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눈 온다는 소식에 달려왔는데 바람만 한가득이네. 눈 오면 정말 멋질 것 같은데.”
“그래도 확실히 공기가 다르네. 아빤 눈이 훤해지는 것 같아. 저기 바위가 선명한데.”
온몸을 두꺼운 패딩으로 칭칭 두른 부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떠난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 보니 앞서가던 부녀와의 거리가 20m 남짓 가까워졌다.
“아빤 참. 눈이 안 좋으면 병원에 가셔야지 여기서 눈이 환하다면 어떡해. 서울 가면 안과부터 가봐야겠네.”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딸의 걱정에 아빠가 딴청이다.
“그러게. 그래야겠네. 그런데 정말 초점이 뚜렷한 것 같지 않아? 저 아래 개천 좀 봐. 물고기 안 보여?”
“어! 그러네. 너무 맑아서 그런 거 같은데. 아… 아빠, 여기 상수원보호구역이잖아. 아직 얼지 않았으니 물 속이 보이는 거고. 괜히 말 돌리지 말고 병원 가는 거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아빠는 또 딴청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아바이마을 가서 순대도 먹고 대포항에 가서 일출도 보자. 아빤 거기서 보는 일출이 너무 멋지더라.”
아, 여기서 잠깐. 소개할 코스와 딱 겹치는 동선인데…. 오후 5시 무렵 해는 저물고, 배꼽시계가 때 이른 저녁 식사를 알릴 때 즈음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 차에 올랐다. 아바이순대마을로 출발!!
강원도 속초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설악향기로’는 2024년 7월에 개통한 젊은 산책로다.
설악동 B지구와 C지구를 잇는 2.7㎞의 원점회귀 코스로 최대 8m 높이의 스카이워크와 15m 길이의 출렁다리가 있어 단풍절정기엔 약 10만여 명이 찾을 만큼 발디딜 틈이 없었다. 한바퀴 휘휘 돌다 보면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산책로는 쌍천의 수변로와 연결돼 거리가 늘었다. 덕분에 총 863m의 새로운 산책로와 옛 산책로의 경치를 원 없이 눈에 담을 수 있다. 물론 한 겨울에 산책로를 찾는 이는 드물다. 그런데 이 점이 색다른 순간을 선사한다. 생각해보자. 3㎞ 남짓한 길을 나 홀로 걷는다니. 언제 또 이런 순간을 맞을 수 있을까. 아쉽게 일기예보가 빗나가긴 했지만 눈이라도 내리면 설악동의 겨울 풍경은 한없이 깊고 맑게 변한다.
설악동 B지구 주차장에서 바로 출발할 수 있는 스카이워크는 아래가 훤히 보이는 철제다리 길이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걸음 떼기가 쉽지 않을 만큼 아래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높이도 꽤 높다. 건물 2~3층이 될 법한 산책로에 가지를 뻗은 나무는 있던 그대로 객을 반긴다. 원래 나무가 먼저 자리잡았으니 사람이 피해가야 한다. 이 또한 이 길을 걷는 즐거움 중 하나다. 높이 솟은 출렁다리 위에서 유유히 흐르는 쌍천을 내려다 보면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스카이워크에서 내려서면 길은 쌍천수변으로 이어진다. 설악동 C지구다. 수많은 식당과 숙소가 자리한 이곳은 아쉽지만 텅 빈 곳이 많아 을씨년스럽다. 유스호스텔, 여관, 식당 등이 즐비하지만 한집 건너 두 서너 집은 비었다. 쌍천을 건넌 후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B 지구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설악산을 찾는 이들이 꼭 들러 묵었다던 이곳은 설악향기로 조성과 함께 관광중심지로의 재도약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게 주변 상인들의 전언이다. 산책을 마친 후 들른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은 “단풍철에 반짝한 후 사람이 찾지 않는다”며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찾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선 속초 명소와 연계된 여행 프로그램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주인도 한 마디 거든다.
“아바이 마을가서 밥 먹고 대포항서 한잔한 후에 설악동서 자고 아침에 향기로 산책하면 딱 좋은 코스인데, 여기가 속초 시내보다 훨씬 싸거든요. 시설은 좀 오래됐지만 요즘 리모델링한 곳도 많아서 가성비가 넘쳐요. 한번 해보세요. 조용하고 아늑해서 힐링하기 그만입니다.”
아, 또 다시 잠깐, 이 코스를 어떻게 알았을까?! 추천코스로 딱이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2호 (2024년 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