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부모들에게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있는 ‘디즈니 월드(Disney World)’는 ‘숙제’와도 같은 곳이다. 자녀들과 함께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여행 필수코스 가운데 한 곳이기 때문이다. 마법의 성을 배경으로 삼거나, 미키마우스 분장을 한 도우미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은 어린 자녀들은 물론이고 부모들에게도 좋은 추억거리가 된다.
문제는 가족 단위로 이곳을 방문하려면 부모들이 ‘큰 맘’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디즈니 월드를 비롯해 유니버설 스튜디오 등 각종 테마파크들이 밀집해 있는 올랜도를 두루 여행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시간도 만만치 않게 걸린다.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가정들은 휴가를 이용해 올랜도에 며칠씩 머무르는 것이 보통이다. 비용은 숙박과 교통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가족이 올랜도 여행을 즐기려면 수천 달러는 기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월트 디즈니사(社)의 테마파크 부문은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다. 직장이 불안해지고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지자 미국 부모들이 디즈니 여행을 뒤로 미루거나 아예 단념한 탓이다.
그런데 올여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월트 디즈니사의 지난 2분기 수익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8% 증가한 125억달러(약 13조2000억원)를 기록했다. 특히 디즈니 월드를 포함한 테마파크 사업부문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20% 이상의 신장세를 보였다. ‘대박’이 터진 셈이다.
CNN머니는 최근 “디즈니 경제(Disney Economy)가 복귀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인들의 휴가철 체감경기가 경제위기 이전의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환호성이다. CNN머니는 올랜도에 위치한 디즈니 월드뿐만 아니라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체인인 MGM, 윈(Wynn) 등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전했다.
아닌 게 아니라 워싱턴DC 주변의 핵심 고속도로망인 66번, 95번 고속도로는 지난 7월 이후 매주 금요일 오후면 극심한 정체를 빚고 있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여행을 떠나는 인파들 때문이다.
휴가 못 가는 미국인들 상당수
다만 경제가 좋아지면서 그동안 휴가와 관련해 억눌려 있던 불만도 터져 나오고 있다.
사실 미국은 휴가에 매우 인색한 나라다. 미국은 선진국 가운데 의무 유급휴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다. 심지어 출산과 육아와 관련해서도 단 하루의 유급휴가도 인정하지 않는다. 올해 초 미국에서 실시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다수 미국 직장인들은 연간 10일 정도의 휴가를 받는다. 독일과 아일랜드보다는 10일, 프랑스보다는 20일 정도 휴가일수가 적다.
놀라운 사실은 미국 직장인의 61%가 휴가를 떠나서도 계속 업무를 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에 대해 응답자들은 ‘다른 동료보다 덜 부지런하게 보일까봐’, 혹은 ‘직장에서 쫓겨날까봐’라고 답변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 직장인 4명 가운데 1명은 아예 휴가를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미국 직장인의 77%만이 유급휴가를 받는 것으로 집계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도 남들처럼 휴가를 가져보자’는 목소리가 미국 내에서 점점 높아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올여름 시작된 ‘휴가 평등 프로젝트’(Vacation Equality Project)다. 이 캠페인의 목표는 간단하다. 모든 미국 직장인에게 의무휴가를 주자는 청원을 백악관에 제출하자는 것이다.
온라인 여행예약 사이트를 운영하는 호텔스닷컴(Hotels.com)이 이 캠페인을 후원하고 있다. 모든 미국 직장인들에게 의무휴가가 부여되면 미국의 내수 경기 활성화는 물론이고, 온라인 여행예약 사이트에도 큰 이익이 될 것이다.
긴 휴가 즐기는 정치인들이 의무휴가 반대
하지만 현실은 그다지 녹록하지 않다. 정작 법을 만드는 워싱턴DC에서는 의무휴가제 도입에 냉담한 반응이다.
알랜 그레이슨(민주·플로리다) 하원의원은 2009년 사상 최초로 ‘유급휴가 법안’(Paid Vacation Act)을 제안했으나 곧 폐기되고 말았다. 그레이슨 의원은 일부 조항을 고쳐 지난해 5월, 법안을 다시 제출했지만 상임위원회 단계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휴가를 회사와 근로자 간의 계약조건 연장으로 보는 미국식 문화다. 게다가 야당으로서 하원을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도 ‘무급휴가’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무턱대고 휴가를 늘렸다가는 기업 부담이 커지면서 고용이 위축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정작 미 의회 의원들은 7월 31일부터 9월 첫 번째 월요일인 노동절까지 한 달가량의 장기 휴가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1970년에 제정된 ‘입법 재정비법’(Legislative Reorganization Act)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