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2세기 유대교 랍비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경전인 ‘토라’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6세기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됐을 때 일련의 책들을 경전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515년 예루살렘 성전이 페르시아 제국의 도움으로 재건됐지만,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은 천상의 예루살렘을 ‘토라’라는 이름으로 수집하기 시작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서 경전을 읽기 시작하고, 기원후 60년경 일련의 책들은 ‘타낙’이란 이름으로 유대교 회당의 예배에 사용됐다. ‘타낙(Tanak)’이란 ‘토라(모세오경)’ ‘느비임(예언서)’ 그리고 ‘케투빔(성문서)’의 첫 글자를 사용해 만든 이름이다. 타낙은 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에 해당한다.
이들은 ‘타낙’을 통해 유대국가를 회복하려 시도했으나 기원후 70년 로마제국은 소요와 반란이 잦은 유대를 침공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파괴한다. 유대인들은 ‘타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담긴 경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랍비들은 135년에서 160년 사이 ‘타낙’과는 다른 새로운 경전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미쉬나’이다. 히브리어로 ‘미쉬나’는 ‘반복학습으로 배우기’라는 의미다. 그래서 미쉬나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탄나임’ 즉 ‘반복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비록 문헌형태이지만 이 새로운 경전은 구전작품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암기하며 공부했다. 200년경 랍비 유다가 마침내 미쉬나를 완성시켰는데, 이것이 랍비들에게는 ‘신약’이 됐다. 미쉬나는 역사도 아니고 이야기도 아니며 신학도 아니었다. 유대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내용이었다. 미쉬나는 여섯 ‘세다림(Sedarim, 순서)’에 의해 정리된 방대한 율법적 결정사항들이었는데, 이 여섯 세다림은 다음과 같다. 제라임(Zeraim, 씨앗) 모에드(Moed, 축제) 나쉼(Nashim, 여성) 네지킨(nezikin, 손해) 코데쉼(Qodeshim, 성스러운 것들) 토호롯(Tohoroth, 정결규칙). 이들은 다시 63개의 소주제로 나뉜다.
미쉬나는 ‘타낙’으로부터 자랑스럽게 거리를 두며, 경전을 인용하지도 않았고 그 가르침에 의존하지도 않았다. 미쉬나는 유대인이 무엇을 믿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관심을 가졌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일생생활에서 어떻게 ‘차별된 거룩한 행위’를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사실 시대의 필요에 맞춰 재해석될 수 없는 경전은 죽은 것이다. 미쉬나는 단순한 지적 추구가 아니며, 그 연구가 목적이 아니다. 미쉬나는 실제 행동을 유도하도록 영감을 줘야 한다. 경전을 읽는 자는 토라를 실제 상황에 적용시키고, 이것이 공동체의 모든 이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할 의무를 지닌다. 목표는 불명확한 구절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화급한 문제에 응답하는 것이다. 실제 적용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경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랍비들은 경전을 ‘미끄라(Miqra)’, 즉 ‘부름’이라고 불렀다. 경전은 유대인들을 행동으로 인도하는 요구이다. 미쉬나는 실생활에 적용할 법률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미쉬나의 ‘네지킨’ 편에 등장하는 ‘선조들의 어록’이란 부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잠언집이다. ‘선조들의 어록’의 핵심은 1장 2절에 등장한다.
“의로운 시몬은 ‘위대한 회중’ 가운데 한 명이었다. 세상은 다음 세 가지에 달려 있다. 토라, 아보다 그리고 헤세드 베풀기.”
기원전 3세기에 생존했던 ‘의로운 시몬’은 유대인 전통에서 가장 존경받은 지도자 120명으로 구성된 ‘위대한 회중’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입법부에 해당하는 크네셋의 정수도 이 전통에 따라 120명이다. 시몬은 나라를 잃고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고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을 세 가지로 규정했다.
첫째는 ‘토라’다. ‘토라’는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경전을 총칭하는 용어다. 토라의 축자적인 의미는 ‘명중’이란 의미이다. 궁수가 자신이 당긴 활이 명중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정(靜)과 동(動)의 균형’에 따라 유연하게 몸의 흩어짐이 없이 발사해야 한다. 토라는 단순히 훌륭한 내용이 기록된 경전이 아니라, 토라를 읽는 사람의 정결한 마음가짐이며 삶이다. 평상시 삶이 흩어짐이 없고 반듯할 때, 화살이 과녁으로 달려갈 수 있다. 더욱이 토라는 ‘과녁’이 아니라, 궁수가 활을 방사했을 때부터 결정되는 활이 날아가는 ‘길’이다. 토라의 내용이 일상생활의 삶을 인도하는 ‘길’이 되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토라는 완성된다. 히브리어로 ‘하타’라는 단어는 ‘활이 과녁에 빗겨나가다’와 ‘죄를 짓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유대인들에게 ‘죄’란 십계명을 어기는 것뿐만 아니라 더욱더 근본적으로 ‘인간이 매일 매일 걸어야 할 길을 알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이다. 시편 1편은 그 길을 찾아 묵상하고 걷는 자가 행복하다고 전한다.
둘째는 ‘아보다’이다. 히브리어 아보다는 현대어로 해석하기 난해한 단어이다. 아보다는 ‘예배/신을 섬기기’와 ‘노동하기’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국왕 제임스 1세가 영국 성공회의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표준 성경을 번역하라고 명령했다. 학자들은 ‘아보다’라는 단어를 Service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Service는 영어 용례에서 ‘예배’와 ‘노동’ 모두를 뜻한다. 5세기 이탈리아의 베네딕투스는 베네딕토수도회의를 창설했고 그 수도회의 모토를 ‘노동은 기도다(Labore est orare)’로 정했다. 신을 섬기는 것은 일상생활의 직업을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드러나야 하며, 자신이 하는 직업은 신에게 하듯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세 번째는 ‘헤세드를 베풀기’이다. 탈무드에서 랍비 심라이는 “토라는 헤세드로 시작해 헤세드로 마친다”라고 말했다. 헤세드는 원래 ‘충성’이란 의미였으나 기원후 1세기부터 의미를 확장해 ‘자기희생적인 행위’의 의미를 지니게 됐다. 헤세드는 자기에게 부과된 의무를 넘어 자신에겐 손해가 되더라고 상대방이나 모두를 위한 ‘행위’이다. 신약성서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종교지도자와 학자는 아무도 없는 한적한 산속에서 다친 사람을 보고도 모른 채 지나갔지만, 한 사마리아인은 ‘필요 이상’으로 그를 데리고 여관으로 데려가 치료해주고 여관 주인에게 돈까지 주면서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다친 사람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라고 여기는 ‘공감’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자비’의 용기도 가진 자이다. 헤세드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무아’의 실천이다. 나는 2013년이 우리 모두가 자신이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해 ‘매일 매일 정진’하고 주위를 돌아보고 이웃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니르바나’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배철현 교수
고대오리엔트 언어들에 매료되어 하버드대 고대근동학과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서아시아언어문명 주임교수이다.
주요 관심사는 고대오리엔트 문명인 후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간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일이다. 주요 저서로는 <타르굼옹켈로스 창세기> <타르굼아람어문법> <창세기, 샤갈이 그림으로 그리다> 등이 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8호(2013년 0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