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는 남자를 만든다.”
14세기 영국 주교였던 위컴의 윌리엄이 한 말이다. 영화 ‘킹스맨’에 나와서 무척 유명해졌다. 이때의 매너는 단순히 ‘좋은 인간관계에 필요한 정중함’을 넘어선다. 한 사회의 엘리트 계급이 되는 데 필요한 도덕관념, 행동 양식, 사회 관습이나 관행 전체가 포함된다. 윌리엄에게 매너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성숙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었다. 매너는 문명의 핵심에 놓인 질서다. 예의의 존재는 폭력을 길들여서 우리 안의 야수를 억제하고, 사회를 이룩해 공동생활을 해나가는 데 필수적이다. 곳곳에서 칼부림이 벌어지고, 총질이 일어나는 세상은 생지옥과 다름없다. 시민 전체가 우애를 증진하고 폭력을 억누르는 인생 양식을 내면화·생활화하지 않는 사회는 무너진다. 이 때문에 『논어』에서 공자는 “자기를 넘어서서 예로 돌아오라[克己復禮]”라고 호소했다.
오늘날 세계에서 세상엔 어느 때보다 매너가 필요하다. 2024년 미국의 사전 출판사 메리엄웹스터는 ‘올해의 단어’로 양극화를 선정했다. 양극화란 “한 사회나 집단의 의견이나 신념, 이해관계가 양극단에 집중된 상태”를 뜻한다. 이 말은 현대 세계의 참혹한 양태를 보여준다. 갈등과 분열이 심해지고, 시민들 간의 상호 적대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의 장은 점차 좁아지고, 물리적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를 어떻게든 척결하고 제거하려는 책동이 기승을 부리는 중이다. 2024년 12월 3일 계엄의 밤에 우리는 그 끔찍한 실체를 볼 수 있었다.
학자들은 양극화가 ‘시민다움’의 위기에서 온다고 말한다. 양극화는 흔히 동료 시민에 대한 악마화를 동반한다. 상대를 불신하고, 얕잡아 보고, 깎아내리고, 화를 내고, 증오한다. 그에 비례해 상스러운 언어와 무례한 행동도 늘어나면서 공동체가 밑바닥까지 균열한다. 먼저 무너진 예의가 나타나고, 그다음에 폭력이 등장한다. 시민다움(civilite‘ , 정중함)이 사라진 세계는 말 대신 주먹질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마련이다.
<매너의 역사> (휴머니스트)에서 설혜심 연세대 교수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20세기 말까지 에티켓 책, 처세서, 행동 지침서, 편지, 매뉴얼 등 예법서 100여 권을 치밀하게 분석해 서양에서 매너가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해왔는지를 추적한다. 이 책에 따르면, 사회 변화에 따라서 매너의 내용은 끝없이 변해 왔다. 그러나 매너 있는 행동은 언제나 인간 품격을 높여주고, 사회를 통합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좋은 매너는 당연히 더 나은 관계를 만들고, 더 좋은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평화로움을 창조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양극화의 비극이 현실화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매너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다.
매너는 무엇보다 좋은 삶의 기초를 이룬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좋음(agathon)’을 추구한다.” 아가톤은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힘이다. 인간은 이 힘을 타고나는 게 아니다. 적절한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이 힘을 늘려갈 수도 있고, 아예 잃어버릴 수도 있다. 운동선수가 훈련을 수행해 경이로운 동작을 해내고, 장인이 연습을 거쳐 아름다운 도자기를 빚어내듯, 우리는 미덕 있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인생에서 좋음을 이룩하고 나날이 불릴 수 있다.
행위가 인간을 만든다. 용기 있는 행동을 하면 용감한 사람이 되고, 비루한 행동을 즐기면 속된 사람이 된다. “특정 성품은 그 성품과 닮은 행위에서 생긴다.” 인간의 행복은 타고난 본성이나 소유한 물건에 따라서 좌우되지 않고, 오로지 실천적 행위와 미덕 있는 활동에 달려 있다. 습관이 좋은 삶을 결정한다. 품위 있는 행동은 우리를 도덕적 탁월함으로 이끌고, 예의 바른 행위는 우리 안에서 지혜를 생겨나게 한다. 영국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의 말처럼, “매너는 우리를 야만으로 만들거나 세련되게 한다.” 따라서 어릴 때 어떤 습관을 들이느냐가 한 사람의 사회생활을 결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매너를 습관화하려면 세 가지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중용, 자제력, 친애이다. 예의 바른 사람은 항상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의 길을 걷도록 애써야 하고, 이성적으로 보아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보는 충동을 억제하는 힘(자제력)을 길러야 한다. 또한 자기 이익과 상관없이 서로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 즉 우애를 품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우애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세상 모든 걸 다 가졌더라도, 친구 없는 삶은 외로움과 괴로움을 더할 뿐이다. 친구는 “외적으로 좋은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다. 평등한 사람들이 중용을 지키고 자제력을 발휘하면서 우애를 이룩해 가는 공동체, 이것이 좋은 사회의 기초이고 민주주의의 원형이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구이자 제자다. <성격의 유형들>(쌤앤파커스)은 서양 최초의 예법서다. 이 책은 예의 바름을 몸에 붙이지 못한 꼴불견 인간들을 30가지로 분류해 보여준다. “법적으로 심각한 범죄는 아니지만, 모두 도덕적으로 옳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품위가 없다고 느껴질 만한” 행위를 하는 자들이다. 가식 부리는 사람, 아부꾼, 수다쟁이, 촌놈, 눈치 없는 자, 구두쇠, 투덜이, 오만한 자, 비겁자, 비방꾼 등이다.
가령, “가식 부리는 사람은 적에게 증오심을 감춘 채 가까이 다가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이고, 촌놈은 좋은 게 뭔지 몰라 “자기 위치나 상식을 무시하는 사람”이며, 눈치 없는 자는 아주 바쁠 때 의견 물으러 오는 등 “가장 곤란한 시간을 절묘하게 골라서 귀찮게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인생이 저절로 피곤해지고, 사회생활이 힘들어진다. 이 책을 통해 테오프라스토스는 일상의 행동을 통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하는 법을 가르친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꼴사나운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매너는 르네상스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을 배경 삼아 상류층 인물들이나 행하는 궁정 예법(garazia)에서 벗어나 시민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서양에서 도시(civitas)는 좋은 삶이 가능한 문명의 공간이었다. 오디세우스의 모험이 보여주듯, 도시 바깥은 친구를 대접하는 대신 가두고 잡아먹는 키클롭스 같은 야만적 폭력의 세계였다. 질서가 잘 잡힌 도시에서 평등하게 살려면, 누구나 적절한 행동거지를 익히고 자질을 길러야 했다.
아무도 저절로 시민이 될 수는 없다. 심지어 귀족조차 걸맞은 품행 없이는 형편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에라스뮈스는 말했다. “인문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귀족으로 여겨야 한다.” 품행을 익히고, 성품을 길러서 사회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공동체 속에서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극단에 중독되어 행복한 삶의 척추가 되는 이 오래된 지혜를 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