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와 관세전쟁을 선포했다. 한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57개국에 기본관세와 상호관세 부과를 예고했다. 이날을 ‘해방의 날(Day of Liberation)’로 부르며 관세를 앞세운 미국 우선주의의 닻을 올렸다. 7월 31일을 기점으로 각국과 관세협상을 통해 국가별 관세율이 매겨졌다.
이후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자동체, 반도체, 알루미늄 등은 물론 의약품, 가구, 목재 등에도 시도 때도 없이 품목 관세를 물렸다.
관세로 미국의 재정수입은 늘었지만 수입가격에 충격을 주다보니 물가는 강한 상승 압박을 받고 있다. 수입업자와 기업들이 관세비용을 감당하면서 가격인상을 막고 있지만 시간문제라는 분석이다. 하나둘 가격전가가 나타나면서 시장에선 관세발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이를 일축하고 있다.
물론 수치상으로 소비자물가(CPI)는 2%대를 유지하며 우려만큼 인플레이션 영향이 크지 않고 이마저 일회성이라는 분석이 다수지만 체감물가는 이미 5~6%대라는 아우성이 나온다.
유틸리티, 자동차, 전자기기, 의류 등은 물론 당장 밥상 물가까지 꿈틀거리며 미국을 위한다는 관세에 미국 소비자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특히 얇아진 지갑에 가뜩이나 심한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간 소비 격차는 더 벌어졌다.
 
          뉴욕에 사는 엔지니어 캘빈 린 씨는 최근 마트를 찾았다가 적지 않게 놀랐다. 립아이 스테이크 가격이 파운드당 32.99달러로 불과 2주 전보다 6~7달러 올랐기 때문이다. 이후 린 씨는 스테이크 대신 버거용 고기를 구입하고 연어 대신 새우를 사먹는다.
아이 둘을 키우는 파멜라 씨는 소비자물가(CPI)가 2~3%대라는 정부 발표를 믿지 않는다. 그는 “세이프웨이에서 빵 한 덩이가 이제 5달러이고 코스트코에서 달걀 한 알이 50센트”라며 “아무리 절약해도 4인 가족 식비가 한 달에 1000달러를 넘어섰다. 물론 외식비를 제외한 것”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식료품과 생필품 가격이 모두 오르고 있다”며 “트럼프 정부의 모든 조치들이 물가를 올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최근 국제유가 하락에 주춤하긴 했지만 휘발유 값도 부담이다. 브랜트 씨는 “연초만 해도 갤런당 평균 2.33달러였던 휘발유 가격이 지금은 3.5달러에 달한다”며 “트럼프 관세 때문에 물가는 내려가지 않고 상품비용이 이젠 소비자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여전히 연방준비제도(Fed) 목표치인 2%에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 올들어 1월 3.0%였던 CPI는 매달 하락세를 보이다 8월 다시 2.9%로 올라섰다. 시장 전망치와 일치했지만 전달(2.7%)보다 상승폭을 키웠다. 1월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로 다시 3%대를 위협하고 있다. 변동성이 큰 식료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CPI는 전달과 마찬가지로 3.1% 올랐다.
특히 식품물가는 전년보다 3.2% 상승했다. 에너지 가격 역시 6~7월 국제유가 하락으로 마이너스를 보이다 8월에는 0.2%로 반등하며 7개월만에 상승세로 전환했다. 물가 수준을 판단하는 또다른 지표인 개인소비지출(PCE) 가격지수는 8월 2.7%를 기록했다. 시장 예상치에 부합했지만 전달(2.6%)보다 올라 상승세다. 변동성이 큰 식료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PCE 물가는 시장 예측치인 2.9%를 기록하며 전달(3.0%)보다 하락했다. 본격적인 물가상승은 이제부터라는 전망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레스토랑 관리 회사인 토스트가 최근 외식업계 721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레스토랑 운영자들은 인플레이션(20%)을 가장 우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들 운영자들 가운데 절반(48%)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될 경우 메뉴 가격을 인상할 것이라 답했다.
