다만 수리비가 2배 정도 더 들고 정품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혼마 이외의 병행수입 제품 AS 불가능
그렇다면 클럽 AS를 받는 비율은 어느 정도나 될까? 브랜드와 모델마다 차이는 있지만 연평균 클럽의 AS 의뢰 요청은 300~500건 정도로 추정된다. 판매되는 제품 비율로 따져보면 한 자릿수 비율에 불과하다. 신소재 채택과 조립 기술이 발전하면서 클럽의 강성은 점차 단단해지고 수명도 길어지고 있다. 특히 저렴한 퍼포먼스 클럽들이 대거 출시되는 상황이라 클럽 교체에 대한 부담도 줄어드는 추세다.물론 소비자에게도 리스크가 따른다. 병행수입 제품은 워낙 다양한 루트로 국내로 유입되기 때문에 출처나 제조 과정이 불투명하다. 최근 중국에서 대량으로 생산돼 정품으로 둔갑하는 짝퉁 제품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몇 푼 아껴보려 했다가 헛돈만 쓰고 끝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공포가 클럽 업체들에겐 병행수입 제품에 대한 견제 도구로 작용한다.
클럽에 비해 분야가 다양해 아직 국내로 유입되지 않은 제품에 한해 ‘나까마’가 이뤄지지만 일부 고가 제품의 경우 가격 차익을 노리고 병행수입이 이뤄진다. 에코의 월드클래스 GTX의 경우 정품 판매 가격이 90만원 수준인 것에 반해 병행수입 제품은 50만원 중반에 판매되고 있다. 가격이 거의 2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심지어 신발엔 사이즈만 있지 스펙은 없다.
병행수입 제품이 이토록 범람하게 된 것은 지난 1995년 리바이스 청바지의 병행수입 허용 판결을 계기로 시작됐다. 정부가 독과점을 무기로 가격 폭리를 취하는 업체들을 견제해 허용한 것이다. 취지야 이해할 수 있지만 업계 전반적으로 영세한 골프 산업에 적합한 것인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국내 클럽 업체들은 이미 다이어트를 수차례 단행했다. 파이가 커지기도 전에 갖가지 규제와 제 살 깎아먹는 경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했다.
앞뒤로 절벽이지만 손 놓고 있을 수가 없다면 체질 개선을 단행해야 한다. 구매력을 높이고 소비자에게 줄 수 있는 혜택이 높아질 때 골퍼들은 지갑을 연다. 구매 고객들에게 자사의 정품 클럽을 사용한다는 프라이드를 높여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