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승 특파원의 월스트리트 인사이트] 글로벌 콘퍼런스에 참여 늘어나는 여성 리더, 월가에 女風… JP모건 차기 CEO도 ‘여성 2파전’
장용승 기자
입력 : 2019.06.05 11:11:49
수정 : 2019.06.05 11:12:14
지난 4월 28일~5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튼호텔.
올해도 어김없이 ‘미국판 다보스포럼’이라고 불리는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가 열렸다.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는 밀컨 연구소가 1998년부터 매년 4월경 로스앤젤레스에서 여는 행사다. 밀컨 연구소를 설립한 마이클 밀컨은 1980년대 고위험·고수익 채권인 정크본드 시장을 처음 개척한 인물로 ‘정크본드의 왕’으로 불렸다. 주가 조작과 내부자 거래 혐의로 복역하기도 한 그는 이후 자선사업가로 변신했고, 1991년 싱크탱크인 밀컨 연구소를 세웠다.
올해 22회째를 맞은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 현장에 가보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여성 연사들이었다.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4000여 명이 이번 행사에 몰려든 가운데 내로라하는 여성 리더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번 행사의 기조연설은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맡았다. 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 백악관 선임보좌관이 오찬 특별 연사로 나섰다. 이 외에도 일레인 차오 교통부 장관, 메릴린 휴슨 록히드마틴 최고경영자(CEO), 이베이와 휴렛패커드 CEO를 역임한 멕 휘트먼 퀴비 CEO 등 다양한 분야의 여성 리더들이 대거 참석했다. 블룸버그뉴스는 “첫 행사가 열렸던 1998년의 경우, 전체 57명의 연사 중 여성 연사는 2명에 불과했지만 이번 행사에서는 800명의 연사 중 여성 연사가 250명이었다”고 분석했다.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컨퍼런스에서 여성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최근 추세다.
블룸버그뉴스는 “2017년 ‘미투 운동’을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보다 많은 여성들을 콘퍼런스에 참여시키려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라며 “올해 다보스포럼의 경우도 전체 패널리스트 중 37%가 여성이었다”고 분석했다. 블룸버그뉴스는 이어 “전체 세션 중 95% 가량은 최소한 한 명의 여성 패널리스트를 포함시켰다”고 전했다.
사실상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를 비롯한 글로벌 포럼들은 ‘부자들의 사교 모임’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고 실질적으로 세계가 직면한 글로벌 문제에 대한 해법을 논의한다는 차원에서 여성 참여 비중을 높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이번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의 주제는 ‘번영을 공유하자(Driving Shared Prosperity)’였다.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불평등 심화를 해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그리고 말뿐 아니라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취지에서 다양한 여성 리더들을 정면에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멜린다 게이츠
글로벌 콘퍼런스뿐만 아니라 그동안 백인 남성 중심의 뉴욕 월가에서도 최근 ‘여풍(女風)’이 불고 있다.
최대 투자은행(IB)인 JP모건은 지난 4월 매니징디렉터(MD) 117명을 승진시킨 가운데 이 중 여성은 30명(26%)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고 경제매체 CNBC 방송이 보도했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8%포인트 높아진 비율이다. 통상 매니징디렉터는 IB 업계의 최고위급으로 분류된다.
아울러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CEO 후계구도도 ‘여성 2파전’으로 진행되고 있는 분위기다.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지낸 메리앤 레이크는 5월부터 소비자 대출 사업부를 책임지고 있다. 이번에 주요 사업부문을 총괄하게 되면서 한층 입지를 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레이크의 후임으로 새로운 CFO로 선임된 제니퍼 펩색은 그동안 신용카드 사업부를 담당했었다. 월가의 최장수 CEO인 다이먼이 당장 은퇴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에서는 레이크와 펩색 간 차기 CEO 경쟁이 본격화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JP모건 CEO 자리에 오르면 미국 주요 은행권에서는 최초 사례가 된다는 점에서 높은 관심을 끌고 있다. 다만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올해 63세인 다이먼 CEO는 지난 2월 투자 콘퍼런스에서 은퇴 계획을 묻는 질문에 “5년, 아마도 지금부터 4년”이라고 답변해 당분간 CEO자리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에 참석한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또 다른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도 여성 인력을 대폭 늘리고 있다.
CNBC는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부터 골드만삭스의 데이비드 솔로몬까지 월스트리트 CEO들이 한 목소리로 여성 인력을 강조하고 있다”며 “특히 남성이 장악하고 있는 트레이딩, 자문 부문의 고위직급에 여성을 늘리겠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마이크로소프트(MS) 창립자인 빌 게이츠의 아내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민간 자선재단인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공동 이사장인 멜린다 게이츠는 지난 4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자신의 책 <오름의 순간(The Moment of Lift)> 발간 기념 북콘서트에서 “세계 빈곤 퇴치의 지름길은 바로 여성 권리 강화”라고 주장했다.
게이츠는 “빈곤국의 여성들이 가정에서 담당하는 역할은 매우 크지만 정작 그들의 권리는 제약돼 있다”며 “학교에서 공부할 권리, 정치에 출마할 권리, 취업할 권리 등이 일부 국가에서는 아예 법으로 금지돼 있을 정도”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여성 차별이 해결된다면 궁극적으로 여권 신장, 가정교육 강화, 빈곤 개선 등 선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책 제목도 <오름의 순간>으로 정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게이츠의 부친은 우주선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부친의 영향으로 게이츠는 어렸을 때부터 우주선 발사를 구경할 기회가 많았다. ‘10-9-8-7-6-5-4-3-2-1’이라는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우주선은 굉음과 함께 하늘로 발사되는데 바로 이 순간이 우주선이 본궤도에 잘 오를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우주선 발사 시점이 중요한 것처럼 여성 차별 요소들을 개선해 ‘여성 권리 강화→빈곤 퇴치’ 추진력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게이츠는 무엇보다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핵심과제라고 주장했다. 게이츠는 “필리핀, 방글라데시, 탄자니아, 케냐 등 모든 개도국에는 스마트폰이 보급돼 있어 디지털 뱅킹이 가능하다”며 “여성들이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면 경제·금융 지식을 터득해 한 가정 내에서도 위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아직까지 전 세계적으로 여성 차별 요소가 여전히 많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이에 대한 개선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