뉴욕에서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하는 마이클 브래프먼은 “달걀, 유제품, 육류, 가금류, 샌드위치의 모든 핵심 재료의 가격이 치솟고 있다”라고 전했다.
전미레스토랑협회는 적어도 5% 이윤을 유지하려면 평균 메뉴 가격을 31% 인상해야 한다고 추정했다. 채드 무트레이 전미레스토랑 협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폭스뉴스에서 “메뉴 가격 인상은 일반적으로 레스토랑 운영자에게 최후의 수단이지만, 식품 및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운영을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고 설명했다.
인플레이션은 가장 먼저 가장 약한 고리를 겨냥한다. 가뜩이나 경기둔화의 사정권에 든 저소득층은 물가상승 타격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받는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70%를 차지하는 소비지출이 흔들리고 있다. 물가 상승과 구매력 저하에 가장 크게 노출된 저소득층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고용악화까지 겹쳐 저소득층의 지출은 더 위축됐다.
주거비와 공공요금 상승도 저소득층의 가계에 부담을 주고 있다. 최하위 20% 계층은 소득의 약 40%를 주거비로 사용한다.
시장조사기관 써카너의 마셜 코언은 “주거비를 먼저 해결해야 다른 지출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8월 소비자물가지수(CPI)에 따르면 휘발유와 전기요금은 전년 대비 각각 13.8%와 6.2% 상승했다. 식료품 물가도 전월 대비 0.6% 상승하면서 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트럼프 상호관세는 의류와 장난감, 가전제품, 가구 등 수입품의 가격을 일제히 끌어 올리고 있다. 소비자들은 필수품 이외 지출은 줄이거나 급기야 저축을 줄이고 빚을 내고 있다. 무디스 보고서에 따르면 저소득층의 저축은 팬데믹 이전보다 22% 급감했다.
라파엘 보스틱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저소득층과 중간 소득층은 더 이상 여분의 돈이 없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중산층마저 소비를 줄이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좀더 값싼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할인 소매업체를 방문하고, 큰 비용이 드는 지출은 과거보다 줄이는 소비패턴을 보이고 있다.
다만 경기의 영향을 덜 받는 고소득층의 구매력은 큰 변화가 없다. 이 때문에 미국 전체 소비와 성장도 큰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는 분석이다.
2분기 미국 경제 성장률은 전분기 마이너스에서 수직 상승해 3.8%를 기록했다.
무디스에 따르면 연 소득이 25만달러(약 3억 5000만원) 이상인 상위 10%는 2분기 미국 전체 소비의 49.2%를 차지했다. 2년 전 같은 기간의 45.8%에서 3.5%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그만큼 미국 경제가 고소득층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식당체인 스위트그린의 조너선 네이먼 최고경영자(CEO)는 “전반적으로 소비자 구매력이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트럼프 관세가 식품과 상품의 일부 가격을 끌어올리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수입은 미국 식품과 음료의 약 20%를 차지한다. 다만 아직까진 수입업자들이 관세비용을 떠안으면서 급격한 물가상승은 없다. 대신 관세를 여러 주체가 분담하는 동시에 전가하는 ‘스니크플레이션’(sneakflation)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최종 소비자의 가격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연방준비제도(Fed)가 고용악화를 이유로 금리인하를 재개하면서 물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올해 상반기까진 미국 소비자들이 관세 비용의 22%를 흡수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이 같은 관세패턴이 이어질 경우 향후 이 비중은 67%까지 3배 이상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알베르토 카발로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교수는 “관세의 일부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1년 이상 걸릴 수 있다”며 “하지만 1년 후, 아니면 2년 후에는 소비자들이 관세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특히 CNN은 이 같은 물가상승이 저소득층 소비자에게는 ‘느린 고통’처럼 더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헤더 롱 네이비 연방 신용조합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저소득층은 매주 지출을 조정하며 생존하고 있다”며 “첫 주에는 고기를 포기하는 대신 아이 신발을 사고, 다음 주에는 자동차 할부금을 미루고 전기세와 병원비를 낸다”고 설명했다.
[임성현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2호 (2025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