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 최고정보책임자(CIO) 보좌관인 히라모토 겐지 씨가 말하는 지난 20년 일본 정부 디지털화의 현주소다.
한자입력코드 표준화는 5만8861자의 한자를 단말기나 기종에 상관없이 제대로 표시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역시도 2000년 일본 정부 차원에서 IT기본전략을 발표한 뒤 17년이 지난 2017년에서야 완성됐다.
일본 정부라고 디지털화에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00년 당시 소니 최고경영자(CEO)였던 이데이 노부유키를 의장으로 IT전략회의가 꾸려졌다. 정부 차원에서는 모리 요시로 당시 총리가 본부장을 맡은 IT전략본부를 만들었다. IT전략회의와 IT전략본부가 머리를 맞대고 2000년 11월 내놓은 것이 ‘IT기본전략’이다.
스가 요시히데(管義偉) 일본 신임 총리가 9월 16일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취임 후 첫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5년 내 세계 최고 수준을 목표로 내건 전략엔 야심찬 계획들이 잔뜩 포함됐다. 5년 내 3000만 세대에 고속인터넷망을 깔고 이와는 별도로 1000만 세대에 대해서는 광섬유를 활용한 초고속인터넷망을 제공한다는 계획이었다. 또 2003년까지 모든 행정처리 24시간 온라인 처리, 2005년까지 인터넷 보급률 60% 이상 등도 포함됐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드러난 일본의 디지털화 수준은 처참할 정도였다.
확진자가 나와도 통계에 포함될 때까지 평균 사흘이 걸렸다. PCR 검사를 실시한 병원 등에서 결과를 지역 보건소에 보고하고 이를 다시 각 지자체에서 취합했다. 이 모든 과정이 팩스로 이뤄졌다. 가장 많은 확진자가 나온 도쿄에서는 도쿄도청에 설치된 2대의 팩스로 정보를 취합했다. 이렇다보니 확진자 보고가 누락되거나 중복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통계가 들쭉날쭉한 상황이 벌어졌다. 또 초기엔 각 지자체의 정보를 중앙 정부 차원에서 취합하는 것도 일원화된 체계가 없다보니 한동안 전체 확진자 숫자를 각 언론사들이 자체적으로 집계해 발표하기도 했다. 부랴부랴 후생노동성에서 ‘허시스’란 시스템을 5월에 만들었지만 기존 지자체별 시스템과 호환이 되지 않아 도입은 지지부진했다. 여기에 일부 지자체가 정보관리의 부실을 문제 삼으면서 대부분 지자체가 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정부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엉성함이 드러났다. 여전히 ‘도장’을 우선하는 결제문화를 유지한 탓에 외출 자체를 요청한 긴급사태 기간 중에도 도장 찍으러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또 전 국민을 상대로 인당 10만엔의 지원금을 제공키로 결정한 것은 4월이지만 실제 지급이 완료된 것은 10월이 돼서다. 본인 확인과 계좌 정보 수집이 우편을 통해 진행되면서 시간이 걸렸다. 신청방식도 초기엔 인터넷을 이용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해당 내용을 다시 현장 공무원들이 출력해 확인하느라 더 많은 시간이 걸리자 우편이용을 우선하라고 요청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일본과 비슷한 시기인 2000년을 전후로 디지털화와 전자정부 등을 추진했다. 20년간 많은 국가들이 실행에 나섰고 디지털화가 진행됐지만 일본은 이 시간을 허비한 꼴이다. 일본 경제가 거품경제 붕괴 후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것에 빗대어 디지털 정책에선 ‘태만의 20년’을 보냈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매년 IT 관련 예산만 7000억~8000억엔(약 7조6000억~8조7000억원)을 쏟아부었지만 달라진 게 없다는 비판이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9월 24일(현지시간) 도쿄에서 디지털 개혁 관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들끓는 민심에 9월 16일 출범한 스가 요시히데 내각에선 디지털화를 핵심 정책으로 내걸었다. 2021년 디지털청 신설, 정부 도장 사용 폐지, 디지털정부각료회의 신설 등 실행안이 쏟아졌다. 또 정부의 디지털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이른바 ‘정부 CIO’로 불리는 내각정보통신정책감의 권한도 강화했다.
정권의 명운이 걸린 듯 추진되면서 이번엔 디지털화가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여전하다. 지금껏 일본의 디지털화를 막아온 요인들의 영향력이 여전해서다.
대표적인 것이 개인정보 관리에 대한 의구심이다. 일본에서 지금까지 디지털 정부 추진이 늦어진 대표적 이유 중 하나가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전 국민이 보유한 개인식별번호가 없다는 것이다.
통일된 번호가 없다보니 데이터를 생산하는 기관 외에 다른 기관에선 이를 활용할 수 없었다. 일본 정부에선 이런 상황을 바꾸겠다며 2016년부터 마이넘버란 이름의 식별번호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전 부처에서 관리하는 개인정보를 연계시키겠다는 것이다. 명확한 정책 목표와 달리 보급률은 지지부진하다. 올해 10만엔의 재난지원금 신청 때 마이넘버카드를 활용하면 더 간단히 할 수 있다고 홍보하면서 많이 늘었지만 9월 말 보급률은 여전히 20.2%에 머물러 있다. 개인정보를 정부가 관리하려는 목적이 세금을 더 물리려는 것 아니냐 등의 의구심이 여전해서다. 또 하나로 엮인 개인정보가 언제든 유출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염려도 상당하다.
이와 함께 부처별, 지자체별 이기주의도 한몫했다. 일본에서 주민등록은 지방자치단체의 업무다. 일본 전역의 1700여 개 개별 지자체가 모두 제각각의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시스템 수주는 대부분 해당 지역의 IT 업체들이 맡아왔다. 지자체의 시스템은 수주 규모도 크지만 이후 유지 보수까지 일괄수주하는 식이다.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다보니 개별 업체들 입장에선 전국적인 시스템 통합 등에 반대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들 기업이 전체 시스템을 인질로 삼아서 클라우드 등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을 반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개별 지자체 역시 정부의 통제권이 강화되는 상황을 염려해 소극적인 상황이다. 중앙 부처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지만 역시나 민감한 정보를 타 부처와 공유하는 것은 주저하고 있다. 디지털 개혁을 내건 스가 내각이 ‘태만의 20년’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지 주목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