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금융통화위원회가 열린 1월 16일. 기준금리 동결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파격적 발언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계엄 사태 후 1개월여간 급등한 환율의 40~60%를 ‘정치적 원인’이라고 직격했다. 경제 불안의 핵심요인이 경제 내적인 게 아니라 외부의 정치 리스크에서 비롯됐다는 뼈아픈 경고였다. 그는 “정치 문제는 질질 끌더라도 경제 문제는 실무자들 위주로 빠르게 진행해 경제정책이 정상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평소 직설화법을 구사했던 걸 감안해도 뜻밖이다.
정치권에선 선을 넘었다거나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불거졌다. 일각에선 ‘미스터 오지랖’이라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고 꼬집는다. 불똥이 튈 걸 의식한 듯 스스로 “경제적 발언”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경제·정치 상호작용이 깊어진 상황이니 가벼이 넘길 건 아니다. 진영 갈등이 더 심해지면 공멸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기우만은 아니어서다. 한국경제는 이미 사면초가다. 환율은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다. 외국자본 이탈은 가속페달을 밟는다. 에너지와 원자재는 물론 식료품 등 소비재 값도 급등해 일상이 팍팍하다. 트럼프 집권 2기가 시작돼 반도체·배터리 등 산업계 압력도 크다. 1%대 중반으로 추락한 성장률은 더 곤두박질칠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치권은 계엄·탄핵 시비가리기에만 매몰돼 경제를 뒷전으로 미뤘다. 위기 타개 방안을 찾기보다 진영 논리로 국민들을 찢어 놓기 바쁘다. 이 총재가 “금리를 몇 % 낮추는 것보다 정치가 안정되는 게 경제 안정을 위해 중요하다”고 일갈한 건 속타는 국민들 마음을 대변한 걸 테다.
그나마 다행이다. 한은이 직접적인 돈값(금리) 조정에만 매달리지 않고 시장을 통한 돈풀기를 병행하며 비상조치를 취했으니. 당장은 기준금리를 내려도 정치불안 영향에 파묻힐 상황인 만큼 굳이 카드를 낭비할 때는 아니란 판단이었을 것이다. 한은이 계엄 사태 후 한달여간 60조원 이상 환매조건부채권(RP)을 매입하며 대규모 유동성을 시장에 공급한 건 적절했다. 일각에선 코로나19 팬데믹 때보다도 훨씬 많다며 과도하다고 하나 그리만 볼 건 아니다. 경제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시장 붕괴를 잘 막았기 때문이다.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려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걱정도 없진 않다. 그래도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때엔 시장 신뢰를 유지하는 게 더 시급하다. 시장이 일단 무너지면 재건은 지난하다. 경제전문가 집단의 판단이 흔들리지 않아야 시장도 붕괴하지 않는다.
대규모 RP매입을 두고 일각에서 계엄 사태 여파를 줄이려 모의했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과하다. 억측으로 정치 갈등을 경제 리스크로 전이하면 한국경제 신뢰에만 금이갈 뿐이다. 여야가 서로를 탓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에 국민 고통은 깊어간다. 지금 필요한 건 경제에서만큼은 초당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여야정 민생경제협의체를 즉각 가동해 벼랑 끝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숨통을 틔워줘야 한다. 정치 불안이 경제를 위협한다는 지적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이 기대하는 건 싸우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 위기를 넘기 위해 ‘일하는 정치’다.
[장종회 월간국장 매경LUXMEN 편집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3호 (2024년 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