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고조되던 무역 긴장 완화를 위해 유럽연합(EU)이 한발 먼저 움직였다.
EU 집행위원회가 500억 유로(한화 약 81조 원) 상당의 미국산 제품을 추가로 수입할 의향이 있다고 밝히며 관세 협상에 실질적인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이 제안은 미국 트럼프 전 행정부가 유럽산 제품에 20% 상호 관세를 예고한 이후 경색됐던 양측 무역 관계를 다시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신호로 해석된다.
EU 집행위의 마로스 세프코비치 무역담당 집행위원은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우리는 미국과 무역 불균형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라며, LNG와 대두를 포함한 일부 주요 품목에서 수입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특히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우려를 실질적으로 덜어주는 방식이 효과적일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번 제안의 배경에는 ‘숫자 해석’에 대한 견해차가 존재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해 EU가 미국 과의 상품 교역에서 2천억 달러가 넘는 흑자를 봤다며 이를 근거로 상호관세를 주장했다.
‘반면 EU 측은 상품뿐 아니라 서비스 교역까지 포함하면 미국의 대유럽연합 무역적자는 500억 유로 정도로 줄어든다고 강조한다.
세프코비치 위원은 “우리가 이 적자를 상쇄할 수 있는 구조적 방안을 제시한다면, 미국도 입장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며, 이미 미국 측과 여러 차례 고위급 협의를 진행해왔고 일정한 진전을 이뤘다고 밝혔다.
EU가 미국산 LNG와 농산물을 수입하겠다는 구체적 제안을 내놓은 건 단순한 양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EU는 에너지 안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으며,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대체 수입처 확보가 시급하다.
이 상황에서 미국산 LNG는 현실적인 대안이다. 이미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미국 LNG 수입 터미널 확장에 투자하고 있으며, 장기계약 체결도 논의되고 있다.
또한 유럽은 사료 수요가 급증하는 축산업 구조 덕분에 미국산 대두의 소비 여력도 충분하다.
EU가 선제적으로 ‘실물 구매’를 제안한 것은 미국 정치권이 강조하는 ‘무역적자 해소’ 요구에 실질적인 응답을 준 셈이 된다.
특히 미국의 셰일가스 산업과 농업 벨트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양국 모두에게 상호이익이 될 수 있는 제안이라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관세 문제에 있어 EU의 입장은 단호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현재 대부분의 유럽산 제품에 10%의 기본관세를 적용하고 있으며, 이를 사실상 ‘최저선’으로 못 박은 상태다.
이에 대해 세프코비치 위원은 인터뷰를 통해 “10%는 여전히 매우 높은 수준이며, 유럽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가 서비스 수지까지 포함해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을 보이는 만큼, 미국도 융통성을 보여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는 EU가 단순히 관세율 수용이 아니라, 구조적 접근을 바탕으로 협상을 풀어나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EU가 미국과의 공조 범위를 관세나 무역수지 문제를 넘어, 중국과 관련한 글로벌 공급망 조정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프코비치 위원은 “철강, 알루미늄,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발 과잉 생산은 양측 모두에게 위협”이라며 “핵심 원자재 확보와 기술 독립을 위한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는 기존의 통상 이슈를 넘어서, 전략적 산업 경쟁력을 함께 지켜내자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EU가 최근 내놓은 ‘경제 안보 전략’과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모두 공급망 다변화와 중국 의존도 탈피를 목표로 삼고 있는 만큼, 양측이 기술표준과 핵심 자원 조달 방식에서도 협력의 여지를 넓혀갈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한편 EU가 이처럼 적극적인 제안을 내놓은 배경에는 다가오는 정치 일정도 한몫했다.
올가을 유럽의회 선거를 앞둔 유럽 주요국들은 보호무역주의 흐름에 대한 대응 성과를 유권자에게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다.
동시에 미국 역시 오는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으며,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할 경우 관세 협상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
EU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독일, 체코, 네덜란드 등 제조업 중심국은 미국산 제품 구매를 통한 관세 협상 진전을 환영하지만,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농업 보호가 중요한 국가는 미국 농산물 수입 확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여기에 환율이나 원자재 가격 변동에 따른 실질 구매력 문제도 향후 협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번 EU의 제안은 숫자를 맞추자는 단순한 ‘계산’ 그 이상이다.
세프코비치 위원은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며, 문제 해결의 핵심을 ‘신뢰 회복’에 두고 있음을 시사했다.
관세율 인하와 무역수지 조정은 그 자체보다도, 협상의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상징적 조치’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제안의 무게감이 크다.
무역 갈등이라는 오랜 골칫거리를 잠재우기 위해 유럽이 제시한 이 ‘실용주의적 해법’이 과연 워싱턴에서도 통할 수 있을지, 향후 몇 달간의 협상 결과가 대서양을 가로지른 경제 질서의 재편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