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헌철 특파원의 워싱턴 워치] 바이든 정부, 이민정책 딜레마 美 유화적 정책에 멕시코 국경 봇물 터졌다
신헌철 기자
입력 : 2021.03.29 10:30:00
수정 : 2021.03.29 10:33:15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민정책을 놓고 딜레마에 빠졌다. 그는 취임 첫날 불법이민 청소년들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행정명령을 내리면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반(反)이민정책을 뒤집기 시작했다.
불법 이민자에 대한 포용정책은 인권을 최우선하는 민주당이 지난 대선에서 내세운 핵심 공약 중 하나였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바이든 정부가 들어선 뒤 지난 2월 10만여 명이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넘다가 체포됐고, 3월에는 불과 보름 만에 그 숫자가 13만여 명으로 늘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강력한 반이민정책을 펴고 있던 1년 전(2020년 3월)에는 체포된 인원이 3만4000여 명에 불과했다. 이쯤 되면 남부 국경에 ‘봇물’이 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이든 정부도 성인이나 가족단위 밀입국자는 신속 추방하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트럼프 정부 때부터 ‘타이틀 42’로 불리는 공중보건법이 적용되는 것인데 국경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추방을 정당화했다. 온두라스, 과테말라,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등 중남미 지역에서 멕시코와 미국 국경까지 목숨을 걸고 올라온 사람들은 “여성과 아이들은 받아준다고 믿었다”고 울부짖었다. 멕시코 티후아나에는 수많은 이민 희망자들이 “바이든, 제발 우리를 들여보내 주세요”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집단 시위를 하고 있다. 대부분은 텐트에서 생활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형편이다. 이른바 ‘코요테’로 불리는 인신매매 업자나 밀입국 브로커들은 대목을 만났다.
미국 국경순찰대 차량에 타 있는 온두라스 이민자 소녀
바이든 정부는 18세 미만 청소년이 단독으로 국경을 넘는 경우는 일부 예외를 적용하고 있다. 보호자가 없는 청소년은 미국에 머무를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하루 500명 이상의 청소년들이 국경을 홀로 넘고 있다.
청소년도 원칙상 72시간 내에 추방돼야 하지만 친척이나 보호자를 찾을 때까지 인도적 차원에서 집행이 지연되는 사례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텍사스주와 애리조나주에는 미국에 들어와 있는 3500명 이상의 불법이민 청소년들을 위한 단기 수용시설이 새로 만들어졌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청소년 추방 문제에 대해 “백악관으로서도 매우 감정적이고 어려운 문제”라고 난감한 처지임을 시인했다.
공화당은 즉각 국경 문제를 정치적 공격의 소재로 삼고 나섰다. 케빈 매카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는 지난달 국경을 시찰한 뒤 “바이든이 만들어낸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레그 애봇 텍사스주 주지사는 “바이든 정부가 불법 이민자를 미국으로 초청하고 있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밀려드는 중남미 이민자들에게 시달리기는 멕시코 정부도 마찬가지다.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그들은 바이든을 ‘이민 대통령’이라고 여긴다”고 꼬집었다. 급기야 바이든 대통령도 지난달 중순 ABC방송 인터뷰에서 “미국으로 넘어오지 말라”며 “우리가 제도를 준비하고 있으니 당신의 마을과 도시를 떠나지 말라”고 호소했다.
▶공화당 집중 문제제기… 내년 중간선거 뇌관 될 듯
이민자 문제는 인권을 내세운 민주당 정부로서는 도덕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사안이지만 남부 접경지대에서 표를 잃게 만드는 ‘양날의 검’이다. 당장 2022년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이민자 문제를 최대 선거쟁점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트럼프 정부가 취했던 반이민정책 대부분에 제동을 걸었다. 코로나19를 이유로 강제 추방을 정당화한 ‘타이틀 42’만이 예외였던 셈이다. 지난 2월에는 멕시코 국경에서 가족 간 분리된 이민자들을 모두 상봉시키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발족시켰다. 트럼프 정부는 앞서 국경에서 이른바 ‘무관용 정책’을 내세워 5500여 가족을 분리 수용시켰고 이 가운데 600여 명의 아동들이 부모를 잃어버렸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당일 ‘불법체류청년추방유예(DACA)’ 프로그램을 유지하기로 정책을 변경하고, 멕시코 국경장벽 건설을 중단시켰다. 트럼프 정부가 이민자 증가를 차단하기 위해 도입했던 400여 건의 행정조치를 굵직한 것부터 하나씩 폐기하고 있는 셈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백악관은 “트럼프 정부의 국경 정책은 잔인했다”며 “대통령은 수천 명의 가족을 갈라놓은 트럼프 정부의 이민정책을 뒤집는 것이 최우선 과제임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바이든표 이민정책도 윤곽을 드러낸 상태다. 바이든 정부가 지난 2월 공개한 새로운 이민 시스템에는 ‘2021 미국 시민권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핵심은 현재 1100만 명가량으로 추산되는 불법 체류자 대다수에게 최대 8년의 경과 기간을 두고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합법적 통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밥 메넨데즈 상원의원과 린다 산체스 하원의원이 각각 상하원에서 대표 발의한 해당 법안에 따르면 올해 1월 1일 이전에 미국에 입국한 불법 체류자가 신원조회를 거친 뒤 세금을 납부하면 5년간 미국에서 취업이 허용되는 비자가 발급되고 해당 기간을 채우면 영주권도 신청할 수 있다. 영주권을 받으면 3년 뒤 시민권도 신청할 수 있게 된다. 또 부모를 따라 청소년기에 미국에 불법 입국한 청소년, 이른바 ‘드리머’들은 즉시 영주권 신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르면 3년 뒤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 이미 불법체류 중인 이민자가 합법적 거주 자격을 취득한 뒤 배우자나 자녀를 미국으로 초청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취업이민 쿼터를 현행 연간 14만 개에서 17만 개로 확대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만약 민주당의 이민법 개혁안이 상하원을 모두 통과하면 35년여 만에 가장 큰 이민제도 개혁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문제는 이민 문제를 정치쟁점화하고 있는 공화당의 반대다. 미 의회는 지난 수십 년간 공화당과 민주당의 이견으로 인해 종합적인 이민개혁에 실패했다. 버락 오바마 정권 때인 지난 2013년에도 불법 이민자의 시민권 취득 경로를 열어주되 국경 봉쇄는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이 상원을 통과했으나 하원 문턱에 걸려 좌초된 바 있다. 올해는 반대로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은 이민법 개혁에 찬성하고 있으나 50대 50으로 갈라진 상원이 문제다. 이에 따라 민주당 일각에선 바이든 정부가 제시한 종합 이민법 대신에 몇 개로 이민개혁안을 나눠 분리 입법을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청소년 불법이민자 법안, 농장 근로인력 현대화 법안 등으로 쪼개자는 얘기다. 그래야 농장의 인력 충원을 원하는 공화당 우세지역의 지지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합법적 이민을 제도적으로 확대한다고 해도 끝없이 밀려드는 중남미 불법 이민자들을 수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래저래 이민자 문제는 바이든 정부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로 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