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 남미 2위 경제대국 아르헨티나는 950억달러의 대외채무를 상환할 능력을 상실했다며 국가 디폴트(채무상환 불능)를 선언했다. 돈이 없어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겠다고 국가 파산을 표명한 것. 돈을 빌려준 국제 채권단은 꼼짝없이 천문학적 투자손실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기업이 부도를 내면 기업에 돈을 빌려준 채권단은 떼인 돈을 조금이나마 보전하기 위해 남아있는 기업 자산을 나눠가져가는 빚잔치를 벌인다. 그런데 국가 부도의 경우,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정 국가 정부가 줄 돈이 없다고 나자빠지더라도 채권단이 해당 국가 자산을 마음대로 가져갈 수는 없다. 돈을 갚지 않는다고 주권국인 국가를 청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가 채무를 상환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채권단은 해당 국가와 채무재조정(debt restructuring)에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채무재조정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빚을 깎아주는 것이다. 채권단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돈을 받아내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이때 얼마만큼 채무를 탕감해줄지를 놓고 헤어컷(haircut)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듯 부채를 싹둑 잘라 탕감해주는 것을 의미하는데 헤어컷 비율을 어느 정도로 가져갈지를 놓고 디폴트 선언 국가와 채권단이 밀고 당기기를 거듭한다. 헤어컷 수준에 따라 채권단이 받을 수 있는 돈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헤어컷을 40% 적용했다고 하면 빌려준 돈의 60%를 받게 되고 70%가 되면 원금의 30%만 받게 되는 식이다. 당연히 부도위기에 직면한 국가는 헤어컷 비율을 높이기를 원하고 채권단은 최대한 헤이컷 비율을 낮추는데 올인하게 된다. 2012년 초 나라곳간이 바닥을 드러낸 그리스가 파산위기에 처했을 때 국제채권단은 74% 헤어컷에 합의한 바 있다. 100원을 빌려줬다면 26원만 받기로 한 것. 이 같은 채무재조정을 통해 그리스는 1000억유로에 달하는 빚을 탕감받았다. 대신 채권단은 돈을 다 떼이지 않고 일부를 변제받을 수 있게 됐다.
채무 재조정 중 NML 소송으로 디폴트 위기
아르헨티나도 2001년 디폴트를 선언하자마자 곧바로 채권단과 채무재조정에 들어갔다. 2010년까지 마라톤협상을 통해 71~75%의 헤어컷비율을 적용, 실제로 갚아야 할 빚을 크게 줄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채무재조정에 합의한 채권단은 전체 채권자의 92.4%로 나머지 7.6%는 채무재조정을 거부한 채 원리금을 모두 상환해달라고 버티고 나선 것. 하지만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미 압도적인 다수 채권자들이 일정부분 손실을 감수하고 채무재조정에 합의한 상황에서 목소리가 큰 일부 채권자에게 원리금 100%를 변제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이들의 요구를 일축했다. 그러자 미국의 NML캐피털 등 2개 헤지펀드는 2012년 미국연방법원에 아르헨티나 정부를 상대로 13억3000만달러에 달하는 원리금 채무액을 전액 변제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법원은 채권자가 채권변제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라며 헤지펀드들의 손을 들어줬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에 불복해 상고했지만 지난 6월 16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아르헨티나 정부 상고를 기각하면서 아르헨티나는 이들 헤지펀드에게 채권 원리금 100%를 변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특히 소송을 제기한 헤지펀드 채무를 변제하기 전까지는 채무재조정을 통해 신규 국채로 갈아탄 채권단에게 국채이자를 지급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 아르헨티나를 기술적인 디폴트 상태로 내몰았다. 일부 헤지펀드 때문에 아르헨티나가 13년 만에 다시 국가부도 위기에 빠져드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아르헨티나 국가부도를 볼모로 원리금 변제를 압박하고 있는 NML캐피털은 미국 억만장자 헤지펀드 거물인 폴 싱어 엘리엇매니지먼트 회장이 소유하고 있는 헤지펀드 중 하나다. 올해 70줄에 들어선 싱어 회장이 이처럼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채권 원리금을 100% 받아낸 사례가 적지 않다. 엘리엇 회장은 1996년 부도가 난 페루 국채 1140만달러어치를 사들인 뒤 소송을 걸어 승소하면서 58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또 파산으로 휴지조각이 돼버린 기업 회사채나 국가 국채를 바닥권에서 사들인 뒤 변제 소송을 거는 방식을 통해 큰돈을 벌어왔다.
아르헨티나 국채도 마찬가지다. 사실 NML캐피털은 2001년 아르헨티나가 디폴트를 선언하기 전이나 그 이후에도 상당기간 아르헨티나 국채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르헨티나와 채권단 간 채무재조정 협상이 장기화되면서 국채값이 폭락하자 2008년 원래 가격의 20% 선에서 아르헨티나 국채를 쓸어 담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싱어 회장을 처음부터 소송을 통해 100% 원리금을 받아내겠다는 전략을 가지고 아르헨티나 국채에 접근한 투기세력이라고 비난하는 이유다.
싱어 회장은 소송을 통해 아르헨티나 정부를 압박하는 한편 소송 제기 후 2012년 10월에는 아프리카 가나에 정박한 아르헨티나 군함을 채무 변제용으로 차압하는 도발을 감행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싱어 회장을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보는 배경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연방대법원 패소 확정 후에도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 유력신문에 싱어 회장의 헤지펀드가 글로벌 금융시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국가를 거덜내는 방식으로 큰돈을 버는 벌처펀드라며 맹비난을 퍼붓고 있다. 벌처펀드란 죽은 시체를 먹이로 삼는 독수리(벌처)처럼 부도가 난 채권에 투자해 고수익을 올리는 투기 성향이 강한 펀드를 말한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오른쪽)
NML캐피털 ‘벌처펀드’ 논란에 ‘정상적 투자활동’ 반박
실제로 싱어 회장이 굴리는 대다수 헤지펀드들은 부실채권을 사들인 뒤 중간에 가격이 오르면 팔거나 원리금 100% 상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법원에 제기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내왔다. 벌처펀드와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지만 싱어 회장은 벌처펀드 비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싱어 회장은 엘리엇매니지먼트 산하 헤지펀드들은 벌처펀드가 아니라 정상적인 투자활동을 통해 사들인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투자자로서 당연히 채권 원리금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일 뿐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정상적인 투자활동을 비난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헤지펀드 업계 거물로 성장하면서 개인자산만 15억달러에 달하는 싱어 회장은 변호사 출신이다. 로체스터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하버드 법학대학원에서 법학석사(JD)학위를 취득, 변호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77년 싱어 회장은 친구와 가족들로부터 십시일반 거둬들인 130만달러를 가지고 헤지펀드 엘리엇어소시에이츠를 설립했다. 이후 지주회사격인 엘리엇매니지먼트를 설립, 엘리엇어소시에이츠 등 몇 개의 헤지펀드를 거느리는 헤지펀드 업계의 빅샷 반열에 올랐다. 현재 운용자산만 210억달러에 달한다. 1977년 펀드 설립 이후 연간기준으로 단 두 번만 손실을 봤을 뿐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전체적으로 연평균 14%의 높은 수익률을 거뒀다.