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왼쪽)와 피터 시프 유로퍼시픽캐피털 최고경영자가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월가에는 많은 비관론자들이 있다. 대표적인 비관론자로는 닥터둠으로 불리는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누리엘 루비니 교수 겸 루비니글로벌이코노믹스(RGE) 회장 그리고 마크 파버 마크파버인터내셔널 회장이 있다. 그런데 입만 열면 이들 두 명의 닥터둠보다 더 암울한 경제전망을 쏟아내는 극단적 비관론자가 있다. 바로 피터 시프(Peter Schiff) 유로퍼시픽캐피털 최고경영자(CEO)다. 루비니 교수가 “시프 CEO와 비교하면 나는 닥터둠(Dr.doom)이 아니라 닥터붐(Dr.boom)”이라고 말할 정도니 시프 CEO의 비관론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시프 CEO는 가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과도한 비관론을 설파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월가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프 CEO는 지난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발 글로벌 금융위기 단초가 된 주택시장 붕괴를 예견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시프 CEO가 2006년부터 주택시장 거품을 경고하고 시장붕괴를 예고했을 때 대다수 월가 전문가들은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냐”며 시프 CEO의 경고를 흘려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주택시장 거품이 터지면서 시프 CEO의 암울한 예언이 그대로 들어맞자 그를 다시 바라보게 됐다.
이후 시프 CEO가 2010년 유로존 재정위기에 따른 글로벌 경제위기까지 정확히 예측하면서 통찰력 있는 경제 구루 대접을 받을 만큼 유명세를 탔다. 비관론으로 철저히 무장한 시프 CEO가 또 한 차례 아마겟돈 시나리오를 가지고 시장을 찾았다.
연준 4차 양적완화(QE4) 불가피
2014년 2분기 이후 미국경제가 나 홀로 성장세를 지속하면서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하지만 시프 CEO는 미국 경제가 시장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취약한 상태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하지만 대부분 저임금 일자리고 가계소비 확대로 연결될 수 있는 고임금 일자리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시프 CEO의 진단이다.
특히 미국경제가 회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준 양적완화와 저금리 정책에 따른 인위적 성장이기 때문에 부양수단을 거둬들이면 미국경제가 다시 침체국면에 접어들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때문에 지난 10월 말 3차 양적완화(QE3)조치를 종료한 데 따른 후폭풍이 점차 가시화돼 증시가 폭락하고 미국 경제가 삐걱거리는 신호를 보내면 연준이 4차 양적완화(QE4)에 접어들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2015년 2~3분기로 전망되는 연준 기준금리 인상도 물 건너 갈 것으로 보고 있다. 자생력 있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기준금리까지 올릴 경우, 주식 등 자산시장에 큰 충격을 줄 것이라는 것을 연준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에너지 가격 하락이 소비자물가를 끌어내릴 것이라는 점도 인플레이션을 경제성장 기본 전제조건으로 생각하는 연준 입장에서 기준금리를 올리기 힘든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시프 CEO는 QE4가 달러가치 폭락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본다. QE3를 종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QE4를 시행할 경우, 연준정책에 대한 시장 신뢰가 훼손되고 결국 달러가치 폭락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달러가치가 급락하면 달러로 결제되는 금값이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처럼 솟구칠 것으로 보고 있다. 시프 CEO가 금을 2015년 최고 투자대상으로 보는 배경이다. 미국경제 회복세 속에 달러가치 초강세 현상이 이어지고 금값은 약세를 지속할 것이라는 시장 컨센서스와는 정반대 진단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저유가 대신 고유가 시대 온다
시프 CEO는 또 대체적인 시장 전망과는 달리 저유가 흐름이 오래가지 않고 2015년에 지난 수년간 평균치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유가가 올라설 것으로 진단한다. 시프 CEO는 저유가가 공급과잉에 따른 수급 이슈라는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글로벌 원유 수요 증가폭이 둔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늘어나고 있고 미국발 셰일 붐에 따른 공급증가 효과도 전체 석유 생산량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에 그친다고 본다.
때문에 시프 CEO는 저유가 배경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 먼저 투자자들의 투기적 베팅 때문이다. 석유 수요가 늘어나 유가가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 속에 2014년 상반기에 투자자들이 유가 매수 포지션을 4년래 최고치로 확대했다. 그런데 2014년 6월 이후 유가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면서 손실을 제한하기 위해 투자자들이 앞다퉈 손절매에 나선 게 도미노 효과를 초래, 과도한 유가하락을 가져왔다는 설명이다. 과도한 매수 포지션이 정리돼 시장이 정상으로 돌아가면 반작용으로 유가 랠리가 연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달러강세도 저유가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진단이다. 석유는 국제시장에서 달러로 결제된다. 달러가치 상승은 석유가 하락으로 이어진다. 지난 한 해 동안 달러화는 유로존, 일본 등 다른 중앙은행들이 양적완화 등 초완화통화정책을 강화하는 반면 미국 연준은 통화긴축으로 갈 것이라는 전망 속에 초강세를 보였다. 하지만 시프 CEO는 연준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QE4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달러가치가 급락하고 유가는 급등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저유가로 북미지역 신규 셰일개발 모멘텀이 약화되면서 셰일유 생산이 줄어들 것이라는 점도 유가상승 쪽에 무게중심을 맞추는 이유라고 시프 CEO는 설명하고 있다.
디플레이션 나쁘지 않다
시프 CEO는 연준이 인플레이션 유발정책을 펼치는 게 미국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더 나아가 현재 경기침체 상황을 극복하려면 디플레이션이 오히려 더 낫다고 주장한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한참 벗어난 도발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시프 CEO는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케인지언들이 물가하락을 경기침체 원흉으로 취급하는 데 반대한다. 케인지언에 따르면 물가가 떨어지면 소비자들이 제품값이 더 하락할 때까지 구매를 미루기 때문에 총수요가 줄어들고 공장가동률이 떨어진다. 고용이 줄고 결국 경기는 리세션에 빠지게 된다. 반대로 물가상승은 지출을 늘리고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물가가 더 오르기 전에 사람들이 물건을 미리 사도록 부추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프 CEO는 이 같은 케인지언의 주장을 배격한다. 소비자들은 가격이 낮을 때 소비를 늘리고 가격이 오르면 소비를 줄이고 집에 머무는 게 대부분이라고 강조한다. 시프 CEO는 “디플레이션으로 물건 값이 떨어지면 그만큼 소비자들이 더 낮은 가격으로 제품을 살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소비자에게 나쁜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결국 디플레이션으로 가격을 떨어뜨려 소비확대로 연결시키는 것이 경제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시프 CEO의 생각이다. 시프 CEO는 연준이 인플레이션 유발에 목을 매고 있는 것에 대해 미국경제가 회복되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산거품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시프 CEO의 과도한 비관론이 2015년에 먹혀들지 여부는 미지수다. 정확한 예견도 많이 했지만 헛다리를 짚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시프 CEO는 QE3 중단 조치가 시장에 큰 충격을 줄 것이라는 공포감을 조성했지만 현실이 되지 않았다. 달러화 약세, 초인플레이션 전망도 맞아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시프 CEO는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지난 2006년 주택시장 붕괴를 얘기할 때 나는 조롱을 받았다. 하지만 내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고장 난 시계처럼 하루에 두 번은 맞춘다는 비아냥을 들을지 아니면 그의 블랙스완 비관론이 또 맞아떨어질지 시간이 좀 더 흐르면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